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사원 경주 함월산 골굴사 제1부

2019. 6. 20. 21:37국내 명산과 사찰




석굴사원 경주 함월산(含月山) 골굴사(骨窟寺) 제1부

  

골굴사(骨窟寺)는 경주시의 함월산에 있는 사찰로써,

 <한국의 소림사>라 불리는 선무도(禪武道)의 총본산이며,

 천연 암석 굴로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자연 석굴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 내력을 보면 함월산 골굴사는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 일행이 경주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기림사와 함께 골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골굴사는 광유 스님 일행이 창건할 때 인도의 석굴사원을 본떠서 조성한 것으로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신라 시대 불교 문화가 번성하던 6세기경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응회암 절벽에 마애여래불과 12처 자연석굴에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해 온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골굴사 창건 시에는 12개의 굴 법당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굴사원은 굴원(窟院), 석굴(石窟) 등으로 불린다.

바위 속이 불전(佛殿)과 법당(法堂)이 되고, 강당과 참선당이 되며,

방실(房室)과 주방이 된 이른바 석굴 속의 사원이라는 것이다.

건축자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국내 석굴사원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 시대(7세기경) 조성된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를 앞선

팔공산 군위 석불(국보 제109)이 있고,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양산 천성산 미타암 석굴(보물 제998)이 있다.

  


(무애루)  

석굴사원은 조성 기법에 따라 자연석굴, 굴착석굴, 축조석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연석굴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동굴을 수도처로 삼은 굴로써

팔공산 군위 석불과 양산 천성산 미타암 석굴이 이에 해당하고, 골굴사도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굴착석굴은 바위를 뚫어 만든 석굴인데 이는 근세에 들어와 조성한

설악산 계조암의 석굴, 울산 송운사 미타대석굴, 의령 일봉사 석굴,

밀양 여여정사의 약사굴 등을 꼽을 수 있다.

축조석굴(築造石窟)은 벽돌형 돌인 모전석이나 큰 판석을 쌓아 석굴 형식으로 조성한 석굴을 말하는데

 경주 석굴암(국보 제24)이 이에 해당한다.

(범종각과 연화당) 

그러나 자연석굴인 양산 천성산 미타암 석굴이나 팔공산 군위 석불은

단일 홀로 이루어진 단일 석굴이지만

골굴사의 석굴은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나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

자연 굴 법당이 형성되어 있어 그 규모 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단연 유일무이한 석굴사원인 셈이다.

골굴사가 이렇게 많은 굴 법당을 조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주 일대에서 유일하게 골굴사가 있는 함월산이

지질학적으로 화강암층이 아닌 석회암 층의 암석으로 이루워져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골굴석굴도]에는

마애불상과 12처 석굴이 모두 목조와가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 전실은 모두 소실되고 바위굴만 남아 있다.

이로 보아 골굴사는 창건 시에는 여러 석굴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석굴사원의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골굴사는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소실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경주에 사는 박씨 일가가 상주하면서 다시 사찰로 만들었고,

1989년에 한 개인에게 매매되어 넘어간 상태였던 것을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 스님이 매입해서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하였다.

 

골굴사의 문화재로는 보물 제581호인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관음굴, 지장굴, 약사굴, 나한굴, 신중단,

칠성단, 산신당 등의 굴법당과 더불어 남근바위, 여궁 등의 민간 전례 신앙의 흔적까지 있어

한국적인 석굴사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원융당) 

근래에 이르러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 수련원이 개설되어

 내국인은 물론 많은 외국인이 전통의 불교 무예를 배우는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마하지관원)









(세심당)


(일심당)


















칠성단


칠성단의 석조탱화


칠성단에서 내려다 본 대적광전


신중단의 석조탱화


지장굴


약사굴


약사굴의 전경






@경주 골굴사 마애여래좌상(慶州骨窟庵磨崖如來坐像)

골굴사는 자연 굴을 이용하여 조성한 12개의 석굴이 있는데,

이 중 가장 높은 암벽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의 크기는 높이 4m, 2.2m로 보물 제58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불은 석질이 고르지 않아 오른손과 무릎 아래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가슴과 광배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강건한 조각 수법을 보인다.




조선 시대의 화가 정선(鄭敾)이 그린 골굴석굴도(骨窟石窟圖)에는

목조 전실(木造前室)이 묘사되어 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고

 곳곳에 가구(架構) 흔적만 남아 있다. 건립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肉髻)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반쯤 뜬 눈이 길게 조각되었다.

코는 크지 않지만 뚜렷하게 각이 져서 타원형의 눈썹으로 이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백호공(白毫孔)이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중은 짧고 입술은 작고 두꺼운데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감돈다.

오른쪽 귀가 떨어져 나갔지만, 남은 왼쪽 귀는 길고 크다.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다.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교하여 신체는 평면적이어서 신체의 조형성이 감소되어 있다.

옷은 통견(通肩)이며 옷 주름은 평판(平板)을 겹쳐놓은 듯이

두 팔, 가슴, 하반신에서 규칙적인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겨드랑이 사이에서는 V자형으로 표현되어 팔과 상체의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가슴 좌우에는 아래로 처진 옷깃이 보이며 옷깃 사이로 평행의 옷 주름이 비스듬하게 표현되었다.



 

유난히 작게 표현된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넷째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오른팔은 손상되었으나, 어깨에서 내려오는 윤곽선으로 보아 무릎 위에 얹은 듯하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는 머리 주위에 끝이 뾰족한 홑잎의 연꽃을 배치하여 두광(頭光)으로 삼았다.

 두광과 불신 사이에는 율동적인 불꽃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대좌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윤곽이 불분명하나, 구름무늬 같은 각선(刻線)의 흔적이 보인다.



이 마애불은 긴장된 표정과 세부표현에서 통일신라 초기 양식의 특징도 보이지만,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 주름, 양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 주름 등이

 867(경문왕 7)에 조성된 경상북도 봉화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5)과 유사하다.


(봉화 축서사의 석조비로자나불)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후반기로 추정된다.

또한 마애불상 주변에는 크고 작은 12개의 자연석굴이 있어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각도를 달리하여 바라 본 약사굴의 약사여래


약사굴에 바라본 관음굴 












산신굴

















~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