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대승사 부속암자 윤필암과 마애불좌상

2019. 7. 9. 21:23국내 명산과 사찰

문경 대승사 부속암자 윤필암과 마애불좌상


대승사를 거처 사면석불을 본 후 오솔길을 따라 대승사의 부속암자인 윤필암으로 향한다.

사불산 마루에서 내려다 본 풍광 속에서 유난히 윤필암의 한 전각이 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대승사에서 윤필암으로 이어지는 산속의 오솔길은 순례길이 아니라

대승사와 윤필암의 스님들이 즐기는 산책코스로 보인다.

오솔길 한쪽 구석 언덕에 세워진 이름 없는 부도탑 하나,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넌지시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대승사의 부속암자인 윤필암(潤筆庵)은 고려 후기인 1380

승려 각관(覺寬)과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창건하였다.

 윤필암은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찰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기문(記文)을 썼다고 한다.   



대승사의 부속암자인 윤필암(潤筆庵)1380(우왕 6)

승려 각관과 찬성(贊成) 김득배의 부인 김씨가 창건하였다.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이색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윤필(潤筆)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제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서는

 이색이 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다.

나옹의 문도들이 집필료를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받지 않고 그 집필료로써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수리한 암자를) 윤필암이라고 불렀다

(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묘향산(妙香山)금강산(金剛山)소백산(小白山)사불산(四佛山)치악산(雉岳山)

용문산(龍門山)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나옹의 진영을 모신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이색이 기문을 써 주었고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색은 윤필암기(潤筆庵記)에서 이르기를,

공덕산(사불산의 다른 이름)에 묘적암(妙寂庵)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이 출가했던 곳이니 나옹의 본고향이라고 하였다.

이는 나옹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공덕산에

그의 사리를 봉안한 윤필암을 세우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윤필암 경내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2기가 있어서 창건 시기는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조선 시대에는 1645(인조 23) 서조(瑞祖)와 탁잠(卓岑), 1765(영조 41) 야운(野雲),

1806(순조 6) 취운(醉雲), 1885(고종 22) 창명(滄溟)이 윤필암을 각각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던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性徹, 1912~1993)의 비구니 제자였던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윤필암은 현재 김천 청암사와 같이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사불산 산마루에서 내려본 윤필암의 전경이다.




윤필암의 전각들은 선방 위주로 운영되는 모양이다.


윤필암 전각에서 올려다 본 사불전


한 전각에 윤필암, 관음전, 적묵당(?) 등 3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전각 앞 작은 뜰녘에 붉은 양귀비가 탐방객의 눈길을 끈다.

윤필암은 비구니 사찰인데 비구니 사찰에 양귀비라...

관음전 마루 옆에는 위태천의 탱화를 모시고 있다.


관음전 안에 모신 관음보살




사불전으로 가는 길. 입구에 작은 연못을 조성하고 다리까지 놓았다.

피안교인가?


사불산 산마루에서 바라본 사불전


사불전

@윤필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전각이 사불전이다.

사불전은 적멸보궁과 같이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당 안에서 사면석불을 배례할 수 있도록 유리벽으로 조성되어 있다.

(사면석불에 대해서는 본방 문경 사불산 대승사 참조)














사불전 우측 언덕 자연 암반 위에는 삼층석탑이 한 기가 있다.

탑으로 올라 가는 길을 찾지 못해 포기했지만,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이 삼층석탑은 전체 높이로 2m로 자연 암반을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세운 3층 석탑이다.

윤필암 경내에는 2기의 석탑이 있는데 사불선원 앞에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고

사불전 뒤편에 있는 이 삼층석탑의 조성시기는 옥개석의 연화 문양 등 양식상으로 보아

이보다 후대에 속하는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불선원은 윤필암의 선방이라 일반 참배객들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운좋게도 단체 참배객들이 있어 법당에 참배할 수 있었다.

법당 안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300호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대승사윤필암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大乘寺潤筆菴木造阿彌陀如來坐像紙龕)

불상 높이 32, 어깨너비 16, 무릎 너비 23.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윤필암 사불선원 법당 안에 모셔져 있다. 불상은 목조(木造)에 도금(鍍金)된 것으로,

 1950년대 중반 도난당할 뻔했을 당시에

왼손 끝부분이 부러져 수리한 것으로 제외하고는 온전한 상태이다.

