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산 영국사 기행 제2부 영국사의 보물과 전각

2019. 2. 8. 22:33국내 명산과 사찰




천태산 영국사 기행 제2부 영국사의 보물과 전각


남고개를 내려와 영국사 경내로 들어오면, 탑비(塔碑)와 두 개의 승탑(僧塔)을 만난다.

탑비는 원각국사비(圓覺國師碑)이다. 2개의 승탑은 원각국사비 뒤편에 있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본다면 극락보전에서 50m 정도 떨어진 얕은 언덕에 있다.




 

<탑비(塔碑)>불문(佛門)에서는 승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사리(舍利),

즉 유골(遺骨)을 돌로 만든 묘탑(墓塔)에 안치하는데,

이를 부도(浮屠) 또는 승탑(僧塔)이라 부른다.

탑비는 이러한 부도와 함께 조성되는 것으로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일생의 행적을 적은 것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신라·고려시대에는 역대 국왕이 고승(高僧)들을 존경하여

그들이 사망하면 장사를 후하게 치르고, 아울러 시호(諡號)와 탑명(塔名)을 내리면서

당시를 대표하는 문신과 명필에게 비문을 짓고 쓰게 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승탑(僧塔)>고승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한 석조물이다.

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는 반면, 승탑은 사찰 밖에 있다.

부두(浮頭포도(蒲圖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원래는 불타(佛陀)와 같이 붓다(Buddha)를 번역한 것이라 하고

또는 솔도파(率屠婆, stupa), 즉 탑파(塔婆)의 전음(轉音)이라고도 한다.

어원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이나 불탑이 바로 부도이며,

 더 나아가 승려들까지도 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묘탑,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실례는

 신라 하대부터 보이고 있다. 872(경문왕 12)에 건립된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의 비문 중에

 기석부도지지(起石浮屠之地)”라는 구절은

승려의 묘탑이 곧 부도라고 일컬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원각국사비 뒤쪽에 두 개의 승탑이 있다.

하나는 석종형이고, 하나는 구형이다.


 

<원각국사비>

@보물 제534호로 지정된 원각국사비는

전체 높이 371, 비신 높이 165, 너비 78, 두께 13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전하나,

점판암의 비신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귀부는 전형적인 고려 양식으로 둔중하다.

이수에는 형식적인 운룡문이 새겨져 있고,

앞면 가운데에는 圓覺國師碑銘(원각국사비명)’이라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어 있다.



 

@원각(圓覺)국사의 본명은 덕소(德素, 1119~1174)이며,

고려 중기의 승려로 속명(俗名)은 전자미(田子美), 자는 혜약(慧約).

어머니는 남원군부인 양씨(梁氏)이다. 명종 때의 왕사(王師)이며, 천태학의 대가이다.

 천태종으로 출가하여 국사에까지 오른, 첫 인물이다. 원각(圓覺)은 그의 시호(諡號).


 

원각국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선사·대선사가 되었던 명승으로,

1174(명종 4)에 입적하자, 왕은 그의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하였다.

비문에는 찬자(撰者서자(書者)와 건립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대동금석서에 의하면 찬자는 한문준(韓文俊)이며

건립 연대는 1180년이다. 글씨는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로,

당시 성행한 사경(寫經)의 영향이라고 본다.

비의 뒷면에는 원각국사 문도들의 직명이 새겨져 있다.



정면

(뒷면)  

@국사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면,

9세 때 의천(義天:문종의 아들. 1055~1101)의 제자로

국청사(國淸寺)에 있었던 교웅(敎雄)에 의하여 득도하였다.

교웅은 덕소가 천태종을 융성하게 할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하루는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가 장경함을 열고 경전을 보다가

 문득 그 뜻을 통달하였다고 한다. 인종도 그의 자질에 감탄하여

뒷날 반드시 대법사가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 뒤 1142(인종 20) 울주(蔚州)에 있는 영축산(靈鷲山)에 머무르며 많은 학승을 지도하였다.

1153(의종 7) 선사(禪師)가 되었다가 곧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1170년 왕사가 되었다가 55세에 서쪽을 향하여 앉은 채 입적하였다.



@원각국사의 사후에 문하에서 천태의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선사의 법계를 받은 승지(承智)를 비롯하여 재사(再思담요(曇曜의윤(顗胤신수(神秀)

 1,200명의 제자가 나와 고려 천태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영동 영국사 구형승탑(永同 寧國寺 球形僧塔)은 고려 시대의 승탑으로,

199615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영국사 내의 원각국사비(보물 제534)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사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탑의 기단부(基壇部)는 네모난 바닥 돌 위로 8각의 아래 받침돌을 세우고,

역시 8각의 위 받침돌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아래 받침돌은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위가 반듯한 위 받침돌은 밑으로 한 겹씩의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신(塔身)의 몸돌은 둥근 공 모양이며,

지붕돌은 8각으로 여러 조각이 생략되어 밋밋하고 투박하다.

지붕돌 위로는 꽃봉오리 모양을 한 머리 장식을 올려놓았다.

각 부분의 조각들이 생략되거나 간략화되고,

연꽃잎이 한 겹으로 되어 있어 고려말·조선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원각국사비 뒤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원각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동 영국사 석종형승탑(永同 寧國寺 石鍾形僧塔)

199615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영국사 내 원각국사비(보물 제534) 뒤쪽에 서 있는 승려의 사리탑으로,

모셔진 사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네모난 바닥 돌 위에 마련된 기단(基壇)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8각이다.

기단의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아래·위 받침돌에는

 각기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는데 꽃잎은 모두 한 겹씩이다.

