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등운산(登雲山) 고운사(孤雲寺)(1/2)

2018. 4. 30. 22:03국내 명산과 사찰



의성 등운산(登雲山) 고운사(孤雲寺)(1/2)


명산고찰로 알려진 사찰들의 입구는 대부분 상가들로 요란스럽지만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 자락에 아래에 있는 고운사는

입구에서부터 옛 시골집 고향을 찾아가듯 고즈넉한 풍경을 느끼게 하는 사찰이다.

뿐만 아니라 경내 대부분의 전각도 퇴색된 단청이 더욱 옛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의성 등운산(登雲山) 고운사(孤雲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신라 신문왕 1(681)에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창건하였다.

 부용반개형상(芙蓉半開形象)이라, 연꽃이 반쯤 개화된 형상을 한

이 곳에 위치한 고운사(孤雲寺)는 의상대사가 창건할 때는 사찰명이 고운사(高雲寺)였다.


 

고운사(高雲寺)가 아닌 고운사(孤雲寺)로 개명된 것은

신라 말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 대사, 여사(如事)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축한 이후

 최치원의 호인 고운(孤雲)’을 빌어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일주문도 창건 이후 개축(改築)된 것이라

<등운산(登雲山) 고운사(孤雲寺)>로 편액되어 있다.




@고운사의 사력(寺歷)은 헌강왕 때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 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 국사(道詵 國師)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5법당 10방사(五法堂 十房舍)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藥師殿)의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

나한전(羅漢殿) 앞의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은 도선국사가 조성하였다 한다.



1018(현종 9) 천우(天祐)가 대웅전·약사전·극락전·적묵당(寂默堂설선당(說禪堂

동별실(東別室서별실(西別室관음전·금당(金堂백련당(白蓮堂회운당(會雲堂

청풍당(淸風堂문수전(文殊殿양로당(養老堂백련암(白蓮庵) 등을 중창하였다.

극락전에 봉안한 관음상은 천해(天海)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불상을

송도 대흥산(大興山)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1482(성종 13) 석가여래불상을

안동 갈라산(葛羅山) 낙타사(駱駝寺)에서 옮겨 와 대웅전에 봉안하였으며,

1646(인조 24)소영(昭影)의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1668년극성(克成승묵(勝默덕종(德宗) 등이 가운루를 중수하였고,

처순(處淳)이 천왕문(天王門), 설행(雪行)이 봉황문을 신축하였다.




1670(현종 11)숭해(崇海묘선(妙善성준(性峻인준(印峻) 등이

 명부전을 신축하고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였으며,

 종헌(宗憲)과 설휘(雪輝)는 영각(影閣)을 짓고 영정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다.

1681(숙종 7) 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683년 관헌(灌憲

인잠(印岑선초(善初)가 팔상전(八相殿)을 신축하였으며, 16864월 명부전을 중창하였다.

 

1695년 도청(道淸)과 선조(禪照)가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이전의 관음상과 함께 삼존불상을 구비하였다.

행옥(幸玉)은 설선당을, 태운(泰運)은 적묵당을 중건하였고,

선특(禪特)과 성담(性談)은 동별실을, 성관(性觀)은 서별실을 중수하였다.

, 태눌(泰訥)은 청풍당을 중건하였고,

승하(勝下)는 응향각(凝香閣), 의율(義律)과 의잠(義岑)은 백련당을 중수하였다.


1724(영조 즉위년) 법존(法存지훈(智勳) 등이 운수암(雲水庵)을 창건하였고,

1729년 신유한(申維翰)이 사적비를 세웠다. 1744년 어첩봉안각(御帖奉安閣)을 건립하였으며,

1797년 의암(義巖)이 백련암을 중창하였다.

1803(순조 3) 4월 적묵당과 서별실이 화재로 불타 없어지자

18042월 문찰(文察)이 중건하였고, 1812년 의암이 운수암을 중건하였다.

 

1835(헌종 1) 2월 백련당·금당·관음전·군포고(軍布庫직사고(直舍庫

영전 등이 화재로 모두 불타 없어지자,

나라에서 홍종호(洪鍾浩)에게 명하여 만송(晩松호암(虎巖수열(守悅) 등과 함께

 대웅전과 금당을 중건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운수암이 불타 없어지자

1838년 함홍(涵弘)이 중건하였고, 1868년 눌암(訥庵) 등이 만성제(晩惺齊),

해송(海松)이 우의당(禹儀堂)을 건립하였다.

 

1899년 포운(抱雲혜은(惠隱) 등이

가운루·우화루·동별실·적묵당·연지암(蓮池庵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901년 만선(滿船)과 추산(悉山)이 운수암의 해운루(海雲樓),

1902년 연수전(延壽殿)을 건립하였으며, 1904년 포운 등은 금당을 중수하였다.



(고운사 일주문)

1906년 안동·예안·의성·지례·선산·금산·용궁·비안·군위·의흥·청송·진보·순흥·

봉화·영천군 등에 있는 사찰에 대한 관리를 종무원(宗務院)에서 부여받았다.

191230본산(本山)의 하나가 되었으며, 19132월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시행되면서 경상북도 내의 46개 사찰을 말사로 관장하였다.

 

1924년 주지 만우(萬愚)가 약사전을 중수하고 대정암(大定庵)을 창건하였으며,

1935년 주지 영호(泳鎬)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가운교(駕雲橋)를 만들었다.

1936년 명부전과 선열암을 중수하고 천왕문을 옮겨지었다.

또한, 1934년에는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였고,

안동 포교당·와룡 포교당·의흥 포교당 등을 두었다.


