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지리산 실상사(제1부)

2019. 8. 10. 18:01국내 명산과 사찰

남원 지리산 실상사(제1부)

@남원 지리산 실상사(實相寺)는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원시에 속해 있으나 실제로는

경상남도 함양군과도 가까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사찰이 대부분 산속에 지어진 데 반하여

남원시 산내면의 들판 가운데 자리 잡은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에서 흘러나오는 만수천을 끼고 있으며 절 앞에는 연지(蓮池)도 조성되어 있다.


 

천년 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서기 828)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마조 도일(馬祖 道一) 스님의 법맥을 이은

 서당 지장(西堂 智藏) 스님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하여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흥덕왕이 태자와 함께 이 절에 귀의할 정도로 왕실의 관심을 받은 절이라

이후 선종이 크게 일어나 실상학파를 일으켰다.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問)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선종의 대표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하에서 제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 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가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세조 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가 전소되었을 때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1821) 의암대사가 두 번째 중건했으며

고종 21(1884)에 월송대사가 세 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6·25 동란 중에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빨치산과 토벌군의 전투로 수난을 겪었으나

사찰과 문화재에 다행히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

실상사가 조선 시대에 전소된 것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는 등 왜구와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라는 구전도 있다.

 부속 암자로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이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곳에는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본방 백장암과 약수암참조)

실상사의 보물급 문화재로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제 33,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제34), 석등(보물제35, 개산당시),

부도(보물제36, 고려), 삼층쌍탑(보물제37, 887),

증각대사응료탑(보물제38,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제39),

철제여래좌상(보물제41,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보물제420, 1584) 등이 있으며,

다수의 지방유형문화재가있다. 실상사 일원은 현재 사적 제30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탈교

전각 앞이나 사찰 입구에 다리를 두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은 대부분이 산지에 있다.

산지에 있는 사찰들의 구조는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에 따라 일정한 법칙성을 지닌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섬부주에서 수미산 위 삼계(三界) 고해(苦海)를 지나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향수해를 지나야 한다.

그래서 전통 사찰에 이르기 전에 통상 냇물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다리를 피안교(彼岸橋)라 한다. 피안교는 해탈교, 극락교, 열반교라고도 불리며

주로 반월아치형으로 만들어져있다. 이는 바다를 건너 수미산으로 들어감을 상징하기 위해서다.

실상사는 평지에 조성된 사찰이지만 사찰 입구에 다리를 놓아

가람 전체를 피안의 세계 곧 극락정토의 세계임을 상징하고 있다.


석장승

장승은 사찰과 마을의 수호신상으로 마을 장승과 사찰 장승이 있는데,

사찰 장승은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의 석장승은 실상사 입구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사이 양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에 1, 다리를 건너서 2기의 장승이 서 있다.



실상사의 석장승은 대장군(大將軍)이라 쓰여 있는 장승의 기단석에

1725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어 3기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지만,

 한 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 때 떠내려가고 현재는 3기만 남아 있다.

@두 장승 모두 높이 2.5m로 벙거지를 쓴 모습이며 주먹코가 특징적이다.

 윗송곳니가 아랫입술 위까지 길게 나와 있으며 수염은 한 가닥만 새겨져 있다.


(만수천) 

3기 중 해탈교를 건너 서로 마주 보고 있는 2기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대장군(大將軍)’이라는 명문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으며,

 해탈교 건너기 전 좌측 석장승은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글씨가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상원주장군은 두 눈이 크고 둥글며 툭 튀어나왔고,

코가 크고 머리에는 벙거지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으며,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대장군은 이마 중앙에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으며

눈꼬리가 양쪽으로 치솟은 퉁방울형 눈에 주먹코, 위쪽으로 치켜 올라간 입술 등이 특징적이다.

 ‘대장군의 받침돌에는 擁正三年三月乙巳三月立東邊(옹정삼년삼월을사삼월립동변)’이라 적혀 있어

 1725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상원대장군은 뒷면에辛亥年正月(신해년정월)’이라 적혀 있어

 1731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개 장승은 한 쌍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1725년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옹호금사축귀장군은 벙거지를 쓰고 육중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

 찌푸린 이맛살에 눈꼬리는 양쪽 위로 치켜 올라가 있고,

 주먹코에 양 볼이 통통하며 송곳니가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은 사찰을 수호하는 장승으로,

1725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밝혀져 있어 장승의 편년에 매우 중요한 작품일 뿐 아니라

 양식적으로도 전통적인 돌장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691215일 국가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숲속에 세워진 해탈교가설공덕비





천왕문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들은 경주 불국사나 고창 선운사와 같이

통일 신라 시대의 양상을 따르고 있다.

