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9. 12:35ㆍ국내 명산과 사찰
논산 쌍계사
쌍계사라 하면 으레 떠오는 것이 벚꽃으로 유명한 지리산 하동 쌍계사인데
몇 해 전 관촉사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정표에 표시를 보고 알게 된 사찰이 논산 쌍계사다.
동명이사(同名異寺)인 이 사찰이 어떤 사찰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겨
찾아 가볼 요량으로 버스를 기다렸으나 한 시간이 넘도록 버스가 오지 않아 포기했던 절이다.
몇 해가 지내서야 대조사를 들리면서 옛 생각이 나서 귀경길에 들려보았다.
@논산 쌍계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읍 중산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소속으로 되어있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사찰의 내력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1739년(영조 15)에 세워진 중건비로 미루어 보아
절이 유지되어온 면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쌍계사 중건비의 비문에 의하면 쌍계사는
그 이전에 백암(白庵)이란 명칭의 절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고려 후기에 이행촌의 발원으로 세워진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 당시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선원, 동당, 서당,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향로전, 해회(海會), 삼보, 요사 등이 500~600여 칸이 있을 정도로 한때 호서 지방의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재로 소실된 후 1716년(숙종 42)에 중창하였으나
1736년(영조 12) 11월, 또다시 화재로 전소되어
1739년(영조 15) 승려 성능과 극찰이 다시 일으킨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사찰은 암자(庵子)로서
고려 시대에 존속되다가 말기에 크게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입구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쌍계사중건비와 취봉당혜찬대사지도 등 9기의 부도가 있고,
사찰 내에는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나한전(羅漢殿)과
칠성각(七星閣)겸 산신당이 있다. 대웅전의 전면에는 중층 누각 봉황루가 있으며,
좌측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우측에는 요사채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최근에 조성된 석조 관음보살 좌상이 대웅전 좌측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
쌍계사의 유물로는 대웅전(보물 제408호), 소조 석가여래 삼존불(보물 제1851호),
직경 1.82m의 법고(法鼓)와 전비(殿碑)가 있으며,
공주 갑사에 보관된 『월인석보(月印釋譜)』도 쌍계사에서 조판 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쌍계사 봉황루
쌍계사 입구에 서 있는 2층 누각에는 쌍계사란 편액과 봉화루라는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쌍계사는 이 봉황루는 일주문과 해탈문을 겸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봉황루 현판에는
등루부운(雙鷄寺鳳凰樓登樓賦韻)란 시가 걸려 있다.
이 시는 1779년 한 노승이 쌍계사 봉황루에 올라 지은 오언율시의 한시로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雙鷄寺 鳳凰樓 登樓賦韻)」은
노납(老衲: 납의를 입은 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승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고만 알려진 작자가
쌍계사 봉황루에 올라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세속을 떠난 유유자적하고도 맑은 정취를 읊은 내용을 담고 있다.
등루부운(雙鷄寺鳳凰樓登樓賦韻)
高樓我獨臥) (고루아독아) 고루에 나 홀로 누워
心適上飛天) (심적상비천)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衆峀雲留白) (중수운류백)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群溪月影輝) (군계월영휘) 여러 시내에 달그림자 비치네
夕燈明佛室) (다등명불실) 석등은 법당을 밝게 비추고
朝雨暗仙扉) (조우암선비)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日賞金沙池) (일상금사지)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身忘俗諦歸 (신망속제귀)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봉황루 밑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대웅전이 마주하고 있다.
@대웅전
쌍계사 대웅전 보물 제408호 지정되어 있으며,
수미단에는 보물 제1851호 석가모니 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로, 웅장함을 자랑하며 좁은 절 마당을 꽉 채우고 있다.
돌로 쌓은 축대를 바탕으로 세워진 화려한 공포의 다포식 단층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정면 다섯 칸에 달린 여닫이문들은 모란, 연꽃, 국화 무늬 등 서로 다른 꽃문양 살로 만들어져 있다.
1972년에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단청을 새로 칠하였다.
건물은 막돌로 허튼 층 쌓기를 한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 부분이 약간 부른 배흘림기둥을 세우고서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 결구(結構)하였다.
