경허(鏡虛)선사의 오도송 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

2021. 7. 14. 16:28선시 만행 한시 화두

 

 

화두(話頭)와 같은 선사들의 오도송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道의 경지, 곧 깨달은 그들의 경지, 그것은 말과 글로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道라는 것은

<非思量處요 情識難測>이라고 했고, 또 <言語道斷>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를 해설한다는 것은 깨달은 자가 아니면

그 해설은 蛇足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도송이나 화두와 같은 것에 대한 해설은

단지 그 사람의 情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낚시할 줄 모른다고 생선도 먹을 줄 모르겠느냐고 말하지만,

이는 도의 경지를 왜곡한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낚시할 줄 몰라도 잡은 생선을 입맛에 따라,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 요리를 선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리를 한다면 이미 그때는 죽은 고기를 요리하는 것이다.

말과 글이란 그 죽은 고기와 같은 것이다.

해설자의 취향과 견문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은 할 수는 있겠지만,

깨달은 자의 살아있는 悟道의 그 경지와는

한참 먼 거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도송이나 화두와 같은 것은 머리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말을 다시 새겨본다.

 

경허스님의 오도송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들으매

旽覺三天示我家 (돈각삼천시아각) 온 우주가 나 자신임을 깨달았네

有月燕岩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유월"연암산" 아랫길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하염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의 이 오도송은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연암산 천장암에서 1년 동안 보임한 끝에 내지른 오도송이다.

그때가 1881년 6월, 경허스님 세수 33세 때 일이다.

(출처 : 불교신문)

 

선사가 동학사에 머물 때이다.

경허의 사제인 학명 도일이 어느 날 곡식 볏가리를 내리는 이처사를 만났다.

이처사는 경허스님의 시봉을 받들 던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이다,

이처사가 아들 소식을 묻자 건강하게 잘 있다고 대답하자 이처사가 한마디 한다.

“중이 중노릇 잘못하면 중이 마침내 소가 됩니다”

이에 학명도일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다 다 이루지 못하여 죽어서 소로 태어나면

그 시주에게 은혜를 갚으면 되겠지요 ” 하자

이처사가 다시 한마디 한다.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요.” 했다.

 

학명도일은 이 한 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돌아와 경허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이 한마디를 전해 듣고는, 바로 깨달았다고 한다.

 

@경허(鏡虛, 1849년~1912년) 스님은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속명은 동욱(東旭)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 때 과천의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계허(桂虛) 밑에 있다가,

동학사의 원오(圓悟)에게서 경학을 배웠다.

1871년 동학사의 강사가 되었으며,

1879년 돌림병이 유행하는 마을을 지나다가

죽음의 위협을 겪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학인을 모두 돌려보낸 뒤 문을 닫고 좌선하여 묘지를 크게 깨달았다.

경허 스님은 1880년 어머니와 속가 형님인 스님이 주지로 있던

연암산 천장암(천장사)으로 거처를 옮긴다.

 

1894년 동래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인경불사·수선사 등의 불사를 주관했다.

이후 지리산 천은사·안변 석왕사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갑산·강계 등지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쓴 모습으로 박난주(朴蘭州)로 이름을 바꾸고 살았다.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기고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