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자의 자원(字源)을 통해 본 불법(佛法)의 의미

2020. 5. 2. 22:24붓다의 향기

()자의 자원(字源)을 통해 본 불법(佛法)의 의미


()이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또한 그 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적용된 그 법이 적법(適法)이냐,

불법(不法)이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제3의 기관이 병용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법치주의 국가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두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법원이 범법자(犯法者)를 판단하는 기준은

정해진 법률규정에 따라 그 법을 적용함이 적합하냐 아니냐 만을 판별할 뿐

적용하는 그 법이 평등에 근거한 선법(善法)이냐 불법(不法)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영국속담에 법이 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있다라는 말과 같이

죄인이 법을 범해도 그 범죄를 벌할 수 있는 법률규정이 없으면 죄가 되지 않고,

 또한 그 범행의 진위(眞僞)를 오로지 증거에만 근거하고 있으므로

 범법(犯法)이 적법(適法)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것은 오늘날 실행되는 법의 맹점(盲點)이기도 하다.

 

그런데 법() 자를 살펴보자.

() 자는 물 수 변인 수()와 갈 거() 자로 조합을 이룬다. (+)

물은 평등을 의미를 의미하고, 순연하는 흐름을 의미하는 자유를 상징한다.

() 자는 <간다>는 의미 외에 <방축(放逐)><()>를 동시에 의미한다.

방축은 축출한다는 의미이고, ()<멸한다>, <없애버린다>는 의미다.

이는 곧 힘을 상징한다.

이렇게 법()의 조합을 보면 평등과 자유, 힘을 상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핵심적인 의미의 글자가 빠져 있다.

법의 원래 글자는 '' . 원래의 법()자에서

물을 뜻하는 수()변과 갈 거()만을 두고 해태 치()자를 생략해 버렸다.

해태는 시비(是非) 선악(善惡)을 판별하는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자원(字源)으로 보면 평등과 자유, 힘을 상징하는 것만 두고

()자를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법은

지혜가 빠진 평등과 자유, 힘에만 의존하고 있는 꼴이 된 것이다.

 

해태()라는 동물은 고대(古代)에는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일명 해치(獬豸)라고도 한다. 해태에 대한 <백과사전>의 설명을 잠시 살펴보자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로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 가운데에 뿔이 있다고 한다. 한자어로는 해치(獬豸)라고 한다.

중국 문헌인 이물지(異物志)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한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사람이 다투는 것을 들었을 때는 옳지 않은 사람을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믿어져서,

법을 심판하는 사람은 해치관이라 하여 해태가 새겨진 관모를 쓰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사헌의 흉배에 가식(加飾) 되기도 하였다.

 

흉배에 새겨진 해태의 모습을 보면, 녹각과 같은 뿔이 달린 머리에 갈기가 돋았고,

크게 벌린 입, 포효하는 듯한 경쾌한 몸집, 그리고 꼬리 끝에 긴 털이 돋아 있다.

  

,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간주하여 궁궐 등의 건축물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광화문 앞에 놓여 있고, 경복궁 근정전의 처마마루에도 놓여 있는데,

이것은 전각 안에서 정사를 돌보는 임금의 공평무사(公平無私)를 비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해태는 불교의 업경대(業鏡臺)와 같은 의미를 지닌 신수(神獸)이다.


(대흥사의 업경대)

원래 법()자의 조합을 보면 수() + ()+ ()가 된다.

평등과 자유, 정의를 실현하는 힘, 그리고 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상징하는 글자였지만,

 시대가 흘러감에 사람들은 자기의 편의 위주로 의식이 변화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법을 이용함에 따라 지혜를 상징하는 이 치() 자가 생략되어

오늘날 법은 평등을 앞세워 힘이 지배하는 사회,

유전(有錢) 무죄(無罪), 무전(無錢) 유죄(有罪)

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사회가 혼탁하게 된 것이다.

법이 있으므로 법망을 교묘히 이용하여 빠져나갈 수 있고,

또 법이 있어도, 힘 있는 자는 증거를 조작하는 등 법을 악용하고,

()와 권력의 힘을 지닌 자는 악법을 선법으로 포장하여

우리 사회를 혼돈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평등해야 할 법은 힘을 이용하여 차별이 평등으로 다르게 포장되고,

 법의 심판자인 법원은 선법과 악법을 구별하기보다는

 상위법과의 상충이나 법률규정에만 매달리고,

선과 악의 근본적인 진위(眞僞)에 대한 고찰은 덮어버리고

오로지 증거 사실주의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은 선과 악의 구별조차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근본적인 지혜를 망각하고

법의 평등과 자유, 힘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 법()의 자원이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평등을 말하지만,

이는 너와 나와의 평등이 아니라 일체 만유(萬有)가 차별 없는 평등이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절대자의 힘이 아니라 인연의 법칙임을 밝히신 그것도

그 모든 것에 앞서 지혜가 우선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을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체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최고의 지혜가 반야(般若)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佛子)는 이를 성취하라고 일깨워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