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박달재

2020. 6. 9. 21:31명승지

충주 박달재

지금은 옛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한때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옛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 의 소재가 되었던 이곳 박달재.

박달재는 해발 504m로, 차령산맥의 지맥인 구학산(九鶴山, 971m)과

시랑산(侍郎山, 691m)의 안부(鞍部)에 해당하는 고갯마루다.

박달재를 박달산·박달령·박달현(朴達峴)·박달치(朴達峙)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요즈음에는 천등산 박달재로 알려져 있다.

소재지로 본다면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과 백운면에 걸쳐 있지만,

중앙내륙선 및 고속도로 개통으로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박달재는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불렸으며,

또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불리고 있다.

박달이와 금붕이의 동상

 

높은 고갯마루에는 으레 전설이나 민담이 전해 내려오듯

박달재에도 박달 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 도령이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금봉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박달은 과거급제하면 돌아와서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고 상경하고,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하여 낭군이 될 박달 도령 허리춤에 매달아주고

먼 길에 요기하도록 배려했다. 낙방한 박달이 슬픔에 잠긴 채 돌아오다가

평동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가 박달을 기다리다 지쳐

3일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박달은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니 꿈에 그리던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있는 힘을 다해 박달은 고개 쪽으로 달려가 금봉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박달은 간신히 고개 위에서

금봉이를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박달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는 이 고개를 박달재라고 한다.

동상 아래에는 박달이와 금봉이의 만남과 이별을 주제로 조각되어 있다.

 

 

 

@이 노래비는 1948년에 박달 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을 노랫말로 담고 있는

‘울고 넘는 박달재(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박달재에는 제천에서 서울로 가는 관행길이 나 있으며,

1217년(고종 4) 7월 김취려(金就礪)가 거란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한다.

박달재는 38번 국도가 제천시와 충주시를 연결하고 있으며,

1970년 도로확장 및 포장이 이루어졌다.

제천에서 충주를 잇는 박달재는, 터널로 인해 박달재 도로의 이용가치를 상실하였으나,

박달재 옛길이라는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유지·관리하고 있다.

 

@김취려 장군 대첩비

박달재휴게소 한편에 고려의 명장 김취려(金就礪 1172~1234)장군 대첩비가

조성되어 있다.

입구는 그렇듯 한데 유물이 정리가 되지 않아 전시관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어수선했다.

박달재는 1216년(고종 3)에 거란 왕자가 대요수국 왕이라 자칭함에 따라

몽고군에게 쫓기게 된 거란대군 10만 명이 내침하였을 때

1217년(고종 4) 7월 고려의 김취려(金就礪: 1172~1234)) 장군이

박달재의 협곡과 고갯마루의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적군을 협공으로 퇴각시켰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258년(고종 45)에 몽고군이 침략했을 때도

충주, 제천, 청풍의 별초군이 몽고군을 격파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현대에 이르러 국도 38호선 고갯마루에 간이 정류소를 설치하여

주점과 매점이 들어서면서 격전지의 유적은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다.

오늘날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의 지경의 국도 38호선에 박달재 터널[1.5㎞]을 뚫었고,

고갯마루에 각종 편의 시설이 들어서고 도로가 공원화됨에 따라

박달산 방면과 주론산 방면의 산기슭은 원형을 찾기가 힘들다.

기존의 고갯마루에서 평토 작업을 하면서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보이는 산기슭은 오래전에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김취려 장군의 격전지로 알려진 박달재는

『여지도서(輿地圖書)』 제천현 산천조에

“박달산은 현에서 서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주유산의 남쪽 줄기이다. 곧 고려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적[丹賊]을 물리친 처소(處所)이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김취려 장군의 전적지인 박달재는

지금의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와 봉양읍 원박리 고갯마루[453m]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