기둥은 물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건물의 바깥쪽으로 외4출목(外四出目),
안쪽으로는 내5출목(內五出目)의 공포를 놓았는데,
복잡하면서 뒤섞인 장식이 조각되어 있어서보다 변화한 다포(多包)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둥과 도리 사이에 장식한 살미는 섬약하고 길게 뻗은 모습인데,
건물 바깥쪽의 끝부분은 모두 위로 치켜 올라간 앙서[仰舌]로 되어있고,
건물 안쪽은 연꽃 봉오리를 뚜렷이 조각하고서 겹쳐 쌓아 화려하게 꾸몄다.
특히 건물 안에는 우물천장이 높이 결구 되어있고,
양쪽 대들보 위에 직각으로 걸쳐 있는 충량(衝樑)의 보 머리에는 용머리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한편 3칸의 고주(高柱) 사이에 설치된 후불벽(後佛壁) 앞에는 3구의 불상이 안치되었는데,
각 불상의 위에는 닫집이 하나씩 짜올려져 있다.
앞면 5칸은 칸마다 간격이 같은데, 각 칸마다 2짝씩의 문이 달렸다.
문은 문살에 연꽃무늬, 모란 무늬 등 6가지의 서로 다른 꽃 새김 창살을 정교하게 조각한 꽃살문으로,
무늬는 모두 단청으로 채색되었다.
@소조석가여래삼존불상 보물 제1851호
수미단에 조성된 삼존불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높이 190㎝,
우협시 불인 아미타불은 높이 180㎝, 좌 협시불인 약사불은 높이 174.7㎝이다.
재질은 소조 및 목조로 제작 시기는 1605년이다.
조선 후기인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3구의 대형 소조불좌상으로서
본존은 석가여래, 향좌측은 아미타불, 향우측은 약사불로 구성된 삼세불은
수조각승 원오(元悟)가 1605년 3월부터 7월까지 신현(信玄), 청허(淸虛), 神釰(신일),
희춘(希春) 등 네 명의 조각승과 함께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사찰들에 대한 중창 불사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쌍계사도 2층의 불전을 세우고 이들 삼세불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웅전은 1층으로 중수된 것이다.
(석가모니불)
삼세불은 대형의 수미단 위에 봉안되어 있는데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타원형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중앙의 석가여래불이 가장 크고
좌우 아미타·약사불이 조금 작게 조성되어 있어 다소간의 위계를 두었다.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양감을 넣었고,
눈은 마치 졸린 눈처럼 지그시 뜨고 있으며,
도톰한 이등변삼각형의 콧등,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본존인 석가불은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손은 앞으로 내밀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커다란 신체에 비교해 작고 섬세한 수인이 대조를 이룬다.
(아미타불)
한편 아미타불은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왼손은 배 높이로 들어 하품중생인을 결하였고,
약사불은 아미타불과 대칭으로 수인을 결하였다.
석가불의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를 덮은 변형 편단우견 식인데
어깨 위의 옷자락 끝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가슴 일부를 가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 아래로는 수평의 내의가 보이는데 부채처럼 접힌 옷 주름을 큼직하게 표현했다.
(약사여래)
이에 반해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착의법은 통견이면서
오른쪽 어깨를 덮는 대의를 걸치고 있어 석가불과는 차별된다.
옷 주름은 깊지 않으면서도 유려하고 간략한 편이다.
하체를 덮은 대의 자락은 종아리를 감싸는 부분은 인체에 밀착되어 있고,
바닥에 접하는 부분에만 얕은 단을 규칙적으로 부여하여 옷 주름을 표현하였다.
이 옷 주름들은 평행에 가까우나 발목 부분은 조금 높은 사선을 이룬다.
가사를 발목 교차점에서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해서 부채꼴 형상으로 펼쳤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복장유물로는 한지를 재단해서 두루마리로 만든 불상의 조성 발원문과
오곡·오약·사리 2과(顆)를 넣은 후령통, 『묘법연화경』 3책, 「관음보살예문」,
「아비달마대비바사론」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묘법연화경』 권5·6·7은
완주의 안심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1402년에서 1410년 사이에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보물 제1306호인 『묘법연화경』의 원판본일 가능성이 있다.
「관음보살예문」은 1462년(세조 8)년에 중각한 것이다.
삼세불 위에는 중층 형태의 닷집이 각각 설치되어 있는데,
아미타불 위에는 ‘칠보궁’, 석가여래 위에는 ‘적멸궁’, 약사불 위에는 ‘만월궁’의 편액이 달려있다.