칼을 든 남방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서방 광목천왕, 탑과 창을 든 북방 다문천왕,

비파를 든 동방지국천왕이 봉안되어 있다.(본방 선운사 천왕문 참조)

천왕문의 편액은 전북출신 서예가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지국천왕의 생령좌


실상사 사천왕의 생령좌(生靈座)

천인에서 아귀축생(餓鬼畜生)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을 대좌로 사용한 형식을 생령좌라 한다.

 니쁜 생령(生靈)을 힘으로 항복시킨다는 의미로, 사천왕, 팔부중의 대좌에서 볼 수 있다.

사천왕의 생령좌는 북쪽 지방에서는 청나라 만주족을

 남쪽지방에서는 일본일을 의미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임란과 정묘호란등의 비극과 수치를 되새겨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을 밟고 있는 데 반해

조선 시대에는 민간인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악귀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양쪽 발밑에 모두 8구의 악귀를 밟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밟지 않고 있는 예도 있다.


다문천왕의 생령좌


증장천왕의 생령좌


광목천왕의 생령좌










범종각




보물 제37호 동서삼층석탑

천왕문을 들어서면 동서로 두기의 탑이 서 있고

그 뒤편에 실상사의 본당인 보광전이 있고 그 중앙에 석틍이 있다. 



서쪽 삼층탑


동쪽 삼층탑

실상사 동서삼층석탑은 보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각각 8.4m. 석탑은 실상사의 중심 법당인 보광전(普光殿) 앞에 동서로 있다.

동탑과 서탑은 규모, 양식, 보존 상태 등이 같고,

특히 상륜부(相輪部)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서탑 

2층의 받침돌 주위에는 길고 큰 돌을 둘러서 탑구(塔區)를 설정하였다.

아래층 받침돌은 하대석과 면석(面石)을 하나의 돌에 새긴 4장의 널돌로 구성하였다.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을 새겼고,

아랫부분에 1단의 턱을 만들어 하대석처럼 보이게 하였다.

 덮개돌은 윗면의 경사가 급한데, 그 가운데 부분에는 각지고 둥근 3단의 굄이 있다.

위층 받침돌의 면석은 면마다 1장의 널돌을 조립하여 짰는데,

이 면석에도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덮개돌에는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있고,

경사가 급한 윗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역시 각지고 둥근 2단의 굄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으며, 1층 몸돌만 약간 높은 감이 있을 뿐,

위아래 몸돌의 체감률은 착실한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 받침이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지만 윗면인 낙수면(落水面)

 추녀 윗부분이 반전(反轉)이 강하여 경쾌한 느낌을 준다.

(서탑의 상륜부)


(서탑의 상륜부)  

3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 장식인 상륜부가 놓여 있다.

상륜부는 2단의 부연이 있는 노반(露盤),

두 줄의 띠와 꽃무늬가 장식된 납작한 구슬 모양의 복발(覆鉢),

8장의 연꽃잎을 두른 단면이 네모난 앙화(仰花),

꽃무늬를 새긴 둥근 기둥 모양의 간석(竿石)을 사이에 끼우고

귀꽃이 장식된 보륜(寶輪) 4개 등이 아래서부터 위로 갈수록 체감되면서 차례로 얹혀 있고,

그 위에 귀꽃을 장식한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다.

다만, 동탑에는 서탑과 달리 보개 위에 불꽃무늬를 새긴 수연(水煙)을 두었다.

동탑과 서탑 두 탑의 꼭대기에는 석탑의 중심 기둥인 높은 찰주(擦柱)

용차(龍車)와 보주(寶珠)를 꽂아 놓았다.


동탑의 상륜부  


동탑의 수연


동탑의 복발과 앙화


이 두 탑은 양식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받침돌 가운데 기둥의 수, 받침돌 덮개돌 윗면의 심한 경사,

지붕돌 받침 수의 감소, 전체적인 모습의 고준화(高峻化) 등에서

건립 시기가 불국사 삼층석탑보다는 다소 늦은 것으로 짐작된다.

곧 홍척(洪陟)이 실상사를 창건한 때가 828(흥덕왕 3)이므로,

 석탑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 부 전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 판관상 6,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3 송제대왕, 5 염라대왕,

7 태산대왕, 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4 와관대왕, 6 변성대왕, 8 평등대왕, 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약 사 전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중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철조 약사여래좌상 보물 제41호)


보물 제41호로 지정된 실상사 약사전의 철조여래좌상은 약사불로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로

민족의 영산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정면을 향하고 있다.

높이는 266이며, 현재 광배(光背)는 없어졌고 사각대좌(四角臺座) 위에 앉아 있다.

