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7. 23:31ㆍ국내 명산과 사찰
창녕 영축산 청련사
창녕 영축산 청련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 말사로
지금은 폐사지만 남은 영산 대흥사의 법등을 잇는 사찰로 알려져 있다.
청련사는 영취산에 있던 대흥사의 작은 암자인 청련암(靑蓮庵)으로 창건되었으며,
대흥사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東庵)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러한 초기기록은 1880년대에 절을 중창하면서 기록된 여러 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1842년(헌종 8)에 기록된
「영산현 영취산대흥사 청련암 법당이건중창기(靈山縣靈鷲山大興寺法堂移建重創記)」 현판에 의하면,
대흥사는 신라 때 원효스님이 세운 절로 이후 폐사되었다가
1628년(인조 6)에 중창하여 양수암(兩水庵)이라 하였다.
1676년(숙종 2) 대흥사의 옛터로 옮겨 대흥사라 불렀는데
100여 년이 지나 다시 폐허가 되고 그중 청련암만 어렵게나마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에 덕암(德庵) 스님이 고을 사또와 신도들의 도움으로
1840년(헌종 6) 법당을 중창하기 시작하여 2년 후 초여름에 새로운 면모로 출발하게 되었다.
법당이 중창되는 이 시점을 전후하여 청련암에는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현존하는 현판기록에 의하면 1830년(순조 30)에 산령각을 건립하고
1834년(순조 34)에 법당을 보수하였으며,
1836년(헌종 2)에는 쾌엽(快曄) 스님이 법당의 상단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련암은 근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법등을 계속 이어왔고,
근래에 들어서는 1983년에 옛 법당을 허물고 극락전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1993년 산령각ㆍ종각ㆍ요사ㆍ천왕문을 짓고
비로자나불상 등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청련사의 보물로는 극락전에 봉안된 경남 유형문화재 제463호인 목조아미타삼존여래좌상 과
삼존불 뒤에 있는 영산회후불탱이다. 영산회후불탱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464호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 반자(飯子)가 있으며, 반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4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련사 일주문에 밝힌 영취산(靈鷲山)은 양산 통도사나
여수 등 여려 지역에서 불리는 영취산과는 다른 지명이다.
창녕에는 화왕산을 기점으로 두 개의 영취산이 있다.
하나는 신령 령(靈) 자를 쓰는 영취산(靈鷲山·681.5m)이고
옥천을 들머리로 하는 고개 영(嶺)자를 쓰는 영취산(嶺鷲山·739.7m)이다.
영축산의 본래 이름은 수리뫼라 하였는데
불교의 전파와 함께 영축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영축산의 지명과 유래에 대해서는 본방 천축사 법성사 참조)
@승탑(부도): 일주문을 지나 마애비로자불좌상이 있는 곳에는 7~8기의 부도가 있다.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 수 없었나 천년 고찰임은 분명하다.
승탑(부도)의 형태는 지금까지 대개 팔각원당형, 방형, 오륜형, 구형, 석종형 등으로 분류되는데
청련사의 승탑 중 위의 2기는 상륜부는 돔형이고 하대는 석종형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청련사 입구에 조성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석공 명장 윤만걸선생의 작품이다.
선생의 작품은 청련사 바로 아래 법성사 대적광전 뒤편에도 5기의 마애불상이 있다.
마애비로자나불좌상에서 조금 오르면 청련사 경내가 들어난다.
일주문을 겸한 종루가 보인다. 아래 일층 벽에는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이층 누각인 이 전각은 종각으로 일층 벽에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다문천왕의 지물이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또한 조성시기는 신라때가 아닌데 양식은 다문천왕만 제외하고 모두 통일신라 때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다문천왕의 지물은 통일신라 때의 작품은 탑을, 조선중기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데
청련사 다문천왕은 창을 지물로 들고 있다.
광목천왕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용과 여의주를, 조선중 작품에는 탑과 창을 지물로 들고 있는데
창련사의 광목천왕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국천왕의 지물은 통일신라시대는 비파를, 조선중기때는 검을 들고 있는데
청련사의 지국천왕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증장천왕은 통일신라시대에는 검을, 조선중기 때는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데
청련사의 증장천왕은 통일신라 때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극락전
청련사의 주법당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팔작지붕의 전각이다.
