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7. 21:27ㆍ국내 명산과 사찰
안성 매산리 미륵석불입상
당진 안국사지와 영탑사 등 투어를 끝내고 귀경길에 안성 매산리석불을 들렸다.
날은 온종일 흐렸고 늦은 오후 시간이라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안성 매산리석불은 아래 지역을 다녀올 때마다 늘 들린다 들린다 하면서도 스쳐 지났던 곳이다.
매산리석불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비봉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안성은 예로부터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 전략적인 요새였기 때문에
후삼국 때부터 이곳을 아군의 기지로 삼으려고 전시마다 치열한 전투를 벌려던 곳이다.
특히 고려 시대나 임진왜란 때에도 지금의 죽주산성을 둘러쌓고 전투가 치열했듯이
후삼국 중 후고구려의 건국을 꾀했던 궁예가 이 지역의 비뇌성(현 죽주산성)전투에서
양길에게 대승함으로써 북원, 국원, 청주까지 한반도 중부권을 제패할 수 있었기에,
이 전투의 승전 기념으로 자칭 미륵불이라는 궁예를 기리는
석조미륵불이 많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미륵불로는 쌍미륵사의 쌍미륵불과
국사암의 궁예미륵으로 역사학자들은 평하고 있다.
비뇌성은 현재 죽주산성(竹州山城)이며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충주, 천안, 이천, 안성 등 중부지역권에서
고려 시대의 많은 크고 작은 미륵마애불과 미륵불상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격전지가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지방호족을 기반으로 나라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고려 시대의 미륵불은 미륵신앙의 중심이 왕실과 사찰에서
민간 계층으로 이동하여 평안과 구복을 바라는 민초들의 염원의 주된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천의 미륵불입상, 안성 매산리석불입상, 바로 옆 죽산리의 석불입상등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안성 매산리 석불입상(安城 梅山里 石佛立像)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석불로,
비봉산을 등지고 있으며 미륵당이란 누각 안에 봉안되어 있다.
일명 <태평미륵>이라고도 불리며,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누각 앞마당에는 경기도 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된 미륵당 5층 석탑이 있다.
매산리석불은 높이 3.9m, 가슴둘레는 2.1m의 보살상으로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그 위에 보개(寶蓋)를 하고 있다.
보개는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부터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매산리석불 크기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은 3.9m, 한국민속문화 대백과는 5.7m,
그리고 현장의 안내판에는 5.6m로 되어 있다.)
보관을 쓴 석불의 머리 위의 갓 모양을 한 것을 천개(天蓋), 산개(傘蓋), 화개(華蓋), 현개(縣蓋)라고도 한다.
이러한 조형물의 시원은 인도에서 비롯되며 그 목적은 햇빛이나 비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도구인 일산(日傘)에서 출발한 것인데 점차 신분의 직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변화했다.
불교가 발전하면서 부처나 보살의 머리 위에 장식물로 이용되면서
광배와 함께 불상을 장엄하는 데 활용되었다.
대체로 큰 석불은 외부에 세우게 되므로 보개가 비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과
불상 장엄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각형, 원형, 팔각형, 육각형, 석등의 지붕돌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것인데
매산리석불은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하고 있다.
이 보개는 따로 조성하여 얹은 것이다.
이처럼 보개를 올려 논 모습은 고려 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형태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석조 불상 중 머리 위에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사례는 약 80여 구로 알려져 있다.
매산리석불과 같은 이런 사각형의 보개는 면류관을 의미하며,
이러한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는 고려 광종 대 조성된 불상에서 처음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불입상과,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을 들 수 있다.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불상의 조성 배경은
‘황즉불(皇卽佛)’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산리석불의 보관(寶冠)은 구름무늬인 보운(寶運)인 것 같다.
얼굴은 넓적하고 눈·코·입은 비례가 맞지 않아 독특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토속적인 얼굴은 높은 관과 더불어 보살상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굴과 비교하면 체구는 작은 편이며 어깨는 둥글고 가슴은 듬직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는 옷은 다소 두꺼우며,
상체에는 왼쪽 어깨에서 시작된 간략한 주름이 표현되고,
하체에는 계단식으로 처리된 U자형의 옷 주름이 표현되었다.
매산리석불은 양 손목에는 팔찌를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수인(手印)을 보면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는 데
여원인(與願印)으로 보기는 손가락의 방향과 형태가 다르며,
왼손은 복부에서 손등을 밖으로 향하고 있다.
