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2. 23:47ㆍ국내 명산과 사찰
남원 지리산 실상사 백장암
지리산 백장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인 김제 금산사의 말사인
실상사(實相寺)의 부속암자로 소속되어 있다.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실상산문의 본산으로,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 국사가
무수무증심인법(無修無證心印法)을 종지로 개창한 최초의 선종가람이다.
실상사는 창건 초에는 지실사였으나 산문의 개산조 홍척국사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의 앞머리를 따서 고려 초부터 실상사라고 부르게 된 가람이다.
당시 실상사는 지금의 백장암 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실상사는 제2대 조사인 수철화상(817~893) 때에 가람이 협소하여
지금의 실상사 자리로 옮겼다는 설이 전해 온다.
실상사에서 약 8㎞ 떨어진 곳에 있는 백장암은 실상사 소속의 암자이지만,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가장 먼저 문파를 이루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수행도량으로 알려진 백장선원이 백장암 경내에 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백장암의 창건기록은 전하는 바가 없지만
성종 때 저술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불우조>의 기록에 따르면
실상사의 3개 부속암자 중 하나로 백장사가 나오며,
1690년 침허선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는 11개의 부속암자 중 하나로 백장암이 나와 있다.
11개의 암자 중 현존하는 암자는 약수암과 서진암, 백장암뿐이다.
또한, 본사인 실상사가 1468년 화재로 전소되었을 때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다고 전한다.
1690년에 침허(枕虛)가 중창한 이후에도 1868년(고종 5) 10월에 제3차 화재를 당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운월대사가 아래에 있던 터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01년(광무 4)에 제4차 화재를 당하였고,
다음 해에 남호대사가 완봉, 환월, 월허, 영담 등과 협력하여 다시 세웠다.
백장암은 실상사에서 남원 인월 방향 국도로 3㎞ 정도 가다가
백장휴게소가 있는 매동마을에서 우측 산도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있다.
오르는 도로는 산길이라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지만
10여 대가 주차할 공간이 가람 바로 아래 마련되어 있다.
백장암의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 석탑,
보물 제40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20호 백장사 만력12년명 은입사향로와 조선 시대 부도군 등이 있다.
산신각 주련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威振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萬里白雲靑嶂裡(만리백운청장리)
雲車鶴任閒情(운차학임한정)
옛적 영산에 부처님 위촉으로
강산에 위엄 떨치며 중생을 제도하시고
만 리에 걸친 흰 구름과 높은 푸른 산봉우리
학이 끄는 구름수레 타고 한가로이 지내시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법당은 아직 불사가 완결되지 않았는지 산신과 독성 두 분만 모셔져 있다.
산신각을 오르는 돌계단 옆에는 표주박 형태로 조성된 수각이 산사의 운치를 더한다.
산신각에서 바라 본 대웅전 전경
대웅전주련
摩訶臺法王(마하대법왕)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本來非皁白(본래비조백)
隨處現靑黃(수처현청왕)
위대하신 부처님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으며
본래 검거나 희지도 않으며
경계를 따라 푸르고 노랗게 나투시네
대웅전
옛적에는 광명전이었던 것을 대웅전으로 편액을 바뀌어 달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식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법당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수인(手印)을 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의 전형적인 수인이지만 아미타불이나 약사불도 취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을 한 대표적인 아미타 불상으로는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팔공산 군위삼존불,
국보 제45호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불이며,
보물 제431호인 팔공산 갓바위도 약사여래이면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한 아미타탱이다.
일체 다른 권속이나 신중 내지 불·보살을 두지 않고 심풀하게 그려져 있다.
수민단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불상이 있음즉 한데 비어 있다.
@1997년 5월에 도난당하고 그해 9월에 회수한 보살좌상이 있다고 하는데
실상사에도 백장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화재청에 올려진 사진을 검색해 보면 민머리에 상투를 한 보살상과
팔공산 파계사 관음불의 보관을 한 상반된 두 보살이 등재되어 있고,
옛적 블로그에서는 현재 대웅전의 관음 불상의 보관을 한 보살이 올라와 있어
현재로서는 그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다.
백장암 범종
남원 실상사 백장암 범종(南原 實相寺 百丈庵 梵鍾)은
2007년 1월 19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이 범종은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1743년에 조성되었다.
전체높이는 64cm, 직경 42cm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서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유곽의 아래에는 도톰한 돌기선이 1조 둘러져 있으며
하단부에는 아무런 문양도 없이 간단하게 명문대가 배치되었다.
명문은 “中鍾重 五十斤 有司敬仁 掌務時宇 乾隆捌年 癸亥三月日 咸陽 安國庵”이라고 적혀있어
이 종은 원래 함양(咸陽) 안국암(安國庵)의 범종으로 주조되었으며 무게는 50근임을 알 수 있다.
신중탱
보물 제420호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등은입사향로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동은입사향로는
넓은 전이 달린 몸체에 나팔형 받침이 붙은 전형적인 향로이다.
