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29. 21:23ㆍ국내 명산과 사찰
안암동 개운사(開運寺)
보타사를 나와 개운사를 들렸다.
개운사와 보타사는 전철로 이동하기 참 쉬운 도심 속의 사찰이다.
6호선 전철을 타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오니 4~5분 거리다.
보타사에서 금동관음불을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개운사에 들리자마자 일주문 옆의 관리실에 물어보았다.
“미타전의 아미타불을 참배할 수 있느냐”고.
필자가 다녀 본 인지도가 낮은 사찰에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
특히 비구니들이 운영하는 사찰은 법당문이 닫혀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러느니 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다.
개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1396년(태조 5) 무학(無學)대사가 현재 위치에 창건하여 영도사(永導寺)라고 하였으며,
1779년(정조 3) 정조의 후궁인 홍빈(洪嬪)의 묘 명인원(明仁園)이 절 옆에 들어서자,
인파당 축홍(仁波堂竺洪)이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라 개명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寺記)」라는 문헌에는 영조 6년(1730년)에 영도사를 이미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개운사가 언제 명명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개운사의 홈피에 나온 당우와 사력(寺歷)을 보면,
1873년(고종 10) 명부전을, 1880년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12년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로 지정되었고
김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하였다.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을 개설하였고
1929년 권범운(權梵雲)·신영산(申靈山)이 독성전을 중건하였다.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짓고, 1935년 권범운이 칠성각을 지었다.
1980년 이전에는 조계종 종정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총무원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1993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현재 경내에는 1981년 이전해온 승려들의 교육기관인 중앙승가대학(中央僧伽大學)을 비롯하여
대웅전·지장전(地藏殿)·칠성전·독성각(獨聖閣)·종각·선방(禪房)·자비관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선방은 서울근교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대각루(大覺樓)라는 명필 현판이 걸려 있다.
대각루
(석수노가)
산 내 암자로는 동쪽 200m 지점에 대원암(大圓庵)과 칠성암이 있다.
1845년(헌종 11) 우기(祐祈)가 창건한 대원암은 근대의 고승인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 석학들을 배출하였고,
1970년대에는 선사 탄허(呑虛)가 주석하면서 역경 사업에 종사한 곳이기도 하다.
범종루
대웅전을 마주보고 있는 당우 3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우로부터 <사해백련>, <개운사>, <분다리가>
분다리가는 백련화를 의미한다.
대웅전에서 바라 본 미타전
미타전에는 보물 제1650호 목조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개운사 미타전에 봉안된 목조 아미타불좌상은 조성 원문에 의하면,
원래 충청남도 아산 축봉사(縮鳳寺)에서 13세기에 조성된 불상이며
1274년(고려, 원종 15)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유물은 조성 및 개금기 3점을 비롯해 모두 41종 58점이나,
16종 33점만이 2009년 11월 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4월 23일 복장유물과 함께 보물 제1649호로 지정되었고,
같은 날 추가된 복장유물과 함께 보물 제1650호로 다시 일괄 지정되었다.
불상의 높이는 118cm, 무릎너비는 92cm,
재질은 목조개금으로 제작연대는 13세기(1274년 이전)이다.
대좌와 광배를 잃어버렸지만, 불신만은 완전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머리는 육계가 크고 나발이 촘촘하며 중앙계주도 큼직한 것이 봉림사 아미타불상과 상당히 유사하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단아한 편으로, 이마가 넓고 턱은 뾰족하며 가는 눈과 코,
작고 단정한 입은 얼굴 중심부로 몰려 있는데,
역시 봉림사 불상 얼굴과 거의 동일한 편이다.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불상의 체구는 단아하면서도 당당하다.
어깨의 곡선이나 가슴, 허리, 무릎의 양감은 세련미 넘치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오른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의 하체가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보이도록 외장하고 왼손은 허리까지 들어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면서
엄지와 중지를 모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 변형을 짓고 있는 수인(手印)으로,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문수사 아미타불좌상,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의 아미타불상 등
대부분의 고려 후기 아미타불상 수인과 유사하다. 손가락은 가늘고 길어 수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통견(通肩) 의(衣)를 입은 불의(佛衣)는 신라 불의보다는 두터워졌지만
양감을 뚜렷이 표현할 정도로 비교적 얇은 편이다.
