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석불기행(1) 계신리 마애여래입상

2018. 5. 9. 23:57국내 명산과 사찰




여주석불기행(1) 계신리 마애여래입상

 

찬란한 신라불교 문화의 유산을 이어받은 고려는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

 고려 왕권 중앙의 유물은 널리 알려졌지만 석불, 철불, 마애불 등 지방의 문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방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다. 일례로 파주 용미리 마애불처럼

거대하기는 하지만 조형미, 예술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고려 중앙집권세력의 유산에 가려 알려지지 않는 이러한 지방 문화도

역사적 의미는 당연히 고찰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비록 예술미가 떨어지고

신라의 불상처럼 정교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그 시대적 불교 역사를 조감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난번 충주지역의 철불을 탐방을 시작으로 이어서 여주의 특별한 석불들을 둘러 보기로 했다.

 

사실 고려 시대의 석불(石佛)은 여러 지역에서 많이 산재해 있지만,

관리도 부실하고 또한 마모가 심하기도 하지만 목조불이나 청동 내지 금동불에 비하여

불자들에게도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석불이나 마애불의 경우는 돌이라는 그 속성상

대개 전각 안에 봉안되기보다는 옥외에 보존하였기 때문에 비바람에

마모가 가속되어 온 것도 세인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한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석불은 석불로서 불교 문화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어

옛 시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불교 문화를 조감하는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석불 중에서도 상중하 세 부분으로 8각형 연화대좌 위에 봉안된

고려 시대의 석불은 흔하지 않은 데 유일하게도 여주지역에 2기나 발굴 보존되어 있다.

하나는 포초골미륵좌상이고 다른 하나는 도곡리 석조여래좌상인데

포초골 미륵 좌상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계산리 마애석불입상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와

방향을 바꾸어 먼저 들러 보기로 했다.

포초골미륵좌상과 도곡리 석조여래좌상은 2부와 3부에서 포스팅한다.


진입로는 비포장도로로 협소하지만 석불사 앞 마당은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여주(驪州) 계신리(桂信里)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계신리에 있는 고려 전기의 불상으로

 <부처울>이라고 불리는 마을의 암자인 석불암(石佛庵) 부근에 있다.

부처울이란 지역은 강원도에서 흘러온 남한강 물줄기가

양평과 양수리, 서울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옛적 석불암은 이정표에서만 나와 있고 정작 요사채는 석불사로 되어 있다.


석불사(구명: 석불암)의 전각은  작은 법당과 요사채 하나가 전부다.


석불사는 아직 어느 하나 전각다운 전각은 갖추지 못했다.

주차장 마당에서 바라 본 대웅전이다.















마애불로 내려가는 길은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돌계단으로 굉장히 협소하다.




계산리 마애여래입상은 남한강이 바라다보이는 강변에 높이 4.5m, 넓이 2m 암벽에 양각(陽刻 )되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으며 석불 높이 2.23m

원형의 두광(頭光: 부처나 보상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

 대좌(臺座)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상태도 아주 양호하다.



얼굴은 넓적한 방형(方形: 네모반듯한 모양)이며 뺨에는 살이 많다.

··입은 정제되어 있어 원만한 얼굴 모습을 이루며, 귀는 길어 어깨에 이른다.

약간 짧은 듯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분명하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큼직하다.

넓은 어깨 위에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불의(佛衣)가 걸쳐져 있으며,

양쪽 팔을 감고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 사이의 U자형 주름과 내의 띠 매듭,

 왼쪽 어깨 부분의 佛衣를 고정하는 고리 등의 표현이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을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왼손은 옆으로 내려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光背: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

3중의 두광만을 마련하고 있는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으로 새겨진 연화좌(蓮華座) 위에는

 양쪽으로 넓게 벌린 발이 낮은 부조(浮彫: 돋을새김)로 표현되어 있다.

양감 있는 얼굴, 당당하지만 다소 경직화된 신체,

불의 안의 띠 매듭, 왼쪽 어깨 위에 불의를 고정시키는 고리 장식 등의 표현은

같은 여주시에 있는 포초골미륵좌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과 비견된다.










이 작품은 건장한 신체, 유려한 옷 주름, 세련된 연꽃 대좌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당대의 수작(秀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얼굴과 하체 등 신체 각 부분에서 보이는 다소 형식화되고

경직된 듯한 느낌은 포초골 석불좌상과 같은 시기인 고려 시대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석불사의 유일한 전각인데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불로 모셨다.



신중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