법당에는 경남 유형문화제 제463호인 목조아미타삼존불여래좌상과,
경남 유형문화제 제464호인 영산회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여래좌상
창녕 청련사 목조아미타삼존여래좌상(昌寧 靑蓮寺 木造阿彌陀三尊如來坐像)은
조선 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2008년 1월 10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463호로 지정되었다.
본존상의 높이는 121.2㎝, 우협시상의 높이 105.3㎝, 좌협시상의 높이 107㎝이다.
이 불상의 정확한 조성 기록은 없으나 청련사가 1628년에 창건된 기록과
도광22년(1842)에 대흥사에서 옮겨 왔다는 기록,
이 불상의 옷 주름, 자세 등 각각의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17세기 말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매우 뛰어난 수작이다
창녕 청련사 목조아미타삼존여래좌상은 석가모니후불도를 배경으로
3구의 불상이 수미단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양손은 무릎 위에 살짝 들어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맞댄 모습이다.
세 존상은 얼굴, 옷 주름 등이 비슷하지만 크기나 세부적인 표현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신체보다 머리가 큰 조선 후기 불상의 일반적 형태를 따르고 있다.
곡선을 그리는 넓은 어깨에 이에 알맞은 넓은 하반신의 신체 비례가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머리는 육계와 구분이 없고 그 경계에 중간계주, 정수리에 원통형 정상계주를 각각 두었다.
얼굴은 장방형으로 길며, 이마로부터 윗눈썹까지 밋밋하게 조각되었다.
가늘게 뜬 실눈, 눈꺼풀에서 이어지는 둥글면서 긴 코,
입술의 양 끝이 살짝 올라간 미소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개성 있는 인상이다.
옷은 양어깨를 덮은 변형 통견식으로,
오른쪽 어깨의 대의가 곡선을 그리면서 팔꿈치까지 걸쳐 있으며,
배 앞으로는 두 개의 옷자락이 교차하여 있다.
가슴 아래에 승각기는 5개의 연잎형 모양을 내었으며,
양다리 사이는 2개씩 옷 주름을 양측으로 펼쳐 놓았다.
특히 옷 주름이 균등하며, 끝단이 둥근 것이 특징이다.
좌우의 협시상은 본존상보다 높이가 13~14㎝ 정도 작게 조성되었으며,
머리, 얼굴, 옷을 표현하는 기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두 상 모두 얼굴은 본존에 비교해 딱딱하고 경직되어 보인다.
가슴 아래 목걸이 장식이 보이며,
승각기는 가운데를 대각선으로 접었는데 서로 반대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상은 본존과 같은 하반신의 옷 주름 처리를 보이지만
왼쪽의 관음보살상은 길고 뾰족한 소맷자락이 왼쪽 다리 선을 따라 무릎 쪽으로 흘러내린다.
창녕 청련사 목조아미타삼존여래좌상은
조선 후기 불교 조각 연구에 중요한 조각승과
양식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산회후불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64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53㎝, 가로 232㎝.
창녕 청련사 영산회후불탱은 극락전의 후불탱화로 봉안된 석가모니불화로, 1863년에 조성되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그린 이 불화는 영산회후불탱(靈山會後佛幀)
또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영산회도(靈山會圖), 석가모니후불도(釋迦牟尼後佛圖)로 부른다.
청련사 영산회후불탱의 화면 중앙에는 석가모니불과
협시로 문수·보현보살을 큼지막하게 묘사하고,
화면 상단에는 제석천과 범천 및 10대 제자를, 화면 하단에는 사천왕을 앞면에 일렬로 배치하였다.
설법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을 그린 청련사 영산회후불탱에서
본존인 석가모니불은 백색의 꽃무늬가 듬성듬성 시문 된 키형 광배를 배경으로
청연화좌(靑蓮花座)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채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좌우 협시의 문수·보현보살은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는데
본존상의 신광보다 당초문이 더욱 조밀하게 시문 되어 대조를 이룬다.
