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화왕산 관룡사 제2부 관룡사의 전각들과 보물

2020. 1. 26. 19:23국내 명산과 사찰

창녕 화왕산 관룡사 제2부 관룡사의 전각들과 보물

관룡사는 화왕산 군립공원 구룡산 병풍바위 아래 있는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신라 8대사찰의 하나로, 394(내물왕 39)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583(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大道場)을 이루었다.

748(경덕왕 7) 추담(秋潭)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1401(태종 1)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당우(堂宇)가 소실되어,

1617(광해군 9)에 영운(靈雲)이 재건하고, 1749(영조 25)에 보수하였다.



일주문을 오르는 길은 연등으로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관룡사 천왕문의 사천왕은 제1부 참조


범종각 옆의 돌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룡사의 천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관룡사대웅전 : 보물 제212.

겹처마에 전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의 건물로

정면 중앙 칸이 넓어서 좌우로 안정된 구조를 보여 준다.

 내부의 중앙 뒷줄에 세운 2개의 고주에 의지해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했다.

내외 이출 목으로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쇠서[牛舌]의 곡선은 짧고 견실하며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은 공포의 제일 앞부분만 보아지의 형태로 변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공포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다.

1965년 해체복원공사 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401(태종 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광해군 9) 재건했으며, 1749(영조 25)에 다시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살미(山彌) 쇠서(牛舌) : 한옥 지붕의 공포를 이루는 부재

@보아지:기둥과 보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을 보강해 주는 건축 부재(部材). 양봉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昌寧 觀龍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臺座)

보물 제1730. 관룡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로 석가여래상의 대좌 윗면에 적혀진 기록을 통해

1629(인조 7) 조각승 현진(玄眞)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가여래 상높이 150cm, 대좌 74×117×92cm,

약사여래 상높이 122cm, 대좌 64×98×81cm,

아미타여래 상높이 124cm, 64×98×88.5cm

 

창녕 관룡사 목조 석가여래 삼불 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이루어진 삼세불이다.

 삼불 중 석가여래상 대좌 윗면 묵서에는

조각 승려, 불상 조성에 소임을 맡은 승려와 제작 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1629년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1630년에 완성하였으며

수화승 현진을 비롯하여 승일(勝一), 천민(天敏), 수영(守英),

탄행(坦行), 철의(哲義) 등이 제작에 동참하였다.

현진은 창녕 관룡사 불상 이외에도 1612년 진주 월명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86),

1614년 구례 천은사 목조 관음대세지보살좌상,

 1626년 보은 법주사 대웅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360),

1633년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6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불상 대좌 3좌는 불상 조성 기록만이 아니라 17세기 대좌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석가모니불)

목조석가여래삼존상은 안정적인 신체비례, 넓적하고 볼살이 오른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표정, 단순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옷 주름 표현 등이 특징이다.

중앙에 있는 석가여래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변형 편단우견식 대의를 입었으며,


(아미타불)


(약사여래)

 좌우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은 한 손은 가슴 위에 올리고

다른 손은 무릎 위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에 통견식 대의를 입었다.

이는 현진의 제자인 승일이 제작한 영광 불갑사 석가여래삼불상,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등에도 보이는 특징으로

 양식적 계승과 유파 형성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17세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한 조각승 현진에 의해 제작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으로 힘 있는 조각술과 천진한 인상이 주목되는 작품이다.

1610년대 현진의 작품들이 상반신이 길고 갸름한 얼굴을 했다면

1620년대 제작된 불상은 얼굴과 상반신의 길이가 짧아지는 변화를 보인다.

관룡사 불상 제작에서부터 조각승 승일과 작품 활동을 같이하는 점도 중요하며

이는 조선 후기 유파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불상은 1610년대에서 1620년대로 넘어오면서 변화되는 현진의 불상 양식과

그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 주는 불상으로, 불상 대좌에 조성발원문을 남긴 사례인 점도 중요하다.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현진의 작품세계와 활동, 조각승의 유파 관계,

원문 기입 방식에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관룡사 삼장보살도

좌측에 지장보살, 중앙에 천장보살, 우측에 지지보살이다.


@아미타탱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그 아래 보관에 아미타상을 한 관음보살,

보병을 그린 대제지보살이 보이고, 상단과 하단의 좌우에 사천왕을 한 구도이다.