왼손 방향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인 형상을 하고 있지만
역시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두 다리는 정면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데 다소 둔중하지만, 다리 표현은 분명한 편이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나 거의 목까지 덮여있어 마치 통견 같은 모습이다.
옷 주름은 굵은 U자형으로 아래로 흘러내리다
다리 사이에 새겨진 수직 돋을 띠에 의해 좌우로 나누어진다.
매산리석불입상은 괴체형(塊體形: 덩어리 모양)으로 이와 같은 모습은
고려 시대 전기의 충청북도 괴산 미륵리 석불입상과 비견되는 예이다.
특히 머리와 하체와 비교하면 어깨가 좁은 이 같은 거불(巨佛) 형식은
논산의 개태사(開泰寺) 석조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을 계승한 것으로
이런 형상을 한 석불상은 고려 시대 전기에 충청도·경기도 일대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미륵당은 지대석 위에 석주를 세우고 그위에 나무 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하다.
@매산리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조성내역
매산리 태평미륵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시대 기원설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시대 기원설이다.
고려 시대 기원설은 몽골침입과 관련된 것으로 매산리석불이 있는
죽산면의 죽주산성은 몽골침입 시 주요 격전지였다.
몽골의 침입은 1225년에 고려에 와서 무례한 행동을 하던 몽골 사신 저고여 일행이
귀국 도중 압록강 가에서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몽골은 이를 구실로 삼아
1231년(고종 18) 살례탑 부대를 보내 고려를 침략했으나,
귀주성(龜州城)에서 박서(朴犀) 부대의 항전 등 고려 군민의 저항을 받아 1232년 강화를 맺고 돌아갔다.
이후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9년 동안 6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연이은 몽골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민초들이 이 전투에 참여했던
송 장군과 처인성에서 살례탑을 사살한 김윤후(金允候)의 우국충정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인성은 오늘날의 용인이니 안성 바로 위쪽이다.
이는 <<고려사>> 권103 박서(朴犀) 송문주(宋文胄)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다른 하나 조선 시대 기원설로 조선 후기 영조 때에
최태평(崔太平)이라는 사람이 세운 미륵이라 하여
그의 이름을 따 태평미륵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이는 신빙성이 없는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기원설 외에 태평미륵(太平彌勒)이라 불리는 태평이 연호(年號)가 아닌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몽골침입 시기는 고려 중기인 데 비하여 보개는 고려 초기에 등장하기 때문이며,
또 안성과 바로 인접한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에 보물 제982호로 지정된
<이천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보물제962호)>이 있고
또 하남시에 선법사에 보물 제981호로 지정되어 있는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좌상이 있는데
이는 977년에 조성된 것이고, 이천의 석불은 태평흥국6년(981년: 고려 경종6)에 조성된 것이다.
태평은 태평흥국(太平興國)이란 연호(年號)인데
이는 북송(北宋)의 태종(太宗)인 조광의(趙匡義)의 치세에 쓰였던 첫 번째 연호(年號)로,
976년 12월에서 984년 11월까지 쓰였다.
안성 매산리석불인 태평미륵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라 하면 연대를 보면 합당하기 때문이다.
다만 태평 몇 년이라고 규정되지 않았던 점이 의아스럽지만,
미륵당 앞의 오층탑의 탑지석에서 확인된 탑의 건립시기가 993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안성 미륵당 오층석탑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오층석탑이다.
1986년 5월 22일 안성시의 향토유적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미륵당내의 매산리 석불입상 앞에 건립된 화강암 재료의 석탑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화강석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 있게 결구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다.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가 각출 되어 기단을 떠받들고 있다.
단층 기단은 네 귀에 우주를 새겼으며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시 1석으로 조성된 갑석은 아랫면에 반전 부분이 있고, 윗면에는 불룩한 낮은 각형의 3단 괴임대를 각출했다.
옥신과 옥개는 각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현재의 1층 옥신에는 양 우주의 선각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으며,
2~4층의 옥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옥개석은 4층의 것이 결실되었고,
5층은 옥신·옥개석이 동일 석이다. 옥개석은 낙수홈이 있고
그 밑에 원호경사가 있으며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옥신 괴임은 낮은 1단이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토되었고,
현재 탑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립 연대는 993년이고, 석탑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참조~
논산 관촉시 미륵불
논산 개태사 삼존불
안국사지 여래 삼존불
이천 어석리 미륵불
안성 쌍미륵사 미륵불
안성 국사암 궁예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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