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소림초당 관음보살상 향운각

2021. 6. 18. 21:15국내 명산과 사찰

 

이번 수덕사 탐방은 처음부터 걷기가 불편한 몸이라

가볍게 경내만 들렸다 귀경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내려가다 보니 마음이 조금 변했다.

수덕사 안내판을 보니 수덕사 경내를 벗어나면

사면불, 소림초당, 관음보살입상과 향운각, 만공탑까지 외길로 이어지고

정혜사까지는 고작 1.1km라서 정혜사까지만 둘러보기로 했다.

 

정혜사 가는 길은 통상적으로 대웅전 뒤편으로 난 계곡 길을 오르는 것인데

관음전을 들리다 보니 옆으로 난 오솔길이 있어 그 길을 접어들었다.

덕숭산은 해발 495m 정도 낮은 산이라

어느 코스로 올라도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화소대(花笑臺)가 나오고 길은 막혔다.

마침 화소대의 한 스님이 있어 정혜사 가는 길을 물으니

대웅전 뒤편 계곡 길을 따라가라고 한다.

다시 돌아 내려가기가 뭐해서 주변을 보니

화소대 옆으로 희미한 숲길이 보여 그 길을 따라 올라갔다.

조금 오르니 대웅전 뒤편에서 오르는 계곡 길과 만나고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면불이 나타났다.

사면불에서부터는 계곡 옆 외길이라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었다.

 

화소대

 

사면불

사면불에서 소림초당까지는 7~800m이다.

덕숭산(崇山)은 산은 낮지만 오르는 길은 돌계단이 많고 제법 가파르다.

쉬엄쉬엄 소요(逍遙)하면서 걸었다.

절기가 유월이라 그런지 푸른 녹음이 엊그제 내린 비 탓인지

더욱 싱그럽게 정취를 뿜어낸다.

 

 

 

 

 

 

 

 

 

 

 소림초당(小林草堂)

갱진교를 지나면 거대한 암벽 옆으로 길이 나 있고 소림초당(小林草堂)이 보인다.

소림초당은 만공(滿空) 스님이 생전에 수행하던 암자로

1925년 바위 위에 지었다고 한다, 만공 스님이 처음 거처했던 곳과

현재의 위치가 다르다고 한다. 입구에는 긴 대나무로 통로를 차단하고

옆에는 <출입금지>라는 기왓장에 경고문이 붙어 있다.

행운인지 전생에 수덕사와 인연이 있었는지

수행하던 스님이 초당에서 나와 의자에서 앉아 있길래

향운각 가는 길을 물었더니 바로 올라가면 된다고 일러 준다.

이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면서 초당을 둘러볼 수 있느냐 물었더니

흔쾌히 안내해 준다. 초당은 볏짚으로 지붕을 잇고 뒤편은 거대한 암벽이다.

수행하는 곳이 토굴이나 암굴인 줄 알았는데 이름 그래도 초당(草堂)이다.

선방 안까지 보기는 뭐해서 만공 스님을 생각하며 초당 주변만 둘러보았다.

 

 

 

만공(滿空) 스님은 1871년(고종 8년) 전라도 태안군 군내면 상일리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 씨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滿空)은 법호이다.

따라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렀다.

 

만공스님영정

그는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고

간화선(看話禪)의 수행과 보급에 노력하신 선승으로

제자들에게는 무자(無字) 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1940년대에는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예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만공 스님은 1884년(고종 20년) 경허(鏡虛, 성우 1849~1912)선사의 인도로

서산시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鏡虛)를 계사 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는 이후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를 화두로

참선에 들어간 스님은 25세에 아산시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만공 스님의 오도송>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공산의 이기는 고금을 초월하고

백운과 청풍은 저절로 오고 가네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에서 넘어왔는가?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네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던 중 1904년(광무 7년)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이바지했다.

 

@경허 선사의 세달

경허 선사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세분이 있다.

혜월(慧月, 1861년~1937년) 스님, 수월(水月, 1855년~1928년) 스님,

그리고 만공(滿空, 1871년 ~1946년) 선사다.

경허 스님은 이 삼월에 대해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라고 했다.

 

만공 스님은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보급과 전파에 전력하였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강조하였다.

덕숭산 상봉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암자를 짓고 생활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계속 전월사에서 생활하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 중얼거린 뒤

잠들듯이 열반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덕숭산에서 다비 후 유골은 금선대 근처에 부도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眞影)은 경허 스님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스님의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만공 스님의 일화 하나>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만공 스님 주위에는 항상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소리하는 예인들이 많았다. 남농 허건, 허백련 등 화가들을 비롯해

소리 잘하는 풍류객들도 종종 만공을 찾았다.

만공 스님은 그럴 때면 늘 옆에 끼고 있던

'공민왕 거문고'를 타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스님의 거처였던 덕숭산 소림초당 앞의 작은 다리 갱진교(更進橋)는

달빛을 벗 삼아 만공 스님이 거문고를 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거문고는 의친왕 이강 공에게 신표로 받은 것으로,

공민왕이 직접 만들어 탄 이후, 대대로 조선왕조에 전해온 왕가의 가보였다.

현재는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의친왕으로부터 거문고를 하사받을 정도로 알려지자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노래 하나를 불러주었다.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고 나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으니

내가 부른 그 노래가 바로 법문이라 답하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상좌들은 나중에 은유적으로 풍자한 그 뜻을 이해하였다.

 

蛇足: 戱語(히어)인가, 법어(法語)인가? 헤갈린다.

구멍은 공(空), 무(無)를 의미하니 곧 실체가 없는 것을 뜻한다.

없는 것(無)을 있는 것(有)으로 보는 것도 무명이요,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보는 것도

또한 무명임을 해학적으로 말한 것인가?

 

 

소림초당에서 조금 오르면 관세음보살입상이 있고 그 옆에 향운각이 있다.

향운각(香雲閣) 앞의 이 석조관세음보살입상은

1924년 만공 스님이 조성했다고 한다.

 

 

 

가사 위에 장삼을 겹쳐 입은 형상으로 정병(淨甁)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

삼도는 불명(不明)하고 보관에는 화불이 조성되어 있는데

안내서의 설명에 의하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어머니의 상호를 형상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상의 보관에는

아미타불을 묘각 한다.

 

향운각의 이 관음보살입상은

1기의 석등(石燈)과 2단으로 된 사각의 좌대 위에 조성되어 있는데

좌대의 뒤쪽 면은 뒤쪽 암벽과 붙어 있다.

환조(丸彫)로 조성된 이 석조 관세음보살입상의 크기는 7m로

자연암벽을 깎아 조성되어 있다.

 

 

관음보살상 옆에는 대숲이 있고 그 앞에는 수각이 조성되어 있다.

 

 

향운각

그 옆 조금 언덕진 곳에 만공 스님이 수행했던 향운각이 있다.

향운각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