신중탱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벽화 (昌寧觀龍寺大雄殿 觀音菩薩壁畵보물 제1816.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서 설법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

선재동재(善財童子)가 방문하여 법을 청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화엄경68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의하면 남순동자(南巡童子, 또는 선재동자)

53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도를 구하던 중 28번째로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금강보석(金剛寶石) 위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에게

보살행(菩薩行)과 보살도(菩薩道)에 관해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 벽화에는 바로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받고

설법하는 관자재보살을 벽면 전체에 꽉 채우듯 크게 부각해 표현하였다.  

이 관음벽화는 1712년에 대웅전을 다시 고쳐 세웠을 때,

또는 1713년에 천왕문의 채화 및 사천왕상 및 약사전의 단청이 이루어졌을 때,

또는 영산전이 신축되고 더불어 팔상도가 조성된 1729년경 사이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관음보살은 녹색의 두광을 배경으로 왼쪽 손은 허리 옆으로 내려 바닥을 짚고,

오른쪽 손은 무릎 위에 얹은 채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반가좌 하였다.

머리에는 중앙에 아미타화불(阿彌陀化佛)을 새긴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이마 위에 머리카락 위로는 연화문과 각종 꽃으로 장식한 보주로 띠를 둘렀으며,

 귀 뒤쪽으로 내려온 종 모양의 장신구와 화염보주에는 갖가지 구슬을 장식하였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는 가늘고 긴 눈썹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

큼직하고 쭉 뻗은 코, 작고 붉은 입술 등이 가늘게 묘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이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여성적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과 달리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양팔 위로는 굵은 타래 모양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착의법은 홍색·녹색이 어우러진 군의(裙衣)를 착용하고 그 위에 녹색의 옷을 걸쳤는데,

가슴 아래로는 수평으로 가로지른 승각기(僧脚祇)와 보주를 장식한 띠 매듭이 보인다.

옷에는 문양이 거의 표현되지 않아 단조롭게 보이지만

몸 전체에 걸쳐 각종 영락(瓔珞)으로 장식을 해서 매우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으로 보인다.

팔목·손목, 허리, 무릎 등에도 갖가지 영락이 장식되어 있다.

 

관음보살의 뒤로는 바탕을 연녹색으로 칠한 뒤 옅은 선으로 기암괴석(奇巖怪石)을 그렸으며,

화면의 우측 상단에는 농묵(濃墨)으로 굵은 줄기에 가는 잎이 달린 대나무를 그렸다.

보살의 좌측 중앙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 있는데,

긴 주둥이와 손잡이를 갖추었으며 몸체에는 검은색과 적색을 교대로 사용하여

가로로 띠 모양의 문양을 그려 넣었으며 윗부분에는 녹색으로 마무리하였다.

관음보살의 향 좌측 하단에는 쌍 상투에 합장한 선재동자가 매우 작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동자는 맨발의 두 발목과 팔목에는 각각 붉은 띠를 두르고

긴 천의 자락을 어깨에 걸친 채 무릎을 굽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두 손 모아 합장하였다.

 머리에는 흰색 구슬로서 장식하였고 다소 긴 얼굴에는 어린 동자의 긴장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선재동자의 표현은

조선 후기 관음보살의 양식과도 상통하는 것으로서 정면을 향한 자세,

근엄한 얼굴, 화려한 보관과 영락 장식, 정병의 유형 등 도상의 유형과 기물,

 진록과 양녹의 조화와 주황과 장단의 채색에서 18세기 불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영락으로 장식된 쌍개머리를 하고 나신(裸身)의 상의에 천의를 걸치고

백색 바지 위에 적색 치마를 걸치고 합장한 선재동자의 모습이라든가

관음의 주처 보타락가를 표현하면서도 물가 표현을 하지 않은 것 등은

다른 후불벽 관음보살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보채(補彩)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좌우로 넓게 퍼진 보관과 영락 장식, 옅은 수묵기법으로 그려진 기암괴석과 대나무 표현,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의 모습 등에서 18세기경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얼굴에 보이는 강한 음영은 보채가 이루어지면서 보다 강렬하게 표현되었지만,

이러한 기법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불화에 나타나는 음영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안양문


명부전


지장보살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그 좌우에 시왕들을 모셨다.




