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8. 21:38ㆍ국내 명산과 사찰
경주 함월산 기림사(祇林寺) 제1부
경주 함월산(含月山) 기림사(祇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산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31 본산의 하나로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기림사의 창건 내력은 보면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 홈피에 의하면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의 기(祇)와
임정사(林井寺)의 림(林)을 따 기림사(祇林寺)라 명명했다고 한다.
신라 신문왕은 대왕암(大王巖)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 대선사인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소실(燒失) 되었으나,
이듬해 봄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다.
그 뒤 1878년(고종 15)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하였다.
31 본산 시대에는 월성군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오백나한전과
정광여래사리각(正光如來舍利閣)인 삼층전(三層殿)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應眞殿),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삼성각·관음전·산신각·주지실·종무소·요사채·산문(山門)·창고 등이 있으며,
특히 대방(大房)은 2동이 모두 중후하다. 그 밖에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 절은 천년에 한 번 핀다는 한약초 ‘우담발라’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한 곳이다.
주요문화재로는 보물급이 5점이 있고, 지방문화재(경북유형문화재)로는 4점이 있다.
천왕문
좌로부터 동방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좌로부터 서방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사천왕은 지물로서 구별하는 데 조성 시기에 따라 다르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사천왕상이 들고 있는 지물은 주로 병장기로서
칼, 화살, 창, 금강저(金剛杵 : 악마를 깨뜨리는 무기) 등과 같은 것이며
북방 천왕의 경우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지만,
이에 반해 조선 후기로 오면서 크게 변화하여 비파, 칼,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원대 라마교 약사칠불의궤공양법(藥師七佛依軌供養法)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좌세는 특이한 편이다.
대체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올려 어그러진 얼굴과 검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형태의 악귀가 받들고 있다.
다른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있거나 사람의 등 부분을 밟고 있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을 밟고 있는 데 반해
조선 시대에는 민간인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악귀의 모습을 취한다.
양쪽 발밑에 모두 8구의 악귀를 밟고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밟지 않고 있는 예도 있다.
기림사의 사천왕은 신라 때 양상인 경주 천왕문의 사천왕상과 같은 지물(持物)을 하고 있다.
다만 차이는 기림사의 사천왕은 악귀의 등을 밟고 있는 것이 다르다.
(본방 경주 불국사와 고창 선운사 천왕문 참조)
진남루는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 영조 16년(1740)에 쓴 사적기에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남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누각이라고 하면 중층 건물이나 다락집의 형상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다.
진남루는 1991년 9월 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호국 사찰로 승병 활동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과 승병 활동의 근거지로 진남루(鎭南樓)는
승병교육과 훈련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기림사 사적비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기림사는 경주지역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기림사의 인성 스님은 승군 279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으며
인근 지역 승군을 총지휘하는 진동 장군(鎭東將軍)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림사삼층석탑 (祇林寺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얹은 전형적 양식의 소규모 석탑으로
응진전(應眞殿)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기단부는 하층 기단 하대석 이하는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중대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중간기둥 2개가 얕게 새겨져 있으며
파손이 심한 상대석에는 2단 괴임이 얕게 도드라져 있다.
상층기단 중대석은 모서리 기둥과 중간기둥 1개를 얕게 새긴 판석을 엇물리게 조립하여 세웠다.
그 위에 한 장의 판석으로 만들어 얹은 갑석(甲石)은 아래에는 1단의 얕은 부연(副椽)을 두고,
상면에는 1층 탑신을 받치는 자리에 얕은 3단의 괴임을 두었다.
탑신부의 옥신석은 1·2·3층 모두 1개의 돌에 4개의 모서리 기둥을 얕게 새긴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며,
4단의 층급받침을 둔 옥개석 역시 1·2·3층 모두 1개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처마는 직선, 추녀 부분은 윗부분은 휘어 올라간 곡선으로 표현되었다.