몸체보다 받침이 빈약한 감이 있지만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구연 윗부분에는 범어가 새겨진 9개의 작은 원과
당초문양이 빈틈없이 새겨졌고 몸체에는 범자가 있다.
몸 아랫부분에는 앙련이 있고 큼직한 굽 받침에는 소용돌이무늬가 있다.
받침대는 매우 날렵한 형태로서 정상에 소용돌이무늬가 있고,
곡면에는 사실적인 연꽃무늬가 묘사되었다.
몸체의 넓은 전 안에는 '운봉백장사은사향완'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고
끝에는 '만력12년 갑신3월주성'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만든 때는 조선 1584년(선조 17)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420호로 지정되어 있고, 현재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사진 문화재청>
보물 제40호 백장암 석등
이 석등은 백장암 삼층석탑 뒤 대웅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의 높이 2.5m이다. 연화 받침돌 위에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연화대석을 놓았으며,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상륜부까지 전체의 부재가 완전한 석등이다.
8각의 지대석 위에 연화대석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지대석 위는 낮은 16각의 측면을 이루었는데
각 면에는 통식(通式)을 장식한 작은 안상(眼象) 1구씩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단엽의 8판복련(八瓣覆蓮)을 조각하였으며,
연화문 안에는 화사한 꽃문양을 장식하였다.
연화 받침돌의 상면 중심에는 간주의 굄대를 마련하였는데
원형으로서 측면에는 16판의 단엽앙련(單葉仰蓮)을 둘렀다.
간주는 8각으로 아무런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8각이며 하면에 받침 1단이 모각되었고
측면에 앙련 8판이 둘렸는데 단엽으로 연판 안에는 작은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앙련의 윗부분에는 8각의 갑석형을 둘렀고 그 위에 난간을 장식하였는데,
이렇듯 앙련대석에 난간을 둘러 장식한 석등으로는 백장암의 이 석등이 유일한 예이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장방형의 화창구가 둘러져 있으며
다른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다. 화창구에는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 석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8각 옥개석은 하면에 화사석을 삽입하도록 파놓았으며,
처마 끝에는 1단의 턱을 마련하여 낙수면에서 흐르는 물을 막도록 하였다.
낙수면은 약간 경사를 보이나, 전각부에 이르면서 완만해졌고 합각선은 뚜렷하며,
각 모서리의 전각에 반전이 뚜렷하여 경쾌한 옥개석임을 느끼게 한다.
상륜은 원주형으로 이루어져 몇 줄의 선대를 조각하고 5중의 연봉을 장식하였다.
이 석등은 하대의 연화대석과 상대의 난간에서 동자주(童子柱) 등 주목되는 부재가 많은데,
각 부의 비례가 잘 맞는 우수한 석등의 하나이다.
상륜부는 대개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데
백장암 석등의 상륜부는 도난을 당해 현재 그 원형을 찾을 길이 없다.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
이 탑은 백장암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백장암 남쪽 아래 경작지에 남아 있어 석탑 바로 뒤에 서 있는 석등과 함께 원위치로 생각된다.
그 북쪽에 법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뚜렷한 점으로 보아 본래는 백장암이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층 탑신 각 면에는 보살과 사천왕상 2구씩을,
2층 탑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을,
3층의 각 면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기고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하대에 유행한 불국사의 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異形石塔: 평면 구성이나 입면 구성이 신라 때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과 다른 석탑)의 하나이다.
각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 밑에 조각이 가득히 있어 더욱더 주목된다.
특히 탑신에 조각된 자물쇠와 문비의 문양은 특이한 것으로
이는 통일신라 시대 말기에 조성된 보령 성주사지 삼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양은 통일신라 시대 말기에 나타난 고유한 문양임을 알 수 있다.
탑의 조성 시기는 홍척(洪陟) 화상이 실상사를 창건한 때가 828년(흥덕왕 3)이므로,
실상사의 동서 석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탑은 층수가 올라갈수록 일정 비율로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데 반해
이 탑은 1층의 옥신만 좀 클 뿐 2, 3층의 옥신은 대략 비슷한 크기이고
특히 옥개석은 3개 층이 거의 비슷한 크기를 가졌다.
각 층 옥개석 밑면(받침)에 층단을 두지 않는 것이 특이하고
1, 2층은 꽃잎의 끝(판단)이 되바라져 귀꽃처럼 솟았고
연꽃잎마다 중앙에 다시 꽃을 둔 호형의 앙련을 정교하게 새겼으며
3층에는 삼존불을 조각한 것이 일반 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기단부>
1999년 7월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백장암지 발굴 조사를 하던 중
석탑 하단부에서 높이 14㎝, 두께 10.6㎝, 길이 50㎝ 정도의 기단석 부재편 5점을 발굴하였다.
이 부재에는 탑신 조각과 같은 기법으로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사찰에서 보관하고 있던 부재편 6점과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출처:위키백과)
현재 이 삼층탑의 기단부는 발굴된 것이 복원되지 않고
다만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별개의 돌로 탑신 굄대를 조성하여 얹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이 건립되어 있다.
