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6. 22:16ㆍ국내 명산과 사찰
단양 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로 지정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는
단양 휴게소 바로 뒤에 있는 성재산에 있다.
이 비는 1978년 단성면 성재산의 적성(赤城) 내에서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비의 발견으로 산성의 이름이 <적성(赤城)>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곳은 남쪽에서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직전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부근에는 고구려 장군 온달의 전설이 전해오는 온달산성이 있다.
현존 높이 93cm, 위 너비 107cm, 아래 너비 53cm.
자연석 화강암의 표면을 다듬어 글자를 새겼고,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관계로 마멸이 적어 자획이 또렷한 편이다.
윗부분이 파손되었으며, 총 21행에 430자 가량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석이 발견된 직후 행해진 주변 일대의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가 밝혀졌고,
기와·토기 편을 비롯하여 몇 개의 비편이 더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모두 305자를 읽을 수 있고,
정밀한 연구에 의하여 비편 가운데 일부는 본문에 연결시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비문의 글씨체는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며,
문장은 한문투와 함께 신라 고유의 문장법이 혼용되어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비문은 크게 처음의 연월일을 기록한 부분과 본문,
그리고 비를 세우는 데 관계한 사람들을 기록한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연월일을 기록한 부분은 파손되어 있다.
비가 건립된 시점은 이 지방을 중심으로 어떤 비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거나,
그 상황이 마무리된 직후라고 추정된다.
비문에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와 있던 2명의 군주(軍主)를 비롯한
군사지휘관인 당주(幢主) 등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진흥왕이 10명의 고관(高官)에게 명하여
신라의 북방 경략을 돕고 충성을 바친 현지사람인 야이차(也爾次)를 포상하고
주민을 위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왕교(王敎)를 받은 왕경인(王京人) 10명은
당시 신라의 북방 경략에서 중심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사부(伊史夫)·내례부(內禮夫)·비차부(比次夫)·무력(武力) 등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인물로서 주목된다.
즉 이사부는 〈삼국사기〉의 이사부(異斯夫)로서 지증왕 대에서
진흥왕대에 걸쳐 대외 경략에 활약하다가
진흥왕대 후반에 거칠부에게 그 임무를 넘겨준 최고 사령관이었다.
내례부는 〈삼국사기〉의 노리부(弩里夫)에 비정(比定)된다.
그리고 무력은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으로서,
553년(진흥왕 14)에 백제의 동북지역, 즉 한강 하류 유역을 탈취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했을 때 그 군주로 임명되었다.
비차부는 그대로 〈삼국사기〉의 비차부와 같다.
이렇게 보면 비문의 결락부(缺落部)에 4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거칠부로 비정할 수 있다.
비의 건립연대를 추측하는 데는, 비차부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즉 비차부는 551년 거칠부와 함께 죽령 이북 고구려의 10군(郡)을 탈취하러 출정할 때
관등이 제5등 대아찬이었는데 비문에서는 제6등 아간(阿干:阿飡)으로 나오므로
비의 건립연대를 550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적성비에서는 '국법'(國法), '적성전사법'(赤城田舍法) 등의 용어가 나오므로
당시 신라 국가율령제의 내용과 함께
적성지방의 토지 또는 수취에 관한 법률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인물에 소녀(小女)·소자(小子)·자(子)·여(女) 등의 구분이 나오는데,
이는 정(丁)·정녀(丁女)가 되기 이전의 연령층으로 생각되는 만큼
신라가 일정한 기준 하에 인구를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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