복장(腹藏)개금원문(改金願文)에 의하면,

1851(철종 2)1908년 두 차례에 걸쳐 개금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불상 조성의 하한 연대 역시 1851년 이전으로 상정된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 약간 긴장된 듯한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두발은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

중앙 계주(中央髻珠)가 옆으로 길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나발 하나하나도 상당히 또렷하고 조각되어 있다.

불두(佛頭) 전체는 계란형으로 상호(相好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는 원만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불신은 상체가 비교적 길게 조각되어 있으며, 결가부좌하고 있는 무릎의 너비는 좁은 편이다.

착의 방법은 통견의(通肩衣 : 어깨에 걸쳐진 옷)로서 옷 주름의 표현은 매우 간결하다.

특히 왼팔의 팔꿈치 부분은 각을 이루고 있어 형식적인 느낌마저 든다고 하겠다.

    수인은 아미타인(阿彌陀印) 중에서 엄지와 검지를 맞댄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을 맺고 있다.

이는 개금원문에 보이는 미타원문(彌陀願文)’의 내용과 합치되어 이 불상이 아미타불임을 알려 준다.

불상은 조각 수준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조선 시대 중기인 16세기경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지감(紙龕)은 두꺼운 한지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검은색 감실(龕室)이다.

이는 아미타 불상 안치를 목적으로 만든 것을 감안할 때,

불상 조성 시에 함께 만들었거나 아니면 이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감실(龕室)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불당 건물을 본떠 작게 만든 공간을 말한다.




문경 대승시 윤필암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복련 장식, 기단부 상층 기단면석에

3개 연속의 탱주 모각, 1층 탑신석 남면에 조각된 문비 등이 특징이고,

이를 현존 탑과 비교하면, 건립 시기는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추후 마당에 묻힌 기단부를 노출시켜 확인하면 보다 정확한 기단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층 탑신석이 멸실된 상태이나

 잔존 1층 옥개석 상면의 탑신 받침 규격을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3층 석탑으로 추정된다.



윤필암 삼층석탑은 특이한 기단구조와 문양, 상층기단부 면석 탱주의 3단 구성,

상대갑석 윗부분의 옥신석 받침 등에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어

문화재로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 윤필암 삼층석탑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하층 기단 부분의 확인, 삼 층 이상 부분의 동일 암석을 이용한 복원을 통하여

탑의 원형을 재현해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윤필암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시대 석탑에서 확립된 양식에

고려 시대 석탑의 창작성 및 예술적 특성이 가미된 3층 석탑으로

 제작 당시 석탑의 양식과 구조를 밝힐 자료로 인정된다.





편액이 붙어 있지 않은 전각이라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윤필암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전각이다. 법당 안에는 산신과 칠성탱, 유리관 속에 독성을 모셨다.


산신

치성광여래를 중앙에, 일광, 월광보살을 협시로, 주변에 칠성군과 제권속을 배치하였다.


독성은 감실로 된 유리관 속에 모셔져 있다.


윤필암을 나와 묘적암 가는 길의 마애불을 찾아간다.


대승사 마애불좌상

대승사에서 묘적암으로 가는 길 오른쪽 위의 남향한 암벽에 선각으로 조성된

대승사 마애불좌상의 크기는 높이가 약 6m, 어깨너비는 약 2.2m, 무릎 너비 3.1m이며,

연화대 일부가 떨어졌을 뿐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연화대좌(蓮華臺坐)의 높이는 1.3m, 너비는 3.7m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석의 자연석벽을 이용하여 음각된 이중연화좌(二重蓮華座) 위에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역시 음각하였으며,

머리 위로는 모서리가 깨어진 편평한 판석이 앞으로 밀려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천개(天蓋) 형식의 판석을 별석(別石)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는 편평하게 솟아 있으며,

그 양편에 뿔처럼 화문(花文)을 돋을새김으로 나타낸 것이 특이하다.

두 귀는 아래로 처지면서 반전되었고, 얼굴은 정면관(正面觀) 위주로 약화형식이 뚜렷하다.

 얼굴은 길쭉한데, 눈은 거의 감은 듯 길고

코는 밑이 약간 넓으나 거의 같은 굵기로 융기된 감을 준다.

코의 양 끝에서 연장된 눈썹은 중선으로 표현하였고 백호공(白毫孔)은 없다.

보통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는데 대승사 마애불의 경우

 두 줄의 삼도가 처진 듯이 음각 표현되어 있어 일반적인 양식은 벗어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통견(通肩)에 군의(裙衣) 매듭 띠가 가슴 앞으로 보이는데 끝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음각 선만으로 처리된 옷 주름은 듬성듬성하며 거친 편이다.

