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5. 00:16ㆍ국내 명산과 사찰
문경 사불산 대승사(제1부)
문경 사불산 대승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대승사에는 우리나라 6개 목조아미타설법상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목조 탱화와
창건 기록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 석조사면불(사방불)이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석조사방불은 사불산 산마루에 있는데, 대승사의 창건과 사명(寺名)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불산의 본래 산 이름은 공덕산이었다. <삼국유사> 권3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조의 내용에 따르면
「죽령 동쪽 백여 리 지점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진평왕 9년 갑신년에 홀연히 사면 10자 정도 되는 큰 돌이 사방에 불상을 새겨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산의 꼭대기에 내려왔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예경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으며,
<법화경>을 독송하는 망명(亡名 : 이름을 밝히지 않은) 비구(比丘)를 청하여
절을 주관케 하였더니,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돌에 공양하여 향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덕산, 또는 사불산이라 하였다.
비구가 죽자 장사를 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두 송이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은 ‘천강사불(天降四佛)과 지용쌍련(地聳雙蓮)’의 설화로서 더욱 잘 알려져 있다.」라고 했다.
천강사불(天降四佛)은 하늘에서 네 분의 부처가 내려왔다는 의미이고,
지용쌍련(地聳雙蓮)은 땅에서 두 송이 연꽃이 솟아났다는 의미이다.
창건 이후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고려 고종 때 상주 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의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기화(己和)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법당을 비롯하여
승당(僧堂)·동상실(東上室)·관음전·조전·미륵전·중실(中室)·시왕전(十王殿)·향로전(香爐殿)·
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침계당(枕溪堂)·금당(金堂)·영자전(影子殿)·
향적전(香積殿)·응향전(凝香殿)·나한전(羅漢殿)·청심전(淸心殿) 등을 신축하였다.
이 중 금당은 1692년(숙종 18)에 지었는데, 미면사(米麵寺: 白蓮寺) 삼존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1727년(영조 3) 종각을 단장하였고, 1730년 금강문(金剛門)을 지어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보현보살상을 모셨으며, 다음 해 천왕문과 금강문·일주문을 단장하였다.
그때의 산 내 암자로는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
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閠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 9암이 있었다.
1725년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腹藏)에서
사리(舍利) 1과와, 신룡(神龍) 1년(705) 금으로 쓴 『화엄경』 7권이 나왔다.
1862년(철종 13) 명부전(冥府殿)과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자
의운(意雲)·취월(就越)·덕산(德山) 등이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 누각 등을 건립하였다. 1872년 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하였고,
이듬해 누각 밖으로 석축을 쌓고 회랑 30여 칸을 신축하였다.
일주문 뒤편 편액
1899년 월파(月波)가 중심이 되어 염불당(念佛堂)을 만들고 미타계(彌陀契)를 설치하였으며,
환경(幻鏡)·화응(華應)·학송(鶴松) 등은 동별당(東別堂: 祖師堂)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여
7년 동안 정진하였다. 이때 동별당이 좁고 퇴락하여 많은 승려가 정진할 수 없었으므로
1906년 동별당 동쪽에 건물을 짓고 쌍련암만일회(雙蓮庵萬日會)를 개설하였다.
1956년 화재로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고 196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나한전·시왕전·선원·요사채 등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묘적암·윤필암·상적암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321호인 대승사목각아미타설법상(목조탱화)과
관계문서 4매(보물 제575), 보물 제991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사적비와 아미타 불상에서 나온 금자 『화엄경』 7권, 석가모니 사리 1과 등이 있으며,
창건설화에 얽힌 사불암이 대웅전 위쪽 산마루에 있다.
백련당
백련당은 범종각 앞 동서로 길게 늘어선 전각으로
백련당은 재가자들의 참선 정진하는 선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100년 전 옛 사진을 모델로 복원한 것이라고 하며,
정면 11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은 솟을대문과 같은 형식으로 양측 지붕보다 1단씩 높다.
만세루 쪽에서 내려다 본 백련당 뒤 모습
백련당을 지나면 만세루를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만세루
1956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0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현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범종루
백련당의 계단을 거처 오르면 좌측에 위치하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2007년에 지어진 것이다.
불전사물(佛殿四物: 법고, 범종, 운판, 목어)이 보관되어 있다.
운판
목어
대승사 노주석 (大乘寺 露柱石) 경북 유형문화재 407호
노주석(露柱石)은 노반지주(露盤之柱), 광명대(光明臺), 정료대(庭燎臺)라고도 하는데,
순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부른다. 용도는 사찰의 야간 법회 때 불을 밝히거나
숯불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데 쓰인다. 노주석은 형식으로 볼 때
분명히 석등보다 먼저 만들어졌지만, 고려 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는 노주석은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것이다.
대승사 노주석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07호로,
높이 2m, 화대폭 1.19 m, 화대받침 84cm 기둥 높이 1.7 m, 기둥 폭 50cm이다.
이 노주석은, 사각형의 바닥 받침돌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받침이 있는 화반(花盤)을 올려놓았다.