굄대의 상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나
측면에는 사방에 난간형을 돋을새김하여 둘러서 흥미롭다.
<탑신부>
탑신부에서는 초청 옥신이 너비에 비하여 높으며 2·3층의 옥신도 감축도가 많지 않아 또한 특이한 면을 보인다.
그리고 옥개석은 각 층 모두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며
낙수면(落水面)도 평박하여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하면은 층급을 이루지 않고 있어 이것도 또한 특수한 점이라 하겠다.
옥신과 옥개석
즉 초청 옥신 석 사면에는 보살입상과 신장상 2구씩을,
2층 옥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을,
3층의 사면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을 각각 돋을새김하고 있어
만면(滿面)에 조각이 화려하며, 2층과 3층 옥신석의 하단에는 난간을 둘렀다.
또 상단부에는 3층에 다 같이 목조건축의 두공형(枓栱形)을 새겼다.
1층과 2층 옥개석 하면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3층 옥개석 밑에는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이처럼 각 부 구조에서 전형적인 양식에 구애되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볼 수 있고
각 부재의 표면 조각에서도 특이한 의장을 찾을 수 있는 점이
신라 시대 굴지의 아름답고도 특수한 형식의 탑이라 하겠다.
<1층 탑신의 조각>
@)남면(보는 정면)으로 자물쇠와 두 개의 고리를 갖춘 문짝(문비)을 새기고
그 왼쪽에 보살입상이 오른쪽엔 사천왕(검을 쥔 증장천왕?)이 악귀의 양어깨를 밟고 서 있다.
(남면)
@동면에는 왼쪽에 사천왕이 두 손을 모아 봉을 쥐고
악귀의 머리를 누르고 있으며 오른쪽은 머리에 뿔을 한 도깨비 모습의 동자가
왼손에는 도끼를 오른손에는 볼진 같은 것을 들었다.
(동면)
@북면은 왼쪽에 사천천왕이 관모의 띠 입식이 날리듯 위로 치솟아 있고
왼손에 봉(장?), 오른손엔 탑을 들었으며 악귀의 가슴과 배를 밟고 서 있다.
오른쪽의 동자는 고깔형으로 뻗친 머리를 하고 오른손에 바람에 나부끼는 幢(당 : 깃발)을 들었다.
(북면)
@서면의 사천왕 오른쪽에 서서 금강저(삼고저)를 들고 악귀를 밟고 있는데
왼쪽의 동자도 사천왕을 올려보는 모습이어서 특이하다. 둥그런 활 같은 무기를 가졌다.
(서면)
@2층에는 사면에 천인주악상(天人奏樂像)이 조각되어 있다.
사방의 각 면석에 2구(軀)씩 조각했는데, 난간 건너 머름(기둥과 기둥사이에 친 낮은 칸막이)
안쪽 즉 방에 앉아 있으므로 허리 아래는 가려지고 허리 위로만 조각되어 있다.
남면의 생황, 바라를 비롯한 비파, 피리 장고 등을 각 면에 고루 배치하였다.
@3층은 사면에 1구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이 조각되어 있다.
사방의 각 면석에 1구씩 천인의 좌상이 역시 허리 위로만 조각되어 있다. 이유는 2층과 같다.
이 천인 좌상은 좌우로 천의 자락을 좌우로 흩날리는 비천의 모습을 연출하며
양팔과 손은 무언가(공양물?)를 받들어 바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공양상'인 것 같다.
@3층 옥개석 밑면(받침 자리)에는 일반 탑에서 볼 수 없는 삼존불이 부조되어 있다.
현재의 상태는 마모가 심해 그 형체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옛적에 올라온 사진을 검색해 보면,
옥개석 받침에 층단을 두는 대신 경사진 평평한 각 면에 삼존불을 조각하였는데
연화좌에 앉아 계시며 본존불의 광배는 폭넓은 거신광이며 협시불은 두광만 갖췄다.
또 협시불의 바깥쪽으로 법의 자락이 비천의 천의 자락처럼 날려서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본존불은 수인을 지으셨고 협시불은 합장을 하거나 합장한 손에 원형의 무언가를 받들고 있다.
상륜부는 약간 결손된 부분도 있으나 방형의 노반석 위에
복발(覆鉢)·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煙: 탑의 구륜 윗부분에 불꽃 모양으로 만든 장식) 등 부재가
정연하게 완전한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에 차례로 꽂혀 있음은 희귀하다.
이 석탑은 이처럼 각 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 밑에 섬세하고도 화려한 조각이 가득히 조식(彫飾)되어 더욱더 주목된다.
백장암의 삼층석탑의 상륜부는 멸실된 부분이 보이는 데 이는 위 도면사진과 함께
같은 시기에 조성된 실상사 동쪽 삼층탑 상륜부를 비교하여 보면
백장암의 삼층석탑의 상륜부는 보개가 보이지 않으며,
앙화 역시 그 모양이 많이 다르고, 보주와 용차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상사 동쪽 삼층석탑
대웅전 앞에는 무명의 부도와 부재가 나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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