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사불산 대승사(제2부)

2019. 7. 5. 21:24국내 명산과 사찰

문경 사불산 대승사(제2부)



응진전

정면 3칸 측면 3칸 공포는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법당 안에는 500 나한상이 모셔져 있고 그 중앙에는 나한상 크기로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셨다.

그 옆 좌측법단을 따로 조성하고 흙으로 빚은 동진보살과 흙관 나무로 빚은 좌, 우 성군을 봉안하였다.




중앙에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측에 과거불인 정광여래의 화신인 제화갈라보살, 우측에 미래불의 미륵보살을 모셨다.




선향당


편액이 붙어 있지 않아 요사채인지 선방인지 알 수 없다.


극락전

정면 3,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벽을 흙이 아닌 나무로 지어졌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협시불은 목조 관음상과 대세지보살 상인데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聞慶大乘寺金銅阿彌陀如來坐像腹藏遺物) 보물제1634호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발원문은 없으나, 복장유물인 다라니의 인출 시기를 통하여

 고려 후기인 14세기경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6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목조관음보살상과 목조 대세지보살 상이 협시하는 구도로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협시보살상들은 양식상 조선 시대 후기로 편년 되어,

고려 시대 후기의 특징을 지닌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원래 협시상은 아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가 87.5이며, 무릎의 폭이 63이다  





아미타여래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불상 속에 있던 대부분의 복장유물은 없어졌지만, 대덕(大德) 5(1301)에 인쇄한

다라니가 확인되어 불상의 조성도 대략 이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불두 부분에 아직 남아 있는 복장유물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확인된 복장유물은 고려 시대의 것으로 편년 되는 다라니 류 312매이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아미타불의 설법인을 결한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약간 경직된 느낌을 주는 코를 제외하면,

내리뜬 눈과 약간 긴 인중, 살짝 다문 입 등 위엄있는 원만한 상호를 갖추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깨는 좁고 약간 처져 있으며,

옆모습을 보면 상체가 앞으로 약간 굽어진 자세이다.



가슴과 복부가 풍만한 상체에 비교해 하체는 무릎의 높이가 낮아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머리와 육계의 구분이 거의 없고, 머리의 중앙과 정상에는 둥근 형태의 계주를 갖추고 있다.

귓구멍(耳孔)8자 형태이며, 그 아래에 다시 8자 형태의 홈은

1280년에 중수된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의 물방울 형태에서 진전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 후기의 당진 신암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남원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 조선 초기로 편년 되는 안동 개목사 목조관음보살상과

예천 용문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등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모양의 귀는 고려 시대 후기부터 조선 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암사 금동아미타좌상(보물 제987호)

 

수인은 엄지와 약지를 부자연스럽게 맞댄 아미타불의 설법인 이다.

법의는 대의와 내의 등을 통견형식으로 착용하였다.

왼쪽 팔꿈치에 Ω형 주름이 나타나지 않거나, 마름모꼴 금구 장식이 없는 승각기,

 승각기 아래로 표현된 나비매듭의 띠 자락은 각각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571),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19),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44) 등과 비교된다.


서산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19호)

칠성탱

한편 오른쪽 발목 아래의 자형 주름과 왼쪽 무릎의 날카로운 잎사귀 모양의 주름은

14세기에 조성된 남원의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17)과 유사하다.

 따라서 불상은 불두의 모습과 착의법 등을 통하여 고려 시대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천

정면 3,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다포식이다.

법당에는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그 좌우에 시왕들과 두 분의 금강역사를 모셨다.

뒤편의 지장탱은 경북유형문화재 제5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심당



대승선원

좌선방(坐禪房)으로 불리는 이 정각은 정면 8<H>형으로 팔작지붕이다.

건평 106로 약 4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60년 퇴경 권상로 선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H>형 전각은 공부에 몰두하라는 의미로 <()>을 의미한다.