왼손은 어깨 위로 올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내고 있으나,

오른손은 손가락을 조금씩 오므려 복부에 대고 있다.

광배(光背)는 머리와 상체를 감싸는 거신광배이며,

두관은 동심원형(同心圓形)에 주위를 화염문으로 채우고 있다.

이같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화염문은 불상의 위엄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교한 고려 시대 불교 미술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자와 유래는 미상이나 이곳에 미륵암(彌勒庵)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곧 이 석불은

미륵불로 조성되어 신봉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고려 시대에 대규모로 조성되었던 마애거불상(磨崖巨佛像)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음각과 양각을 섞어 쓰는 불상 조각 수법과 함께 세부 표현이 간략하게 처리되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인 비례는 안정감 있어 보인다.

아울러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대체로 고려 시대로 추정되며,

이 시기 불상 양식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불산미륵암중창기에 나타난 마애불>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까지 두 시대를 걸쳐 벼슬 생활을 한

문인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의 사불산미륵암중창기(四佛山彌勒庵重創記)에 기록된

미륵암의 위치와 당시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아래는 권근의 사불산미륵암중창기내용의 전문 해석내용이다.

 

대원령(大院嶺) 한 가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보주(甫州 예천군(醴泉郡)의 옛 이름)

산양(山陽 상주목(尙州牧) 소속의 고을)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구부렁하게 하늘로 솟아났다.

정상에 밑동이 박히지 않은 큰 바위가 있는데, 사면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사불산이라 하니,

온 나라에 부처 받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여 구경하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 중간에 법왕봉(法王峯)이 있는데, 남쪽 절벽에 자씨(慈氏 미륵보살)의 얼굴을 새겼고

그 곁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 미륵암인데, 전설에, 신라 때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암자 북쪽에 있는 묘봉(妙峯)이 멀리 사불(四佛)을 바라보고 섰으니,

신라 임금이 사불을 망배(望拜) 하던 곳인데, 세대가 오래되어 집이 무너져 풀밭이 되었다.

전 판사(前判事) 백진(白瑨)은 대대로 영해(寧海)에서 살았는데,

계해년 봄에 왜()를 피하느라 어머니를 업고 이리저리 헤매며 여러 고을을 지나 이 산 밑에 왔었는데,

그 이듬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으니, 상사 치르고 명복(冥福) 빌기에 힘을 다하였다.

하루는 중에게 울며 말하기를,

 

"내가 불행히도 고향에서 왜구(倭寇)를 만나 가산을 소실(燒失)하고

떠도는 시기에 흉한 운을 만나 이런 큰일을 당했습니다.

매양 고생하시며 낳아 기르신 은덕을 생각하면 하늘과 같아 보답할 길이 없기에,

낮이나 밤이나 근심하며 부모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정결한 집을 마련하여

명복(冥福)을 받으시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망극한 슬픔을 풀려고 하는데,

일이 커서 고통이 많으니, 더욱 서럽기만 합니다.

바라건대, 여러분께서 불쌍히 여기고 도우시어 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니,

중이 말하기를,

    "절을 새로 짓는 것은 국가에서 정한 금법이 있고,

이 산에 신라 때 있었던 미륵암의 옛터가 오랫동안 묵어 있으니,

그것을 새로 중건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공이 듣고서 눈물을 씻으며 좋다고 승낙하고 즉시 가 보니,

골짜기가 맑고 깊숙하고, 경내의 지형이 시원스러우며,

자씨(慈氏) 불상이 완연하고 옛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비로소 마음에 들었다.

즉시 즐겁게 일을 시작하여 우거진 숲을 베어내고 모래와 흙을 파내고서,

권선(勸善)하여 경비를 보태어 재목을 수집하고 기와를 구웠으며,

또한 식량이 떨어지게 될까 염려하여 밭 한 구역(區域)을 마련하여 농사를 지어 공급하였다.

을축년에 시작하여 정묘년에 끝냈는데, 4채에 2중 서까래를 얹고 대청[]도 있고

부엌도 있어 잘 다듬어지고 견고하게 건축되었다.

바야흐로 단청(丹靑)하려다가 못하고 있는데, 마침 환 잘 치는 떠도는 중이 좋은 물감을 가지고 왔으므로,

그려 주기를 청하여 단청을 하니, 주색 대마루와 푸른 서까래가 찬란하여 볼만했다.

 또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1()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3권을 인출하여 여기다 비치(備置)하였다.“ (이하생략)

(자료출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