 그 위로는 종 모양의 탑신(塔身)이 올려져 있는데,

그 위의 머리 장식조차 종을 매달 때 쓰이는 고리를 떠올리게 하여 실제의 종과 거의 비슷하다.

 

바닥 돌에서부터 머리 장식까지 모두 6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종형 부도이면서도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연꽃잎도 모두 한 겹으로 표현되어 있어 고려말·조선 초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뒤편으로는 원각국사비가 서 있어서, 원각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부가하면 탑비의 일종인 석종비(石鐘碑)는 종()모양을 하고 있다.

석종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일반 부도와 달리

 몸체를 범종(梵鐘) 모양으로 만든 사리탑을 말한다.

이 석종형 부도는 고려말에 출현하여 이후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되었던 것으로

이전의 부도와 의미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석종비도 탑비의 한 가지이다.

초기의 예로 묘향산의 안심사지공나옹사리석종비(1379),

여주의 신륵사보제존자사리석종비(1379),

양평의 사나사원증국사사리석종비(1386) 등이 있다.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대웅전과 같이 정면 3,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이다.

<극락보전의 관지는 < 경인춘천호월서>이다. 호월스님의 작이란 의미다.

극락보전의 주련은 선운사 도솔암의 극락보전의 주련과 같다.

이 주련은 아침예불게송 중 아미타불찬불게에서 인용된 것이다.

 

<극락보전 주련>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서방정토 극락세계 만월같은 아미타불

금색신과 옥호광명 허공세계 비추시네.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 부르오면

찰나 간에 무량공덕 원만하게 이루리라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




관음보살

아미타불


대세지보살








대웅전은 면 3,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 건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3출목(三出目) 7포작(七包作) 전각이다.

대웅전은 목조의 와즙[瓦葺 : 기와잇기]이고

천태산(天台山)을 배경으로 해서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되어 있다.

130높이의 석축 위에 여러 차례 불타고 허물어져서 중창한 나머지,

신라·고려 시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조선 중기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대웅전 안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있다.

 삼존불 뒷벽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있다.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서쪽 벽에는 신장탱화(神將幀畫), 동쪽 벽에는 삼장탱화(三壯幀畫),

뒤쪽에는 칠성(七星독성(獨聖상단정신조성탱화(上壇精神造成幀畫)가 걸려있고,

동쪽 앞편에 동종(銅鐘)이 놓여 있다.

이 건물은 1980년 해체, 복원되었다.

#신좌을향: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 신방(辛方)을 등지고

을방(乙方)을 바라보고 앉은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본존 뒤의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걸었다.

원래는 이곳에 1772(영조 48)에 조성한 영산회상도(보물 제1397)가 걸려있었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는 모양이다.

현재 이곳에 걸려있는 영산회상도는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신중탱


칠성탱


범종










<영국사3층석탑>

보물 제533호로 지정된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일반형 석탑으로서,

2중 기단 위에 3층으로 만든 몸돌을 세운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원래 옛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 조사가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고,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향하고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있는 이 탑은 2중 기단 위층과 아래층 돌이 바뀌어 있어,

옮겨 세울 때 잘못 복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륜부의 각 구조물에 쓰인 재료는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통일신라 말기의 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탑은 영국사 대웅전 앞에 서 있으며 높이 3.15m

이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 장식을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위층 기단의 무늬는 모서리까지 침범할 만큼 크고 넓다.

기단 맨 윗돌에는 네 모서리 끝부분에서 약간의 추켜올림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각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놓았으며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있는 문짝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올려진 상태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각 4단씩이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같은 돌로 이루어졌으며 초층 탑신부에 문비(門扉)가 조각되었고

 자물통과 원형 문고리도 나타나 있다. 층옥개석 정면 중앙에는 찰주공(擦柱孔)이 있다.

 

상륜부는 각각 한 돌로 악화·보륜.보게. 수연 등이 남아 있으나 노반은 없어졌다.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하여 조형 미술품의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도 간략화되던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성각은 근에 조성된 모양이다.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하고 있다.






<심검당, 다로경권, 조사전, 영국사>

극락보전 아래 별채로 <>자 모양의 전각에는 심검당(尋劒堂),

조사전(祖師殿), 다로경권(茶爐經卷), 영국사(寧國寺)라는 4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만세루>

만세루(萬歲樓)라고 하는 누각의 유래를 보면 중국 진()나라 때에

윤주 자사(潤州刺史) 왕공(王恭)이 양쯔강(揚子江) 근처

윤주의 성벽 서남쪽에 세운 높은 만세루에서 비롯된다.

불교 전각에서의 만세루는 부처의 설법이 만세를 누린다는 뜻으로

사찰의 법회나 법당의 주요행사를 열릴 때 사용하던 누각에 붙여진 것이다.

영국사 만세루는 전면 5, 측면 3칸의 2층으로 된 루(). ()는 벽이 없는 전각이다.

2001년경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영국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223, 수령은 천 살 정도로 추정되며 가지는 2m 높이에서 갈라졌으며,

동서 방향으로 25m, 남북 방향으로 22m 정도 퍼져 있다.

서쪽 가지 중 하나는 밑으로 자라서 끝이 땅에 닿았는데,

여기서 자라난 새로운 나뭇가지는 높이가 5m 이상이나 되고,

가슴 높이의 지름이 20cm가 넘는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가을에는 이 나무와 주변의 경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각 부분의 상처가 커져서 작은 굴이 생겼으므로,

1979년 외과수술을 실시함과 동시에

약화한 가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1개의 지주를 세웠다.

부분적으로 수술을 실시한 곳은 85군데이고 죽은 가지를 잘라낸 것은 81군데였다.

출처: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천연기념물편(문화재관리국,1993]




~제3부 영국사 망봉탑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