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 화음동 정사지와 곡운계곡
2020. 10. 27. 19:50ㆍ명승지
화음동(華陰洞) 정사지(精舍址)는 화악산 법장사 가는 길목인
화천 산내면 삼일계곡에 있는 조선의 선비
곡운(谷雲) 김수증(1624-1701)이 지었다는 옛 정자를 복원한 곳이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으로
그의 조부(祖父)는 병자호란 때 화의(和議)를 주장한 주화파에 맞서
끝까지 척화(斥和)를 내세워 절개를 굳건히 지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이다.
화음동정사지는 현재 강원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1)화천(華川) 화음동(華陰洞) 정사지(精舍址)
강원도 기념물 제63호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 살만한 곳을 가려져 정함)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 부사로 있던 중에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그는 또한 1682년 화가인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당시에는 삼일정, 부지암, 송풍정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일부 복원이 되어 있지만, 옛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화음동(華陰洞) 정사지(精舍址)이다.
이곳에 머물면서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 : 중국 북송의 유학자 소옹(邵雍)을
그 시호로써 일컫는 이름)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頤)와 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태극도」, 「하도낙서(河圖洛書)」, 「선후천팔괘도(先後天八卦圖)」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인문석(人文石)’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 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하였다.
이는 상수역학을 발전시켜 「음양소식관」이라는
자연관에 따라 축조한 우리나라에서 한곳 밖에 없는
별난 구조를 가진 정사로 평가되고 있다.
(상수역학이란 주역의 괘효를 기호와 수리로 설명하는
옛날 성리학자들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분야로,
지금의 기호 논리학에 해당한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있어 성리 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곡운집』과 1692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에
그와 후손들이 창작한 「谷雲九曲歌」를 곁들여 만든
『곡운구곡도첩』이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德沼里)에 있으며,
묘비는 1710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김창흡(金昌翕)이 썼다.
곡운구곡(谷雲九曲)
곡운구곡은 계곡을 따라 도로가 나 있어 접근이 어렵다.
계곡으로 내려갈 길은 철조망으로 폐쇄되어 있고 개방된 곳은 몇이 되지 않는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은 북한강의 지류 하천인
지촌천의 일부 구간에 해당한다.
이곳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강바닥을 따라
다채로운 하천지형이 발달하고 있으며,
선캠브리아기 변성암의 습곡 및 단층 구조를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지질명소에 해당한다.
곡운구곡은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인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호 ‘곡운’을 딴 것으로,
그가 1670년부터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거주하면서
지촌천의 물굽이 9개를 방화계(榜花溪), 청옥협(靑玉峽),
신녀협(神女峽), 백운담(白雲), 명옥뢰(鳴玉瀨), 와룡담(臥龍潭),
명월계(明月溪), 융의연(隆義淵), 첩석대(疊石坮)이라 지어
곡운구곡이라 칭한 데서 유래하고 있다.
이는 속세를 떠나 심산유곡에 은익 하면서 학문을 정진하고자 하는
성리학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곡운구곡 일대는 하천의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고
일부 남아있던 지형이 도로 개설 과정에서 소실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화강암을 기반으로 한 수려한 암석 경관,
청정함 등으로 인해 구곡문화의 측면과 아울러
지형 경관지원 측면에서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자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전체 9곡 중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은 화강암 지대에 있는
제3곡인 신녀협과 제4곡인 백운담이다.
한편, 제1곡과 제3곡 사이의 변성암(호상편마암)지대에서는
변성작용 중에 일어난 습곡과 단층 구조를 관찰할 수 있다.
<출처 : 강원평화 지역 국가 지질공원>
곡운구곡가 제1곡 방화계(榜花溪)/곡운
一曲難容入洞船(일곡난용입동선) 일곡이라, 좁은 동천 배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桃花開落隔雲川(도화개락격운천) 복사꽃 피고 지는 운천이 막혀 있네
林深路絶來人少(림심로절래인소) 숲 깊고 길 끊겨 찾아오는 이 드문데
何處仙家有吠煙(하처선가유폐연) 어느 곳 선가에 개 짖고 연기 이나
곡운구곡 제2곡 청옥협(靑玉峽)/* 아들 김창국(金昌國) 지음
二曲峻嶒玉作峯(이곡준증옥작봉) 이곡이라, 우뚝한 산 옥봉을 이뤘는데
白雲黃葉映秋容(백운황엽영추용) 흰 구름 누른 잎 가을 경치 이루었네
行行石棧仙居近(행행석잔선거근) 돌다리 가노라니 신선집이 가까워라
已覺塵喧隔萬重(이교진훤격만중) 알랴 소란한 진세 천만중 막혔음을
곡운구곡가 제3곡 신녀협(神女峽)/ * 조카 김창집(金昌集) 지음
三曲仙蹤杳夜船(삼곡선종묘야선) 삼곡이라, 신선 자취는 밤배가 아득한데
空臺松月自千年(공대송월자천년) 빈 누대에 송월만이 스스로 천년일레
超然會得淸寒趣(초연회득청한취) 청한한 정취 초연히 깨쳤나니
素石飛湍絶可憐(소석비단절가련) 흰 돌이 나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
곡운구곡(谷雲九曲)의 구곡(九曲)의 기원은
중국 남송 때 주희(朱熹)의 무이구곡가에서 비롯된다.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1179년 백록동서원을 일으켜
서원교육의 바람을 일으켰던 주희(朱熹 1130~1200)는
1183년 53세에 복건성 무이산에 들어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는데
그곳에 은거하면서 무이정사 주변의 누정(樓亭)과
지형을 시로 쓴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1184년에 무이산 무이계(武夷溪)의 구곡 경치를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다.
이 무이도가가 바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다.
이것이 곧 구곡문화(九曲文化)의 바람을 일으킨 원조로써
우리나라의 조선조 학자인 율곡 이이도 해주석담에 은거하면서
무이정사가 있는 은병봉을 본떠서 은병정사(隱屛精舍)를,
무이구곡가를 본떠서 고산구곡가(孤山九曲歌) 지었고,
우암 송시열 선생이 또한 화양구곡을 지은 것도
모두가 주희의 무이구곡가로부터 비롯된 것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본방 무이구곡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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