얼굴은 삼존상 모두 신체에 비교해 작은 이목구비를 갖추었으며
착의는 석가모니불의 경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에 적색 대의를,
좌우 협시보살은 각각 적색 대의와 녹색 천의로 대조를 이룬다.
석가삼존 후면 상단에는 제석·범천과 십대제자가 대칭으로 배치되고,
하단은 사천왕상이 나란히 표현되었는데 모두 생동감이 있다.
인물의 배치와 화면 구성이 웅장하면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아래쪽 화면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천왕을 나란히 두면서,
안쪽 사천왕상 2위를 약간 올려서 중심을 잡은 뒤 석가삼존상을 당당하게 배치하였다.
상부 본존불 양쪽 공간에 십대제자를 두고 문수·보현보살 위에
각각 배치된 범천·제석천은 본존불을 향하여 합장하면서 얼굴은 바깥을 향해 있다.
비파를 든 다문천왕
광목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채색은 밝은 적색과 청색을 주조로 하여 군청색과 황색,
백색 물감을 사용한 점이 돋보이며 문수보살의 지물인
여의와 사천왕의 지물인 탑, 검 등에는 일부 금박(金箔)이 사용되었다.
이 불화는 조선 후기 후불탱화의 구도에서 흔히 보여주는 군도(群圖)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석가모니 삼존상과 나한 및 신중이 모두 생동감 있게 표현된 작품이다.
화면 구성은 중앙에 크게 석가모니삼존을 꽉 차게 배치하고
장방형의 불단 아래에 사천왕상을 나란히 배치하여 웅장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그리고 밝은 적색과 청색의 차분한 설채법과 광배에 세밀하게 시문 된
화려한 꽃무늬는 수화승의 개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위키백과에서는 설명되고 있지만,
퇴색된 것인지 원본이 아닌 모사본인지 어두운 황색과 감색이다.
전반적으로 18세기 후반경의 불화 양식을 계승한 설채법과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중탱
범종
지장탱.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시립해 있다. 탱화 위에는 영가단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반자(사진출처:문화재청)
@반자(飯子)
사찰 안내판에는 반자가 나와 있는데 법당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 다른 곳으로 이관된 모양이다.
반자(飯子)는 금고(金鼓)의 이명으로 금구(禁口)라고도 한다.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 데 두드리는 도구로서 쇠북이라는 뜻이다.
주로 청동으로 만들며 얇은 북 모양인데 한쪽은 막히고,
다른 쪽은 터져서 속이 비어 있으며 측면에 2~3개의 고리가 있는 형태이다.
막혀 있는 면은 보통 융기된 선으로 2~3등분 하여 외연에는
꽃무늬·당초무늬[唐草紋]·구름무늬[雲紋]·여의두무늬[如意頭紋] 등을 양각하고
중앙의 자방(子房)에는 꽃씨를 양각했다. 측면에 1줄의 종선(縱線)을 둘러
그 위에 고리를 달고 좌우의 공간에는 명문을 음각하거나 양각했다.
명문을 통해 제작연대, 소속사찰, 발원문의 내용 등을 알 수 있어서
귀중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창녕 청련사 반자(昌寧 靑蓮寺 飯子)는 조선 시대 조성된 반자(飯子)로
2008년 1월 1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32호로 지정되었다.
창녕 청련사 반자는 동체 측면에 점각(點刻)되어 있는 명문(銘文)에 의해
조선 정조 4년(1780)에 제작된 것임을 밝혀졌고,
조선 후기 반자 양식을 나름대로 잘 간직한 채 제법 규모가 큰 반자이다.
산령각
명부전
예전 자료들을 검색해 보면 극락전 앞 마당에 석탑(다보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현재 청련사 아래 쪽에 있는 법성사의 석탑(다보탑)이 청련사의 탑이 아닌가 사료된다.
청련사의 범종
@용뉴(龍鈕), 용통(甬筒), 유곽대(遊廓帶), 당좌(撞座),
비천상(飛天像) 등이 너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이 범종도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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