 

나발(螺髮)로 처리된 머리 위에는 높이 14, 밑변 48나 되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었으나,

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있다. 얼굴은 넓적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얼굴 길이보다는 너비가 더 넓다. 이마는 좁은 편이지만 박진감이 넘친다.



비교적 넓은 얼굴에 가늘고 긴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이마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아담한 코, 두터우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입 등이 조화 있게 잘 배치되어 있다.

목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삼도(三道)를 표현하였는데

음각선 처리가 아닌 굴곡진 모양으로 나타냈다.


 

두 손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1987년 복원불사(復原佛事) 때 나온

원래의 철제 손들도 같은 모양의 것이어서 나무 손은 후보(後補)하면서

원래의 철제 손을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왼손은 무릎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은 맞잡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므로

이 불상이 통칭 약사불(藥師佛)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설도 있다.


 

또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보함(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인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는 보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 불(盧舍那佛)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 실상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로 보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걸치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내려오는 U자형의 굵은 띠 모양 옷깃 안으로 넓게 터서 가슴이 많이 노출되었다.

그 아래로 엄액의(掩腋衣: 대의(大衣) 안에 입는 내의(內衣),

 왼쪽 어깨에서 내려와 오른쪽 겨드랑이로 들어가도록 둘러 입는다.)가 보인다.

 옷 주름은 부드럽고 유연한 물결 주름인데,

특히 팔의 주름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처리하였다.

대좌는 흙으로 만든 사각형의 대좌지만, 현재는 허물어진 부분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복원이 가능한 편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9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조성이 부쩍 늘어난 철불의 한 예이다.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불상 양식이 더욱 해이해지고 활력이 감퇴한 양식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아랫배 등에서는 아직도 긴장감이 나타나 있으나,

 8세기에 나타나던 유연한 탄력감이 아닌 경직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준다.


 

신체비례 면에서 보면,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 858)이나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 863)보다는 약간 고식(古式)이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 865),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제995. 867)과는 거의 같은 비율을 보이고 있어

대체로 9세기 중엽 불상들과 같음을 볼 수 있다.


 

형태나 선 같은 것은 대체로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도 친연성이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과도 상통하고 있다.

 즉 옷 주름의 세부 수법은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편으로,

어깨나 팔의 계단식 주름, 다른 부분에 물결식 주름을 보이는 것 등은 동일하다.

이것이 더 진전되면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평행 계단식 옷 주름으로 변하는 것이다.


 

남원 지리산 실상사는 세조 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재건과 중건을 거듭했는데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는 들판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 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보물 제37호 실상사 석등)

@석등

보물 제35. 높이 5m. 보광전과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보물 제37) 사이에 있다.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인 단면 8각을 따르고 있지만,

가운데 받침돌이 여느 석등과 같이 8각의 간주(竿柱) 모양이 아닌

북을 옆으로 엎어 놓은 고복형(鼓腹形)이어서 차이가 있다.


 

석등은 단면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다.

아래 받침돌은 8각의 윗단과 아랫단으로 조성되었는데,

아랫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오목새김 되었다.

윗단에는 2장의 넓은 꽃잎이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겹쳐진 채로 얕게 돋을새김 되었는데,

각 꽃잎의 끝부분에는 높게 솟아오른 귀꽃이 3개의 구름무늬를 이루며 장식되어 있다.

윗단의 윗부분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가운데 받침돌은 단면이 둥글며 3단의 마디로 조성되었다.

곧 아래 받침돌 윗단의 위와 위 받침돌의 아래에 바로 붙어서 각각 1단의 마디를 두었고,

위아래 마디 사이에는 제법 높은 또 하나의 마디를 놓았다.

툭 튀어나온 마디에는 가운데 부분에 3줄의 띠와 함께 토끼풀처럼 생긴 꽃무늬가 장식되었고,

 위아래 부분에는 꽃잎이 1장인 단옆(單葉)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었다.

 3단의 마디 사이는 잘록한 편으로, 겉면에는 3줄의 선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맨 윗면에는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8각의 윗받침돌은 아래 받침돌의 윗단과 달리, 1장의 꽃잎이

위로 겹쳐진 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꽃잎마다 가운데 부분에 꽃무늬가 장식되어 특이하다.  

불을 켜 놓은 부분인 화사석(火舍石) 역시 단면 8각으로 이루어졌다.

 면마다 길고 네모난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변에는 2줄의 선이 그어져 있으며, 문을 고정시켰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8각의 지붕돌은 윗면인 낙수면을 면마다 1장의 연꽃잎으로 장식하고서,

맨 윗부분에 다시 연꽃무늬를 겹쳐 새긴 특이한 모습이다.

