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황정산 원통암

2019. 2. 28. 23:34국내 명산과 사찰



단양 황정산 원통암


() 단양팔경(丹陽八景)에서 제4경 칠성암으로 알려진 숨은 암자가 원통암(圓通庵)이다.

 단양 황정산 영인봉 아래 지어진 원통암(圓通庵)

1353(고려 공민왕2) 나옹화상(懶翁和尙:1351~1374)이 창건했다.

현재는 조계종 제5교구인 법주사 말사로 되어 있다. 원래는 대흥사의 말사였다.

 대흥사는 단양 황정산 산 아래에 있으며, 선덕여왕 15(646) 자장율사가

양산 통도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1876년 소실(燒失)되었다.

지금의 대흥사는 최근에 중건된 사찰이다. (본방 단양 황정산 대흥사 참조).

대흥사에는 청련암(靑蓮庵), 원통암(圓通庵), 망월암(望月庵), 굴암(掘庵) 등의 암자가 있었는데,

원통암 중수기에 따르면 대흥사의 암자 중에 원통암이 으뜸이라고 하는 기록이 나온다.

충청북도에서 발간한 사지(寺誌)에 따르면

나옹스님이 단양 원통암을 중창하여 토굴가를 짓고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사문학총람>에도 청산가와 토굴가는 나옹화상이 원통암에서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창건 이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전화로 소실 된 것을

1693(숙종19) 의명(義明)스님이 중창하였고,

1787년 불교 억압때(정말년) 절이 폐사 되었다.

1824(순조 24) 주지 대연(大淵) 대사가 좋은 절이 퇴락됨을 안타깝게 여겨

다시 중창했지만 두 차례 중창(重創)(1949년 중창과, 1965년 중건)거쳤지만,

1997년 화마(火魔)로 암자가 전소되었다.

가건물(假建物)로 명맥만 유지했던 원통암은 2012년에

현 주지 각문스님의 원력으로 3년에 걸친 불사로

가건물로 지내던 법당을 모두 헐고 원통보전과 나옹각, 심검당 등을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 앞 마당 우측에는 소원을 빌면 이루워진다는 일명 소원바위로 알려진 칠성바위가 유명하다.

원통암(圓通庵)의 원통(圓通)은 관세음보살의 육근원통(六根圓通)을 상징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통암 가는 길은 바위와 자갈 너들길, 그리고 계단으로 연이어 있다.






퇴색한 연등 하나가 원통암의 사세를 말하는 듯 하다.


















원통암이다. 좌측건물은 심검당 그 옆 전각은 관음보전 그리고 칠성암이다. 




심검당


심검당에 보이는 그림은 나옹화상의 청산가.(본방 나옹화상 청산가 참조)


<단양향토지>에 의하면, 약수터에 얽힌 이런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단양은 석회암지대이나 이곳 원통암은 화강암지역이다.

산봉우리가 기기묘묘하며 바위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기이한 형상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자기가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하여 원통암이라고 한다.


 

많은 승려들이 득도하여 사리봉안 된 곳이었던 신보도사의 전설과 사리 보관소가 현존한다.

 원통암이 창건되었을 때 층암절벽 사이에서 샘이 흘러나왔다.

조그맣게 버러진 바위틈을 나오는 샘물의 양이 적어서

한참을 받아야 먹을 만한 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샘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오는 것이었다.

암자 스님들이 술을 받아 두었다가 귀한 신도나 손님이 오면

 차 대신 대접하기도 하고 불가의 법주로 쓰기도 했다.


 

고을 태수가 맛좋은 술이 샘솟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암자로 행차했다.

 술이 나온다는 샘 앞에서 술맛을 본 태수는 욕심이 분출하여

 큰그릇에 술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조그만 틈사이로 솟아나는 샘 술을 받자니

 답답하고 지루하여 태수는 콸콸 나올 수 있도록 입구를 크게 팠더니 역시 술이 콸콸 나왔다.

 마셔보니 술이 아니고 물이 나오게 되자 이곳 주민들은 원통한 일이라 하여 이곳을 원통골이라 부른다.


나옹각이다. 법당 안에는 나옹화상 대신 석가모니불만 봉안했다. 아직 불사 중임을 암시하는 모양이다.

나옹화상(懶翁和尙)속명은 혜근(惠勤: 1320~1376)으로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俗姓)은 아씨(牙氏). 초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강월헌(江月軒).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온다.

법호는 보제 존자(普濟尊者)이며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영해부(寧海府: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출신이며,

아버지는 선관서령(膳官署令) 서구(瑞具)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중국의 지공(指空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인가를 받고

무학(無學)에게 법을 전하여, 조선 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웠다.    



나옹화상은 보우와 함께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 출가했다.

그뒤 여러 사찰을 순력하다가 1344(충혜왕 5)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347(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법을 배우고, 다시 자선사로 가서 처림(處林)의 법을 받았다.

그뒤 명주(溟州)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의 관음보살을 참례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했다.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1355년 연경으로 돌아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명으로 광제사(廣濟寺) 주지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여니 순제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상아불자를 하사했다.

순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법원사로 지공을 찾아가 그의 부촉을 받고 1358(공민왕 7) 귀국했다.


 

귀국 후 평양·동해 등지로 다니며 설법하다가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뒤 공부선을 관장했으며,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양주회암사에 봉안된 나옹화상 영정) 

1371년 왕사에 봉해지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보제존자

(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그뒤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길이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376(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왕명에 의해 밀성(密城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1376(우왕 2) 515일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56, 법랍 37세였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양주 회암사에 봉안된 영정. 좌로부터 무학, 지공, 나옹화상이다)  

나옹화상은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나옹집이 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특색 있는 것은 나옹삼가 懶翁三歌로 통칭된

백납가 百納歌·고루가 枯髏歌·영주가 靈珠歌3편이다.

누더기, 해골 같은 몸, 보배스러운 구슬을 노래하고

삶에 집착하지 말고 불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제이다.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고,

비석과 부도는 회암사에 남아 있다. 저서로 나옹화상어록1권과 가송 歌頌1권이 전한다.


원통보전





관음보살 상 옆에 동자와 용왕을 봉안했다.




나옹화상 영정


신중탱







삼성각


삼성각 법당은 산신과 독성만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은 보이지 않는다. 


칠성암이다.


칠성암 옆에 작은 전각을 세우고 안에는 범종과 칠성탱을 봉안했다.

삼성각에 봉안될 것을 이곳에 옮겨 놓은 모양이다.











칠성암 뒤편 모습


좌측 맨 끝에 보이는 당우가 배석대라 부른다. 여기에서 칠성암을 향해 배례를 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