다소 거친 듯 질박한 모습은 우리 석조미술 특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둥에는 " 雍正 七年 己酉 四月日 庚申 辛酉 壬戌/옹정 7년 기유 사월일 경신 신유 임술 "
이라고 새겨져 있어, 영조 5년(1729)에 이 노주석이 만들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노주석은 김룡사 2기뿐만 아니라 대승사에 2기가 있고,
봉암사에도 2기가 있는 등 문경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전북 김제 금산사에 1기, 경북 경산의 환성사에 2기가 남아 있다.
청련당
스님들의 거처공간이며 일반 신도들을 접객하는 공간이다.
좌측 돌출된 곳이 주지 스님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공포는 다포식이다.
정면에는 단청이 퇴색되기는 하였지만 솟을 꽃살 무늬를 조각한
문살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봉안하고
후불탱화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이 조성되어 있다.
(국보 제321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1973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575호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8월 31일 국보 제321호로 승격되었다.
(사진: 문화재청 펌)
조선 후기에는 이런 목각탱이 유행하였는데,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1675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조선 후기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7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조각승 단응(端應), 탁밀(卓密)의 조각 유풍과 관련 있다.
특히 불화와 조각을 절묘하게 접목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중에서 선구적인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된 현존하는 6점의 조선 후기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1684년 예천 용문사, 상주 남장사, 서울 경국사, 1692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1782년 남원 실상사 약수암) 중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불보살상의 표현이나 작품의 격이 뛰어나며,
도상의 수도 많아 다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들의 모본(母本)으로 볼 수 있어 중요하다.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대웅전의 석가모니 삼존불의 후불탱화 형식을 조각으로 것으로
총 10매의 판목을 조합하여 아미타 극락세계를 장엄하게 표현하였다.
화면의 중앙에 자리 잡은 본존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주변에 보살과
제자, 천왕상 등 24구의 존상을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정연하게 배치하였다.
각 존상 및 모티프에는 이름을 적어 목각아미타설법상 도상의 이해도를 높였다.
이곳에 등장하는 도상은 기본적으로
『관무량수경』과「근수정업왕생첩경변상도」를 융합해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국보 제321호
목각탱 중앙 부분에는 키형 광배와 연꽃대좌를 꾸미고,
그곳에 별도의 나무로 조성한 아미타불을 봉안하였으며,
아미타불 좌우로는 5단에 걸쳐 협시상들을 배치하였다.
이 목각탱에는 인물을 밝혀주는 명문이 표기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목각탱의 길이는 3.6 m, 폭은 2.7 m로 규모도 보물로 지정된 현존하는 6기의 아미타설법탱 중
가장 크고, 불 · 보살상의 표현에서도 격이 뛰어나며
등장인물의 수도 많아 여타 목각탱의 모본(母本)으로 평가되고 있다.
맨 아랫단은 연꽃 아홉 줄기에 상품, 중품, 하품, 상 · 중 · 하생의 9품 9생의 명문을 적어놓아,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사람의 행업에 따른 구품연화대를 표현하였고
(이를 구품연지라 일컫는다. 본방 경국사 참조)
그 위에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불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1단에는 탑과 창을 든 광목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과 보현보살,
문수보살, 칼을 든 지국천왕, 비파를 든 다문천왕이 배열되어 있다.
2단에는 아난존자, 제장애보살,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금강장보살, 가섭존자를.
3단에는 제석천, 목건련존자, 지장보살, 미륵보살, 사리불존자, 대범천을,
4단에는 비난지다용왕, 월광천자, 수보리존자, 부루나존자, 일광천자, 난타용왕을,
5단에는 비천상이 둘, 화불 여섯 분이 차례대로 새겨져 있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고,
광배 위로 뻗은 광선은 시방세계에 두루 광명을 놓아
염불하는 중생을 섭수하여 버리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두 분의 비천상 아래 6구의 화불(化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아마도 과거칠불(過去七佛) 중 6분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이 목각탱은 원래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있던 것인데,
1862년(철종 13)에 대승사에 큰불이 나서 법당이 불타버리자 새로이 법당을 짓고,
당시 거의 폐찰 상태에 있던 부석사의 후불 목각탱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훗날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면서 거세게 시비가 일자, 등장을 올리게 되었다.
등장(等狀)이란, 조선 시대 소지(所志)의 일종으로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어 행정관서에 올려 인증을 받는 문서를 말한다.
1876년(고종 13)에 대승사에서 반환 대신
부석사 조사당(의상대사의 진영을 모신 곳)의 수리 비용을 대기로 합의를 보면서, 완의를 작성하였다.
완의(完議)란, 두 사찰 사이의 분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합의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때 작성한 문서 네 건은 현재 모두 보물 575호로 지정되었다.
신중탱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공포는 주포식이다.
법당 안에는 목각으로 조성된 산신, 치성광여래, 독성을 모셨다.
치성광여래는 대개 법륜을 지물로 들고 있는데 대승사의 치성광여래는 보주를 들고 있다.
좌우 협시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두고 칠여래가 둘러서 있다.
산신
독성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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