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2. 17:16ㆍ국내 명산과 사찰
여주석불기행(2) 포초골미륵좌불(彌勒坐佛)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 시대의 유산으로 많은 석불이 발견되고 있지만,
상중하 3단으로 된 연화대좌 위에 봉안된 미륵보살 석불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손꼽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된 석굴암 불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뚜렷하게 알려진 것이 없는 데
여주에는 2기나 발견 보존되어 있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중 하나가 포초골미륵좌불이다.
@대성사는 일주문이 없고 입구는 포대 화상이 반기고 있다.
포대 화상의 형상은 외형은 비슷한데 인물상이 여느 사찰에서 보는 포대 화상과는 아주 다르다.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여주 포초골 미륵좌불(彌勒坐佛)은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외평리454-1, 대성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불상이다.
대성사는 여주지역에 있는 원적산(해발. 567m)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 법상종의 소속인 사찰로, 포초골 미륵좌상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사찰의 창건은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고려 초기 전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1819년(조선 순조 19)까지는 존재했으나 그 뒤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대성사는 1939년 비구니 최주희(崔珠嬉)가 이곳 포초골에서 수행하던 중
미륵이 나타난 꿈을 꾸고 원적산 골짜기에서 지금의 미륵좌상을 발견하여 법당을 짓고,
1941년 법당을 지으며 중창한 것인데,
1952년에는 요사 2동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절 이름을 대성사로 바꿨다.
1995년 학산(鶴山)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래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삼성각·요사 2동이 있다.
범종각
극락보전이 대성사의 대웅전이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그런지 연등이 많이 달려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5층 석탑과 2기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오래된 것은 아니고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극락보전 옆쪽 전각이 미륵좌상이 있는 용화전이다.
@극락보전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좌우 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좌측에 지장보살을 모셨다.
사력(社歷)이 길지 않아서 그런지 닫집의 단청과 불상들이 화려하다.
우측에는 신중탱을 봉안했다.
대성사 극락보전은 불상 뒤에 별도의 탱화를 봉안하지 않고 소불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관음불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지장보살
@대성사 극락보전의 신중탱이다. 신중탱의 기본 축은 제석천, 범천,
위태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때때로 대자재천과 예적금강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려한 형태의 신중탱은 대개 3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1)대예적금강을 중심으로 좌측에 제석천, 우측에 대범천을 대칭하고
아래에 동진보살과 주위에 성군(星君), 명왕(明王), 천녀(天女)등을 배치하는 경우
2)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3)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팔부신장과 십이지 신장을 배치하는 경우,
이 경우를 신장(神將) 탱화(幁畵) 라 한다.
그런데 대성사의 이 신중탱은 조금 특이하다. 예적금강이 위치할 자리에 여래를 두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신중탱의 예적금강의 모습은 19세기 초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운
험상궂은 얼굴에 손에는 금강저를 들거나 공수인(拱手印)을 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예적금강은 얼굴 3개에 눈도 3개이며
이를 드러내며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다.
8개의 팔을 갖고 있으며 손은 합장을 하거나 금강령, 뱀, 부적, 칼, 밧줄,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또한 온몸을 불에 휩싸이게 그려 보다 극적으로 분노존(忿怒尊)을 표현하기도 한다.
극락보전에서 바라 본 범종각과 5층석탑.
용화전은 미륵좌불을 모신 전각이다. 용화전(龍華殿)이란 이름은
앞으로 미륵불이 태어날 곳이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로.
이곳에서 미륵불이 설법하는 것을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 부르게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용화전은 장륙존상을 모신다고 해서 장륙전이라고도 하는데
법당 안에는 도솔천에서 설법 중인 미륵보살을 봉안하거나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게 될 미륵불을 봉안하는데, 한국에서는 미륵불을 주로 봉안한다.
용화회상도를 후불탱화로 봉안하는데 이는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상징하는 것이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금산사 미륵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성사 용화전은 극락보전 뒤에 미륵좌불만을 모신 사방이 트인 전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포초골미륵좌상은 전체 높이(대좌 포함) 2.4m. 불상 높이 1.7m.
포초골에 전해지는 석불좌상을 1941년 지금의 대성사에 봉안하여 오고 있다.
이 불좌상은 부근에서 발견된 비석 파편에
‘嘉慶二十四年 化主幼學田錫元…(가경24년 화주유학전석원…)’이라고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는 순조19년(181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불상의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보면 그보다 훨씬 이른 고려 전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천개(天蓋)를 쓰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머리 위의 갓 모양을 한 이러한 형태를 천개(天蓋), 산개(傘蓋), 화개(華蓋), 현개(縣蓋)라고도 한다.
이러한 조형물의 시원은 멀리 인도에서 비롯되며
그 목적은 햇빛이나 비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도구인 일산(日傘)에서 출발한 것인데
점차 신분의 직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변화했다.
불교가 발전하면서 부처나 보살의 머리 위에 장식물로 이용되면서
광배와 함께 불상을 장엄하는 데 활용되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보개가 닫집으로 발전하여
불상 위의 장엄 요소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에서는
건물 안에서도 보개가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태로는 4각형, 6각형, 8각형, 원형으로 다양한 데
포초골미륵좌상의 천개는 4각형으로 연화장식이 부도되어 있다.
양감(量感) 있는 둥근 얼굴에는 내리뜬 눈, 작은 입이 비교적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소발(素髮)이다.