칠성각


@관룡사 비사리구시

비사리구시는 일번적으로 절에서 행사나 큰 제를 지낼 때

대중들이 먹을 밥을 담아 두는 용기로 쓰이거나,

종이를 만들기 위한 지통(紙筒)으로 사용되는 용구인데

관룡사의 비사리구시는 어느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응진전



@창녕 관룡사 원음각

창녕 관룡사 원음각(昌寧 觀龍寺 圓音閣)은 

 19851114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40호 관룡사 원음각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12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관룡사는 신라 시대에 지었으며 원음각은 조선 인조 12(1634)에 세웠다.

그 이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을 보면

영조 39(1763)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음각은 대웅전을 중심축으로 약간 서쪽으로 기울여 세운 것이 특색이다


약사전과 삼층석탑



관룡사 약사전삼층석탑 (觀龍寺藥師殿三層石塔)

높이 2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 지대석(地臺石)이 모두 지상에 드러나 있는데,

현상으로 보아 자연 암반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상면과 측면은 평평하고 반듯하게 다듬었지만,

하면은 울퉁불퉁한 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밑에는 크고 작은 석재를 받쳐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하층 기단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석재에는 갑석(甲石)까지 표현하고 있다.

면석에는 각면 2구씩의 안상(眼象)이 모각되었고,

갑석의 상면에는 낮고 넓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두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와 한 개의 탱주(撑柱 : 받침 기둥)를 새겼는데,

상면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층기단 갑석을 놓았다.

갑석의 하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부연(副椽 :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고,

상면에는 높고 낮은 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초층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는 기단부보다 파손이 심한데,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에는 두 우주만이 모각되었는데, 1층 탑신은 2층과 3층 탑신보다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었다.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전각부(轉角部)에서 심하게 파손되어 본래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옥게 받침은 각층 3단으로 같은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처마가 두껍게 조성되어 있다.

이런 현상으로 보아 전각의 반전(反轉)은 둔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2층 기단을 구성하고 있고, 지대석으로 자연 암반을 활용하였으며,

하층 기단 각 면에 2구씩의 안상을 모각한 점은 대체로 통일신라 말기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석탑의 규모가 축소되고, 각 부의 양식이 간략해지고 섬약해진 점으로 보아

약사전의 석불과 같은 시기인 고려 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전 보물 제146호

관룡사 약사전은 보물 제146. 앞면 1, 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주심포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이 건물의 특색은 집채와 지붕의 구성비례에 있는데,

기둥 사이의 간격에 비교해 지붕의 폭이 약 2배나 된다.

이러한 예는 거의 없으며 곧고 단정한 외목도리들이 뻗어 나오면서 큰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당초무늬가 새겨진 창방의 뺄목이 소로를 받아 외목도리의 행공첨차를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의 구성은 15세기 건축기법에서 보이는 것이므로 15세기경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천장은 연등이고 바닥은 맨바닥으로 민무늬의 네모난 전을 깔았다.

단칸 법당 안에는 석조불좌상이 있으며 좌우 벽체에 벽화를 그려 장식했다.

약사전 앞마당에는 큼직한 대좌 위에 3층 석탑이 있다.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19

보물 제519호로 지정된 약사전에 봉안된 이 석조여래좌상은

삼단의 8각 연화대좌 위에 앉은 좌상으로 광배는 전하지 않는다.

불상의 높이는 110cm,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편안히 내려놓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놓여 있는데 무엇인가를 받쳐 든 듯한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얼굴과 몸에 부드러운 양감표현이 두드러지며 옷 주름의 표현도 유연하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이목구비가 얼굴 가운데에 몰려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려 전기의 불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목에는 굵은 2줄의 선이 있으며, 목이 밭아 전체적으로 약간 위축된 느낌을 준다.

법의는 통견으로 앞가슴이 벌어져서 속에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가 보인다.



 

8각 연화대좌가 불상보다 폭이 좁아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단순한 형태의 연꽃이 저부조로 묘사되어 생략된 의장을 보여 준다.






전체적인 조각 양식상 고려 초 불상들과의 연관도 보이지만

실제 수인의 표현이 불분명하다든가

 또는 생략된 대좌의 형태 등으로 보아 고려 중엽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