지붕 면은 물매가 심한 곡면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내림 마루의 곡선이 추녀 끝으로 이어지나 형식적으로 처리되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로 구성되어 있으나 원형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규모가 작아져서 왜소한 외관을 이룬 점, 부재의 수를 간략화시킨 점,
괴임이나 층급받침이 형식화된 점 등 신라 말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거북등을 한 용의 형상의 조형물, 3층탑과 나란히 2기가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단층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대석 1벌을 놓아 기단(基壇)을 만들고, 그 위에 화강석 주초를 놓아 기초를 형성하였다.
기둥은 앞뒷면에는 원기둥, 측면에는 각기둥을 세웠다.
불단은 얇고 평평한 하대 위에 칸마다 안상 무늬를 그려 넣은 2단의 중대를 세우고
얕은 상대 갑판을 놓은 다음 갑판 위에 계단식으로 단을 내고
맨 아랫단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나머지 단에는 오백나한 상을 배치하였다.
복장유물에서 출토된 기록으로는 조성연도가 옹정7년(1729년)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연대로는 영조 5년에 해당한다.
오백나한상들.
기림사의 응진전의 몇 분 나한들은 소백사 비로사 나한전들처럼 동물은 안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기림사의 응진전의 삼불은 동화사 영산전의 삼존불을 많이 닮았다.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모시고 과거불인 정광여래의 화신인 제화갈라보살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좌우협시불로 모셨다.
대적광전(보물 제833호)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慶州 祇林寺 大寂光殿)은 창건 이후 8차례에 걸쳐 중수 또는 중건되는 과정을 겪었다.
대적광전은 1997년 해체공사 때 4종의 종도리 묵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묵서에 의하면 1629년에 5차 중수에 해당하는 개중건상량(改重建上樑)이 있었고,
1755년에 대웅전 개조중수(改造重修)가, 1785년에 6차 중창이 있었으며
이때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958호)이 봉안되면서
존상에 맞게 대웅전이 대적광전으로 개칭된 듯하다.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대적광전은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33호로 지정되었다.
전각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할 때 옛 모습을 훼손하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대적광전은 절의 본당으로 내부에는 전단토상(栴檀土像)의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중원(中原)의 장인이 조성하였다고 한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은 사경 14권과
조선 시대에 만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되었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慶州祇林寺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문화재 지정 보물 제958호
크기: 비로자나불좌상 높이 360㎝, 약사불좌상 높이 360㎝, 석가모니불좌상 높이 360㎝
재질: 소조, 제작시기: 1564년 이전
보물 제958호로 기림사 대적광전에 봉안된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비로자나불상에서 54권 71책에 이르는 다량의 복장전류와 함께 2매의 개금중수발원문이 발견되었다.
1719년에 작성된 개금중수기를 통해 1564년에도 불상 개금이 있었던 것이 확인됨으로써
1564년 이전이라는 하한이 밝혀졌다. 전적류도 보물 제959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자나불)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이다.
비로자나불상 내부에서 출토된 기록을 통해 삼 불의 존명이
비로자나불,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문의 내용은 비로자나와 아미타여래의 개금 및 도금 관련 기록으로,
그 가운데 ‘嘉靖甲子一重修(가정갑자일중수)’라는 내용이 있어
1564년 1차례 중수가 있었고 다시 1719년 개금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아미타불)
삼불상은 크고 건장한 신체에 길쭉한 비례감, 작은 머리, 높은 육계,
뚜렷한 이목구비, 탄력 없이 늘어진 옷자락 그리고 넓고 낮은 무릎 등이 특징이다.
방형의 얼굴은 두툼한 눈두덩이의 반개한 눈과 높은 코, 깊이 팬 인중,
도톰한 입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입술 양 끝을 올려 미소를 짓고 있다.
(약사여래)
삼불은 신체나 얼굴 표현이 거의 유사하지만, 수인은 다르게 표현되었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을 취하였고 좌우 여래상들은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리고
왼손은 무릎 가까이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모두 안에 편삼을 입은 변형통견식 대의를 입었는데,
왼쪽 측면에 마주 주름 잡힌 대의가 뚜렷하고
무릎 위 주름이 뚜렷하게 각이 져 굴곡이 강한 기법을 보인다.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은 불국사의 비로자나불과 다르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은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좌권인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하여
기림사의 비로자나불은 우권인을 취하고 있다.