통견한 대의(大衣)는 양쪽 어깨를 다 덮었지만 가슴은 거의 노출된 상태이며
왼쪽 어깨는 밖으로 접혀 층단을 이루었고 이 아래에서 팔로 내려간 옷은
여러 줄의 주름이 타이트하게 잡혀 팔굽에서 Ω자를 이루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왼쪽 어깨 뒤로 넘어간 자락이 반달형을 이루고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중 착의의 대의(大衣) 끝자락일 것이다.
하체는 대의(大衣) 선이 간략화되었는데
왼무릎에는 옷자락이 구불구불한 삼각형을 이루면서 내려오고 있다.
가슴 아래에 표현된 승각기(僧却崎)는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띠 매듭이 없는 것이 당시의 다른 예들과는 다른 편이다.
이런 전체적인 형태는 봉림사 아미타불상이나 개심사 목아미타불상
또는 수국사 목아미타불상 등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 등이 모두 일치하고 있다.
이 불상의 복장에서 다량의 복장물이 발견되었는데
1274년 불상 중수기와 많은 불교전적, 다라니 등 고려 불상 연구는 물론
고려 불교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불상으로 크게 중요시되고 있다.
이 목불상은 1274년의 중수기를 가지고 있어 고려 후기 복장이 나온 장곡사 금동약사불상이나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 등에 비견할 수 있는 귀중한 불상이다.
1200년경 전후의 목불상을 대표하는 고려 아미타불상일 뿐 아니라
형식과 양식, 복장물 내용에서도
고려 목불상의 가치를 알려주는 대표적 걸작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판단된다.
@보물 제1650호로 지정된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에서 나온 복장전적은
1995년 무렵 개운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아미타불좌상에서 발견된 것이다.
복장유물 수습 당시 같이 봉안되어 있던 지장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가 도난을 당한 상태이고,
아미타불상 또한 복장공이 개방되어 사리장치가 든 후령통 등은 이미 도난을 당해 일실 되었다.
수습 당시 복장품은 모두 17종으로 추산하였나,
근래에 납입한 직물류를 제외한 지류 복장유물은 고판경이 15점,
고사경 7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가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이며,
복장발원문 3점 등 총 41점에 이르고 있다. 이 중 화엄경 전적은 모두 20점에 이른다.
@@불상, 조성기 및 개금기 3건은 보물 제1649호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으로,
『대방광불화엄경』 사경 7건, 『대방광불화엄경』 인본 15건 등 총 25건은
보물 제1650호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으로 등재되었다.
그 외 나머지 16건의 절첩본인경(折帖本印經) 1건, 선장본인경(線裝本印經) 4건,
목판인경(木版印經) 2건, 다라니인본(陀羅尼印本) 8건,
기타 복장물 1건 등 16종 33점이 여기에 해당된다.
참고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표된 김연삼의 글을 추가한다.
높이 1.18m. 왼손을 평행되게 처리하여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손모양을 취하고,
길상좌(吉祥坐 :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은 다음에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놓은 모습)를 하였다.
어깨를 약간 움츠리면서 앞으로 머리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배를 내밀고
무릎을 직각으로 세워 다소 당당하게 보이는 체구이다.
둥근 얼굴에 이마는 좀 넓고, 턱을 짧게 하였으며,
눈·코·입을 얼굴 중심부로 몰아 오밀조밀한 느낌을 준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는 왼쪽 어깨에 네 가닥의 옷주름이 표현되었고,
여기서 팔로 내려간 일곱 줄의 옷주름으로 번잡해진 Ω형 주름이다.
또, 무릎 앞면과 왼쪽 무릎에 팔의 소맷자락이 늘어져 있으며,
승각기의 치레와 띠매듭이 사라지고 주름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경기도 화성시 봉림사(鳳林寺)의 목조아미타불좌상(1362년, 보물 제980호)과 거의 흡사한데,
물론 얼굴의 도금이 후보(後補)한 것이어서 봉림사의 불상만큼 단엄하게 보이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또, 재료는 나무가 아니라 베[布]에 칠을 한 건칠불이라는 것이 봉림사의 불상과 다르다.
계단면에 새겨진 <조고각하>. 필자가 애호하는 경귀라서...
대웅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다.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범종
법고
아미타내영도
삼성각인데 3개의 편액을 따로 조성했다.(산령각/금륜전/천태각)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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