좌측전각은 무량수전 편액이,

우측에는 전각 안에는 天降四佛(천강사불)地聳雙蓮(지용쌍련)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무량수전 옆은 관음전으로 보물 제991호인 <금동보살좌상>이 유리벽 안에 봉인되어 있다.


@대승선원편액

대승선원의 원래 이름은 쌍련선원(雙蓮禪院)이었다.

쌍련선원은 1995년 월산스님이 조실로 주석할 때 대승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금오 고암 향곡 도우 우봉 청안 자운 서암 월산 법전 등등

 이 나라의 무수한 고승 대덕 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대승선원 편액은 월산스님의 필적이다.

    

@대승선원의 우측에 걸려 있는 두 개의 편액은 시암 배길기(是岩 裵吉基 1917 ~ 1999)선생의 글씨인데,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대승사의 창건설화를 요약한 것이다. 시암 선생은 최연소 예술회 회원,

서예가협회 초대 회장, 문화재위원, 동국대 불교대학 미술과 교수를 지냈으며,

 전서에 뛰어나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天降四佛(천강사불)은 하늘에서 부처 네 분이 내려왔다는 뜻이고.

地聳雙蓮(지용쌍련)은 땅 속에서 연꽃 두 송이가 솟아 피었다는 의미다.

 

 

@@무량수전편액

无量壽殿(무량수전)의 이 편액은 이른바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글이지만,

이 글을 쓴 이는 석파 이하응, 즉 흥선대원군이다.

 편액을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일부러 긁어 지운듯한 흔적이 있는)

맨 위부터 石坡(석파)라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靈壽山房(영수산방). 靈壽無量壽(무량수)를 뜻한다.

마치 ()자처럼 보이는 글자는 자의 속자 이다.

이 글을 쓴 이는 중국 청대의 서예가이자 최고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翁方綱)이다.

우리에게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옹방강의 글을 임서(臨書)한 듯하다.

임서란, 글씨본을 보면서 쓴 글씨를 말한다.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1)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금동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聞慶 大乘寺 金銅觀音菩薩坐像)

19894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991호 문경대승사금동보살좌상으로 지정되었다가,

이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진평왕 9(587)에 세운 대승사에 모셔진 보살상으로 유리상자를 씌워 모셔 놓았다.

(현재 이 관음상은 무량수전 옆 선방에 모셔져 있고 일반 참배객에는 개방되지 않고 있다.)

 불상에서 나온 관음보살원문(觀音菩薩願文)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중종 11(1516) 불상에 새로 금을 칠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귀는 약간 짧고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팔에 걸쳐 내려 무릎을 덮고 있으며,

전신에 걸쳐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고,

왼손은 팔꿈치와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고 있다.

머리에 쓴 높은 보관의 장식은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사(보물 제1818)와 비슷하고,

높은 보관은 팔공사 파계사의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의 보관과 흡사하다.

 

가슴, , 무릎에 표현된 구슬 장식이 경상북도 영덕의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과 흡사하지만,

어깨와 등의 번잡한 장식이 옷 속에 감추어진 점이 다르다.

특히 띠 매듭 바로 위의 치마 상단이 긴 상체의 가운데에 표현되어

마치 보살상을 둘로 나눈 것처럼 보이게 한 것 또한 이 불상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팔공산 파계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


사면불 가는 길. 길지는 않지만 약간의 경사가 있다.


사면불 가는 길에 만난 장군수. 약수터인 모양이다.






대승사의 이 사면석불은 기록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석불이라고 한다.

(본방 화전리석조 사면불 참조)

사면석불은 마모가 심하여 그 형체를 알아 불 수가 없을 정도다.

다만 그 중 유일하게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한 면뿐이다.






사면석불에서 바라 본 묘적암


줌으로 당겨본 묘적암 전경


사면석불에서 바라 본 윤필암. 좌측 맨 위 전각이 적멸보궁처럼 불상을 모시지 않는 전각 사불전이다.


사불전




사면석불에서 윤필암을 거처 다시 대승사로 내려왔다. 돌담에 둘러쌓인 풍경이 아름다워 다시 담아 본다.







온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