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유일한 7대 비상(碑像)

2021. 4. 26. 23:27국내 명산과 사찰

 

삼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4세기경으로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해당한다.

즉 중국 불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남북조 각국에서 발달했던 불교가 혹은 외교적인 접촉에서

혹은 불교인 자신의 포교 활동에서 우리나라에 전래하였다.

공식적으로 고구려 불교 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의 불교 전례는 침류왕 1년(384년),

신라의 불교 전래는 527년(법흥왕 14년)으로 보는데,

백제는 삼국 가운데 불교미술이 가장 발달하였다.

특히 백제의 석조문화는 한국 마애불 및 사면불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서산과 태안의 마애삼존불과 예산의 사면석불(四面石佛)에서 보듯이

삼국통일 후 나타난 신라의 석조문화와

불상, 탱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삼국시대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7개의 비상(碑像)이 발견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백제의 옛 지역인 연기군이

2012년 폐지되고 출범한 특별자치시다.

이 7개의 비상(碑像)은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후

673년부터 689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세종시 전의면 비암사(碑巖寺)에서 3기,

연서면(옛 서면) 연화사(蓮花寺)에서 2기,

조치원 서광암(瑞光庵)에서 1기,

공주 정안면에서 1기가 출토되어 모두 7점이 발견되었다.

 

<7대 비상>

1)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비암사 출토/국립청주박물관 소장

2) 보물 제367호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名阿彌陀佛碑像)

비암사 출토/국립청주박물관 소장

3) 보물 제368호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비암사 출토/국립청주박물관 소장.

 

4) 보물 제649호 세종시 연화사 무인명불비상(世宗市 蓮花寺戊寅名佛碑像) 및 대좌.

세종시 연화사

5) 보물 제650호 세종시 연화사 칠존불비상(世宗市蓮花寺七尊佛碑像)/세종시 연화사

 

6) 국보 제108호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일명: 조치원 서광암 삼존천불비상/ 서광암 계유명삼존처불비상

 

7) 보물 제742호 삼존불비상(三尊佛碑像) 동국대학교박물관

공주 정안면 삼존비상

 

 

비암사

이 7개의 비상(碑像)들은 모두 흑회색 납질편암(蠟質片巖)으로 만들어졌으며,

조각 기법과 대좌 형식이 같아서 하나의 장인 집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씨아미타불비상에는 달솔(達率) 등 백제에서 고위 관료였던 사람들이

신라에 병합된 후 내말(乃末), 대사(大舍), 소사(小舍) 등

신라 관직을 부여받았던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서

불비상 조성의 주체가 백제계 유민임을 알 수 있고

그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비상(碑像)은 비석의 형식과 불상 조각이 결합한 비석형의 불상으로

불비(佛碑), 불감비(佛龕碑), 상비(像碑)라고도 한다.

초기 형식은 대석부(臺石部)에 간단한 조상기(造像記)를 새긴

2세기경 인도의 광배형(光背形) 삼존석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비상(碑像)>은 일반적으로 네모난 돌에 불상을 조각하고 비문을 새긴 다음

개석을 덮은 형식의 석조물로써 보통 앞면에는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과 나한상이 배치되거나 불상 및 반가사유상이 단독으로 표현된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6세기 초 북위 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앞면이나 뒷면을 중심으로 상이 새겨졌으나

점차 측면 또는 사면에 불상이 표현되어

마침내 사방불 형식으로 발전했다.

이 비상은 수·당대까지 계속 제작되지만 8세기 후반 이후

불교미술의 쇠퇴와 함께 조상의 예가 점차 줄어들었다.

 

중국의 비상은 한비(漢碑)의 형식이 불교에 채용되는 6세기 초

북위(北魏)의 석굴 사원에 그 시원적인 형식이 보인다.

즉, 외형은 비석과 같이 낮은 대석 위에

직사각형의 비신(碑身)이 수직으로 세워졌다.

그 정상에 둘 또는 네 마리 혹은 여섯 마리의 용이 뒤얽혀 조각되었다.

비신부에는 비문이 축소되거나 생략되고

대신 복잡하고 다양한 불상 조각이 나타나게 된다.

6세기 초에 조성되기 시작한 비상은

동·사위 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어 수많은 조상 예를 남기고 있다.

 

특히 사위 시대의 석불은 소형의 비상이 주류를 이루어

방주형(方柱形)의 석상 네 면에 모두 불상이 조각되는

사면불(四面佛)의 형식으로 발전했다.

6세기 말경에는 불교 관계의 비석에서도

비액(碑額 : 비석에 새기거나 쓴 글이나 글씨) 부분에

불상이 조각되는 등 비석(碑石)과 비상(碑像)의 개념 규정이 어려울 정도로

다양화되었다. 이러한 비상은 당비(唐碑)의 형식이 확립되는 수·당시대까지

크게 유행하지만 8세기 후반 이후 불교 조각의 쇠퇴에 따라

그 조상 예가 현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이 7개의 백제의 비상은

중국의 비상과는 달리 외형이 부정형이며

옥개석과 대석을 별석으로 만들어 결구한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와 함께 재질이 모두 납질편암(蠟質片巖)이고

양식적으로도 공통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7개의 비상(碑像) 중 4점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들 비상은 통일신라 초기 백제의 유민들에 의해 조성된

지방 유파적 작품으로 밝혀졌다. 또한, 명문 중의 상명(像名)이

모두 ‘아미타불(阿彌陀佛)’로 명기되어 있어

당시 활발했던 정토 신앙(淨土信仰)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미륵신앙에서 아미타 정토신앙으로 바뀌어 감을 알 수 있다.

 

비상은 일반적인 불상과는 달리 도상적(圖像的)인 다양성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명문이 새겨져 있어 편년 설정의 기준이 된다.

이를 통하여 제작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까지 이해할 수 있어

불교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