(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이 삼세불상은 2013년 4월 22일에 ‘논산 쌍계사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보물급 문화재로 재지정되면서 순수한 목조가 아니라 최종 마감이 소조로 되어있음이 밝혀져
소조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신충탱인데 일반 사찰의 신중탱과는 사뭇 다르다.
삼불상 내벽에는 8대금강탱이 조성되어 있다.
(8대금강은 본방 팔공산 동화사 참조)
대웅전에서 바라본 연리목과 범종루 그리고 봉황루
명부전
나한전
@칠성각겸 산신당이다. 가운데 <겸>자는 <겸(兼)>자와 동일한 글자다.
치성광 여래를 중앙에 산신과 독성을 좌우에 배치한 것은 정형적인 배치방법이다.
요사채
관음보살비명
@범종각 이 사찰에 봉안된 유물로는 직경 1.82cm의 대형 법고와 전패 2개가 있으며, 공주의 갑사에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가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필자가 방문 시 전각 보수 중이라 사진을 담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쌍계사 부도
쌍계사부도(雙溪寺浮屠)는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읍, 쌍계사에 있는 승탑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80호로 지정되었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쌍계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련된 이 부도밭에는 모두 9기의 부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에서 돌아가신 아홉 승려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는데,
6기는 종 모양을 하고 있고, 나머지 3기는 지붕돌을 갖춘 4각 부도이다.
종 모양의 탐몸돌을 하는 부도들은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 위에 놓여 있다.
바닥돌은 연꽃무늬를 둘렀으며, 탑몸돌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을 얹어 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돌을 올린 부도들은 기단(基壇) 위로 동그란 탑몸돌을 얹고 지붕돌을 덮은 모습이다.
기단에는 연꽃무늬나 구슬을 이어놓은 듯한 무늬들을 조각하여 장식해 두었다.
탑몸돌에는 읽기 힘든 상태의 글씨가 보이는데, 그중에는 ‘혜찬대사’의 이름을 새긴 것도 있다.
모두 조선 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어 당시의 부도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쌍계사 부도는 원래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절의 입구에 모여 있다.
취봉당혜찬대사지도(翠峰堂慧燦大師之屠) 등 9기가 있는데
모두 조선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기는 종(鍾) 모양이고 3기는 옥개석(屋蓋石)이 있는 사각형으로 높이는 115~178㎝이다.
종형 부도의 지대석(地臺石)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사각형 부도의 탑신에는 장식 없이 기단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2005년에 논산시지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논산시지』에 수록된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읍 중산리에서 쌍계사와 하마비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내용]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읍 불명산(佛明山)에 쌍계사가 있다. 이 절은 하늘의 상제(上帝)가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 상제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기로 마음먹고 아들을 세상으로 내려보냈다.
상제의 아들은 지금의 쌍계사 자리에 절터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진귀한 나무를 구해 오도록 하여 각처에서 가져온 귀한 나무로 절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 경치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절을 지었다.
세월이 흘러 고려 후기 때의 일이다. 하루는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 한 스님이 나타나서 “쌍계사에 쫓기는 스님이 숨어 올 것이니 잘 대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소란스러워졌다.
또 꿈속의 스님 말처럼 많은 스님들이 난을 피하여 쌍계사에 찾아와 몸을 의지하였다.
그 후로도 많은 이들이 절에 찾아와 몸을 의탁하였다. 주지는 이들을 모두 거두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불명산을 뒤흔드는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많은 군사가 절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절에 숨어 있던 스님과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다.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스님과 피난 온 사람들이 다 함께 독경을 외웠다.
독경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압도하였다.
그때였다. 쏜살같이 달려오던 그 많은 말들이 우르르 한편으로 모여들더니
앞다리를 번쩍 들고 기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말들이 뒤엉키자 말을 몰던 군사들이 말에서 떨어져서 모두 죽었다.
이리하여 절에 숨어든 스님과 사람들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똑같은 일들이 계속 생겼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쌍계사를 찾는 사람들은 아무리 지체가 높아도 말을 타고 들어가지 못하였다.
또 말이 쓰러져 죽은 장소에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기어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하마비는 죄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 주는 영험이 있다 하여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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