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정혜사

2021. 6. 22. 23:50국내 명산과 사찰

 

수덕사 만공탑을 지나니 바로 옆에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나고

그 돌계단 끝에 돌담에 둘러싸인 전각이 보인다.

이곳이 수덕사의 말사인 정혜사인 모양이다.

위치를 보면 덕숭산(德崇山)의 7부 능선쯤에 해당한다.

덕숭산(德崇山)은 해발 495m로 수덕산(修德山)으로도 불리며

기암괴석이 풍부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파른 지형 탓에 정혜사는 돌담 축대로 둘러 있다.

 

 

 

 

정혜사 입구에 다다르니 스님들의 참선 수행도량이라서 그런지

입구에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있고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포기하고 내려갈까 하다가 먼 길을 내려와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왔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운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닫힌 문을 밀어보았더니

행운인지, 수덕사와 인연이 있는지 빗장이 걸려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입구에서 대충 전각을 둘러보고

사진 몇 카터를 담고 나가려다 외출하려고 나오는 스님 한 분을 만났다.

관음전에 참배해도 되는지 물으니 쾌히 승낙해 주신다.

이번 수덕사 순례는 묘하게도 예기치 않은 행운이 많았다. 인연인가?

 

 

@정혜사(定慧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고,

본사인 수덕사와 함께 599년( 신라 진평왕 21년, 백제 법왕 1)에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지명(智命)법사에 대한 기록이 없어 스님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포항 내연산 보경사와 전북 익산 용화산 사자사 창건기에 스님이 이름이 나온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전북 익산 용화사 사자사에 머물렀던

지명법사(知命法師)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백제의 제30대 임금인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는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와 혼인하여

백제에 돌아와 살면서 금(金)을 언덕처럼 쌓아놓고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신라로 수송할 계책을 물었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어주었다고 한다.

포항 내연산 보경사의 창건기록에는

602년(진평왕 25) 진(陳)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 지명(智明)법사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명법사의 전생담을 담은 이야기는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에 전해지는 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후한 명제 11년(68년)에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승려가

대월지(아프가니스탄) 경내에서 만난 왕준, 채음(蔡愔) 등

후한의 사신을 따라 흰 말에 《사십이장경》(四十二章経)과

불상을 싣고 수도 낙양에 왔다는 전설에 따라 지은 절이 백마사(白馬寺)인데

그때 그 흰말(白馬)이 지명법사의 전생이라고 한다.

정혜사의 창건 이후 많은 고승 대덕 들이 수도한 곳으로 추정되지만,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알 수 없다.

다만, 1930년 만공선사(滿空禪師)가 중수한 이후

사세(寺勢)가 크게 확장되었다. 스님이 이 절 선원(禪院)의 조실이 된 이래

문하에 100여 명의 승니(僧尼)가 따랐고,

현대의 불교계를 움직인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을 비롯하여 수도본전(修道本殿)인

능인선원(能仁禪院)·산신각·불유각(佛乳閣)·주지실·요사 등이 있으며,

그 중에도 정혜사의 현판이 걸려 있는 선원은 고색과 무게를 갖춘 당우이다.

또한, 깨끗한 정원의 구석에는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작은 2기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어 쌍탑(雙塔)

또는 남매탑(男妹塔)이라고 하나 유래 및 연대 등은 알 수 없다.

능인선원

 

 

 

@수덕사와 정혜사의 전설

 

백제 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 중창 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 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 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 모양의 버선 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신중탱
칠성탱
지장탱

 

<만공스님 일화 하나>

@만공스님은 수덕사 소림초당에서 거문고를 즐겨 타셨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만공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다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거문고를 타면 마음이 즐거워집니까, 슬퍼집니까?”

만공스님은 찻잔의 물을 가리키며 스님에게 되 물었다.

“이 찻잔의 물이 깨끗한 것이냐, 더러운 것이냐?”

“그야 깨끗한 것이지요.”

“자 그럼 내가 마신 찻잔의 물은 나중에 오줌으로 나올 것이다.

그것은 깨끗한 것이냐, 더러운 것이냐?”

 

스님이 더러운 것이라고 대답하자.

만공스님은 그 스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을 이었다.

“그 오줌이 땅에 젖어 물기가 되고 그 물기를 도라지가 빨아먹어 꽃을 피웠다.

그 꽃은 깨끗한 것이냐, 더러운 것이냐?”

“그 꽃은 깨끗한 것입니다.”

 

 

만공스님은 스님의 대답에 빙그레 웃으면서 한소리를 했다.

“너는 물 한 잔을 가지고 깨끗했다. 더러웠다고 마음대로 바꾸는구나.”

“보아라. 물은 원래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것이 찻잔에 담기면 깨끗해지고 오물통에 담기면 더러워진다.

같은 물이라도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이니라.

거문고 가락도 슬픈 사람이 들으면 슬프게 들리고,

기쁜 사람이 들으면 기쁘게 들리는 것, 기쁘고 슬픈 것은 없는 것이다.”

 

어느 옛 선사의 이런 법어가 생각난다.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마음이 만 가지 경계를 따라가니 따라가는 그곳이 실로 그윽하기 그지없구나

그러나 따라가는 그 마음의 본성을 깨달으면 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산신각
산신각에는 산신과 독성을 모셨다.
산신

 

덕숭원의 남매탑

@남매탑이라면 공주 계룡산의 남매탑이 떠오른다.

남매탑이 세워진 내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호랑이가 찾아와 입을 벌리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

스님은 호랑이의 목에 걸려 있는 큰 뼈다귀를 빼주었는데,

호랑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져버렸다.

얼마 후 호랑이가 스님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거기에 실신한 처녀가 있었다.

스님은 그 처녀를 암자로 데리고 와서 간호를 하였다.

얼마 후 정신이 든 처녀는 자신이 상주에 사는 임진사의 딸인데

혼인날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만 기절을 하였는데 이 곳까지 왔다고 하였다.

스님이 호랑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자

처녀는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며 부부의 연을 맺기를 청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상원조사는 흔들리지 않고

함께 수도에 정진하자고 하며 거절하였다.

그 후 스님과 처녀는 의남매를 맺고 불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는데

후에 상원조사의 제자 회의화상이 두 개의 불탑을 세워

그 뜻을 기렸고, 사람들이 그 탑을 오뉘탑이라고 불렀다.

정혜사의 이 남매탑에도 그럴싸한 전설이 있을 것 같은데....

 

 

 

 

 

석문

<만공스님 일화 둘>

만공스님이 수행했던 정혜사 아래에 있는 소림초당은

바로 만공스님 뜻에 따라 벽초스님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일화는 벽초스님이 만공스님을 모시고 만행할 때 받은 화두 이야기다.

 

만공스님이 물었다.

“요즘에는 어떻게 공부하고 있느냐.”

벽초스님은 답했다.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찾고 있습니다.”

제자의 답을 듣고 난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화두를 참구하도록 했다.

“너무 넝쿨이 많구나. 공부하는 법을 한 가지 일러주겠다.

너의 그 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찾아보아라.”

 

이 일화를 보니 옛 스님의 법어 하나가 생각난다.

「風動心搖樹 雲生性起塵 若明今日事 昧却本來面目」

(바람이 부니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이니 성품에 티끌이 일어난다.

오늘의 일을 밝히려 한다면 본래 면목과 멀어지나니)

 

조주스님이라면 「끽다거(喫茶去)」라 했을까.

 

진양문(금선대 출입문인것 같은데 닫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