상당문에 기록된 조성연대를 보면 1564년 이전으로 확인되고 있다.
우권인이 정설이지만 이는 시대적인 차이가 아니라
도형의 오류로 기인한 것으로 대부분 학자는 평하고 있다.
(본방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불삼존좌상 참조)
기림사의 비로자나불삼존상의 재료는 흙이지만
내부에 향나무로 목심을 받치고 그 위에 점토를 붙여 형태를 만들었다.
이 불상에 사용된 흙은 사찰 근처에 있는 소토 성분과 같아
재료를 구하기 쉬운 용이성과 경제적인 장점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주기림사비로자나삼불회도(慶州祇林寺毘盧遮那三佛會圖) 보물 제1611호
경주기림사비로자나삼불회도(慶州祇林寺毘盧遮那三佛會圖)는
기림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약사불 뒤에 각각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손상이 심한 녹색은 개채(改彩)를 해서 원형이 손상되었다.
(불상에 가려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펌했다.)
기림사 홈피의 자료에 의하면 「중앙에 비로자나불회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회도,
오른쪽에 아미타불회도가 배치되어 있다.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약사불을 세 폭으로 나누어 그린 것으로, 각 화폭은 주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여래, 보살, 10대 제자가 배치되었고,
화면 좌우와 상단에 사천왕과 팔부중, 금강 등이 배치된 설법도 형식을 취하였다.
보물 제16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크기는 비로자나불회도는 425×316.5cm, 약사 불회도는 402×312.5cm, 아미타불회도는 415×313cm이다.」
(비로자나불회도:출처 펌)
조선 시대에 일반적으로 많이 조성된 불화로는 삼세불화(三世佛畵)와 삼신불화(三身佛畫)인데
삼세불화는 석가모니불화와 아미타불화, 약사불화로 구성되고,
삼신불화는 비로자나불화와 석가모니불화, 노사나불화로 구성된다.
기림사 대적광전의 이 불화는 비로자나불화와 아미타불화, 약사불화로 이루어져 있어
삼세불화와 삼신불화를 결합한 형식을 보여준다.
약사전
경주 기림사 약사전(慶州 祇林寺 藥師殿)은 1600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다포식 맞배지붕이다. 1991년 9월 6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동쪽에 있는 약사전은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 5년(1654)에 고쳐 세운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불상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기림사의 홈피에 의하면
약사전에는 약사 삼존상과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 탱화는 기림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보여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하여 다시 그렸다고 한다.
기림사 약사전의 삼존불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학계의 시선을 끌고 있다.
관련 기사를 요약하여 소개하면:
「경주 기림사는 지난해 12월(2008년) 약사전 삼존불에 전통 옻으로 새롭게 칠을 하는 개금(改) 불사에 들어갔다가
기존 불상에 여러 차례에 걸쳐 5~15㎝ 두께로 덧칠된 사실을 확인했다.
덧칠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나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며
문화재 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기존의 불상과 전혀 다른 불상이 나타난 것이다.
~중략~
약사불과 보현보살, 문수보살로 이루어진 이 삼존불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다섯 차례 정도 보수작업이 이뤄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기에 처음 시행된 보수작업에서는
한지를 여러 겹으로 깔아 채색하는 등 원형에 충실한 흔적이 뚜렷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중수 기록이 남겨진 1679년부터 석회·옻칠 등을 사용한 첩금(貼) 과정을 거치며
기존의 불상 모습이 감춰지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불상 발등 위에 옷자락을 덮어버리는 등 전혀 다른 양식의 불상으로 탈바꿈했다.
1987년에도 합성수지에 카슈 도료를 사용하여 원형과 무관하게 보수했을 뿐이었다.」
이 기사의 내용의 진위는 차치(且置)하고 협시불을 문수와 보현으로 본 것은 오류인 듯하다.
약사여래의 협시불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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