기왓골이나 우동(隅棟)의 표현은 없이 연꽃잎만으로 각 면을 나누었다.

연꽃잎의 끝부분에는 아래 받침돌의 윗단과 같은 모양의 귀 꽃이 장식되었지만,

일부는 잘려버렸거나 없어졌다. 머리 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상태가 완전한 편이다.

가운데 받침돌처럼 마디에 3줄의 띠와 꽃무늬로 장식된 복발(覆鉢)3단의 마디가 놓여 있고,

그 위로 귀꽃이 조각된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는데,

높게 돌출된 보개의 윗부분에는 덩굴무늬[唐草紋]가 새겨져 있다.

맨 위에는 끝부분이 뾰족한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가 놓였는데,

가운데 부분에 둥근 장식을 선으로 새겨놓아 특이하다.

   

석등의 앞에는 돌로 만든 계단이 서 있다.

계단은 석등에 불을 켤 때 오르내리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석등이 공양구(供養具)라는 장식적인 의미와 함께

실용적인 등기(燈器)로 사용된 모습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석등은 전체적인 모습이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이나

임실 진구사지 석등(보물 제267)과 비슷하여, 지금의 전라도 일대에서 유행하였던 양식으로 짐작된다.

크기가 장중(莊重)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비례미가 단정한 편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석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립 시기는 실상사가 창건된 828(흥덕왕 3)경으로 추정된다.




@보 광 전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옛 금당터에 작은 기단을 조성하여 세운 것으로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보광전 주변의 주춧돌이 널려 있는 데 이를 보아

 옛적에는 정면 7, 측면 3칸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 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본존인 목조아미타여래상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129cm, 어깨 폭은 34cm이다.


(아미타불)


남원 실상사 건칠아미타불좌상과 건칠관음보살입상(南原 實相寺 乾漆阿彌陀佛座象乾漆觀音菩薩立像)

조선 시대의 건칠상으로 201839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관음보살입상은 높이 178cm이다.


두 협시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로서 그중 1구가 분실되어

 남은 1구를 대칭적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사찰문화재도록>을 참조하면 좌측 보살이 원본인듯하다.)



관세음보살은 조선 전기의 건칠 보살입상으로

갸름한 얼굴에 눈이 좌우로 길고 얼굴은 무표정하나

입술의 양 끝을 약간 들어 올려 미소를 짓고 있다.

 상체는 천의 자락과 영락(瓔珞)으로 장식한 반나(半裸)이고

어깨가 그다지 넓지 않으며 팔이 길게 표현되었다.

허리에 군의를 묶고 반전된 옷자락을 표현하였고 양다리에 3조의 옷 주름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내려서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천의 자락을 살짝 쥐었고

왼손은 중지와 엄지를 맞대고 살짝 구부렸다.



상체와 비교하면 하체가 짧은 형식이며 몸 전체에 영락 장식을 하고 있어

고려 후기인 1333년 작품으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관음보살입상과

금동세지보살입상의 영락 장식처럼 아주 화려하다.

이 보살입상은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조선 전기의 건칠불 제작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바가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실상사 동종(銅鐘)

실상사에는 2개의 범종이 있다. 하나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강희(康熙) 33(1694)에 주조한 범종으로 현재 보광전에 있다.

 보광전에 있는 실상사 동종(實相寺 銅鐘)은 높이 123cm,

입 지름은 83cm1992620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이 종은 몸체의 위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넓게 펴진 모습이다.

종 몸체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강희 33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800근이다.

조선의 연력으로는 숙종20(1694)이 된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정칠립, 김천수, 김선봉 등으로

여기에서 처음으로 범종을 만든 사람을 편수(便手)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종을 매단 고리는 용이 종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며,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은 간략화된 용이 꼬리를 휘감은 모양을 하고 있다.

몸통 위쪽은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 아래 사각형을 이룬 유곽이 4면에 있으며,

사이사이에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었다.

 유곽의 테두리는 덩굴무늬로 장식되었고, 안쪽으로는 꽃 모양의 유두 9개가 있다.

종에 새긴 글을 통해 조선 숙종 20(169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의 이 범종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범종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실상사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라는 구전이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치는 보광전의 범종에는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어

예불할 때 종을 치면 이는 곧 종에 그려진 일본 열도를 두들겨 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 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에 이어,

지금 또다시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 제외라는 경제침략 정책을 펴고 있는 일본의 작태를 보면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칠성각

정면 1, 측면 1칸으로 다포식 팔작으로 된 건물이다.

특이한 것은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함인지 돌기둥 위에 4개의 활주를 세워둔 것이다.

법당에는 칠성탱이 걸려 있다.

 


~제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