신체 역시 얼굴과 마찬가지로 양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다소 투박한 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각 부분의 조각이 비교적 정제되어 있다.
양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 위에 놓고 있다.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고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다.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불의(佛衣) 안에는 띠 매듭이 선명하며
어깨에서 팔로 돌아 흐르는 불의 주름이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나누어진 8각 연화좌이다.
원형의 상대(上臺)는 연꽃무늬가 이중으로 돌려져 있고
각 연꽃잎 안에는 꽃무늬가 있다. 8각의 중대(中臺)는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안에는 보살상이 양각되어 있다.
(안상(眼象)이란 불상의 대좌나 석등, 석탑, 목조건축 등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연화문과 함께 많이 쓰이는 문양을 일컫는 말이다.)
하대(下臺)는 현재 마루 밑으로 들어가 있어 세부 파악이 어렵다.
하지만 역시 원형이며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의 연꽃무늬가 있다.
이 같은 특징의 대좌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특히 유행하던 것이다.
이처럼 대좌에서뿐만 아니라 불상에 있어서도 안정감 있는 모습,
신체 각 부분과 불의 주름의 비교적 사실적이고 정제된 조각 수법 등에서
통일신라의 양식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머리 위에 얹힌 사각형의 천개(天蓋), 당당하지만 투박함을 면치 못하는 하체의 표현,
대좌의 연꽃무늬 등은 이 불좌상을
고려 초기의 거불(巨佛) 형식을 잇고 있는 고려 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게 한다.
삼성각
대성사의 이 삼성각은 옛 산신각을 중건하면서 삼성각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산신각은 예로부터 우리조상들은 산악 숭배 관념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찍부터 신성한 곳으로 믿어지는 산에 제사를 드리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라 때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다섯 산, 곧 동 토함산, 남 지리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을 오악(五岳)으로 지정하여
국가가 주재하는 제사를 올렸으며 이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전통신앙의 산악 숭배가 사원 내부에 자리잡은 것이 산신각이다.
(산신탱)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이나 유물이 조선 전기로 올라가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사원의 규모 유지와 발맞추어 불교 이외의 신앙들을 흡수해 들일 때 수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미 수나라 때에 천태산 국청사에 가람의 수호신으로 산왕각(山王閣)을 두었고
당대에는 산지가람에 산왕을 다투어 봉안하여 도량의 외호를 기원하였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경우도 보다 이른 시기에 산신 숭배 신앙을 사원에서 수용해 들였을 것이다.
산에는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우리의 머리 속에 호랑이의 위력을 당해낼 짐승은 없다.
그래서 산신은 곧잘 호랑이와 같은 범주로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의 위세도 많지만 사람을 보호하고 덕을 주는 존재로 비친 경우도 많다.
이렇게 호랑이와 산신을 나란히 그린 것이 산신탱이다.
허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인상의 산신이 비스듬히 선 소나무를 배경으로
인자한 표정으로 엎드린 두마리의 호랑이를 기대고 앉아 있다.
구도가 간단하고 세부 묘사도 치밀하지 못한 데다
색조도 적록(赤綠) 주조에 청색이 섞여 일반 불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독성탱
산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탱화의 주인공에 나반(那畔)존자가 있다. 독
성각에 봉안되어 독성탱(獨聖幀)으로 불리는 이 탱화는
빈두로(賓頭盧) 존자라고도 부르는 나반존자가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석가모니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에 있는 천태산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부처가 열반에 든 후에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천태존자라고도 한다.
수도하는 형상으로 인해 기도의 효력이 잘 나타난다고 자주 찾는 전각이기도 하다.
역시 조선 후기에 사원의 한 구성 요소가 된 독성탱은 산신탱·칠성탱과 합쳐
삼성각(三聖閣)이라 이름 붙인 전각에 함께 봉안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 비불교적 성격을 지녔던 것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깊은 산중에서 홀로 수도하는 수도자의 맑고 고결한 인상이 친근한 산수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탱화이다.
@칠성탱
산신과 독성과 나란히 칠성이 봉안된다. 칠성(七星)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말한다.
밤하늘에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일곱 별자리로서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였기에
칠성은 별들의 대표이자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모두 지배하는 하늘의 주재신으로도 여겨졌다.
이를 수용해 들인 불교에서는 칠성이 천재지변을 관장하고 재앙을 물리치는 신으로 생각되었으며
난리와 질병도 다스리고 자식의 생산에도 힘이 미치는 것으로 여겼다.
도교에서는 또한 사람의 수명을 이 북두칠성이 관장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후사를 잇고자 하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바람은
이 칠성신을 불교에 수용해 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당대에 칠성을 맡는
도교의 칠원성군(七元星君)을 7여래로 변용시키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하여금 이들을 주재하도록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북두칠성연명경(北斗七星延命經)』에서는 일체중생의 중죄를 소멸하는 것이 북두칠성의 위신력이고
대소 생명이 모두 북두필성의 소관이라 한다. 그래서 이런 경전을 읽고 공양하면
지옥에서도 극락으로 구제되고 살아서는 질병을 없애주고
재산을 보전해주며 자식을 만들어주고 모든 재난을 없애준다고 설한다.
수각
수각 위쪽에 있는 불상인데 보합을 쥐고 있는 것으로 약사여래로 보인다.
옛것으로 보이는 데 안내서가 없어 언제 조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수각쪽에서 바라 본 극락보전
석등
자루 위에 동자상을 한, 참 독특한 포대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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