@고운사는 의성·안동·영주·봉화의 4개 시·, 54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명부전·금강문·가운루·적묵당·

우화루·동별실·서별실·금당·회운당·고운대암(孤雲大庵고금당(古今堂) 등 총 25동이 있다.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46호인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인 고운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고운사 가운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70호인 의성 고운사 연수전,

 사적비, 사보(寺寶)로 전해지고 있는 오동학촉대(烏銅鶴燭臺)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로 불타 없어진 후 중수된 가운루나

각각 18세기, 20세기에 세워진 사적비나 연수전과는

 달리 석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 대사(四溟 大師)가 승군(僧軍)의 전방 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였던 사찰이기도 하였다.

 1744(영조 20)에는 왕실의 계보를 간략하게 적은 어첩(御牒)을 연수전(延壽殿)에 봉안하면서

지방 사림의 침탈로부터 사찰을 지킬 수 있었고, 이후 사세(寺勢)는 번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불교 31 총본산의 하나였으며,

사찰에 강원(講院)을 개설하여 승려들을 육성하는 등 고운사의 전성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칸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었다.

 

8·15 해방 직후 토지 개혁으로 천석(千石)을 생산하던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면서

 사세가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비구승(比丘僧)과 대처승(帶妻僧)의 분규로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9년 주지 원광(圓光) 스님의 노력으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서 경상북도 의성군, 안동시,

영주시, 봉화군, 영양군 등 60여 대소 사찰들을 관장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으나,

1970년대에 사찰 건물 일부가 소실되어 규모가 축소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2년 대웅보전과 범종각 등을 새로 만들면서

양쪽 개울을 모두 메워 큰 마당을 만드는 등 주변을 정리하고

낡은 건물들을 수리 및 단청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찰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천왕문> 

1681년에 중수 기록이 있으며, 1688년 처순(處淳)이 신축하였으며,

1899년에도 중수한 것으로 전하는데 현재의 천왕문은 1936

명부전 중수와 함께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




비파를 든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칼을 든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창과탑을 든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불전의 약사불 좌상은

 자연석을 깎아 광배와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머리와 얼굴은

 전면이 절단, 망실되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양 귀는 짧게 표현하였으며, 손은 항마촉지의 수인을 하고 있다.




석불 옆에는 비석이 하나 보이는 데 옛적 이지역을 관할한 현령의 비인 모양이다.





@고운사는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신라 말엽 최치원(崔致遠)이 입산하여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대사(大師)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였다.  

흘러내리는 계류 위에 걸쳐 앉은 가운루는 누()형식의 건물로

조계문과 천왕문을 들어서면 서향한 정면이 바로 보인다.

이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리라 여겨지는데,

 1676(숙종 2)1717, 1899년 중수기록이 남아 있다.


 

건물의 전면과 양 측면은 판벽으로 구성되었고, 전면 중앙 3칸에는

가운데 설주가 있는 쌍여닫이 판창문이, 남측면에는 판문으로 된 출입문을 두었다.

 북측면의 동쪽 칸에 치우쳐서 누각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나무로 짜여 있고

 양여닫이 판문을 달아 누에 들게 하였다.

 

동향인 배면은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돌려 개방하였다.

계곡 바닥 암반에는 둥글고 긴 초석을, 지면에는 막돌 덤벙주초를 두어 누하주를 세우고

우물마루를 깔아 누상주를 설치하였다.

기둥은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으로 하였고,

 주두(柱頭)의 바깥쪽은 초익공으로, 안쪽으로는 초각된 보아지로 들보를 받쳤다.

그러나 건물 네 귀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2익공으로 짜여져 있다.

지붕가구는 5량가로 들보 위에 두꺼운 판재를 포개놓아 중도리와 종보를 받았으며,

종보 위에는 고졸한 모양의 화반과 첨차를 직교하여 마루도리를 올려놓았다.

 

(가운데 정면 전각은 범종각이고, 좌측은 우화루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특히 중기의 양식이 지배적이기는 하나

각 부분의 세부형식이 각기 다른 시대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1668년극성(克成승묵(勝默덕종(德宗) 등이 가운루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이 외에도 몇 차례의 중수과정을 짐작케 하고 있다.

 그러나 초익공계 건물에 귀기둥만 2익공으로 꾸민 점이나,

산지 가람에서 계류 위에 꾸민 누형식 등은 흔치 않은 예이다.

가운루는 정면 5,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화루(羽化樓)>

@ 의상대사가 연관된 사찰로 우화루라는 명명된 루()가 이 지역에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안동 천등산 봉정사의 우화루(雨花樓)이고 다른 하나는 의성 등운산 고운사의 우화루(羽化樓).

우화(雨花)라는 말은 <꽃비>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범천이 감응하여

아름다운 꽃을 향기로운 바람에 실어 내려보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어

사찰의 누각으로 우화루(雨花樓)란 전각을 짓기 시작했다.

 

고운사의 우화루(羽化樓)는 의상대사가 고운사(高雲寺)를 창건한 후

176년이 지나 신라의 고운 최치원이 여지(如智), 여사(如事) 두 대사와 함께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짓었는데

그로부터 최치원 호인 고운(孤雲)를 따 고운사(高雲寺)가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세월에 흐름에 따라 가허루(駕虛樓)는 가운루(駕雲樓)로 바뀌었고

우화루라는 누각명은 그대로였다. 우화(羽化)라는 말은 원래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방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번잡한 세상일에서 떠나 즐겁게 지내는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며,

술에 취하여 도연(陶然)한 모습을 일컫기도 한다.

신교(神敎) 또는 풍류도, 도교의 신선도 수행의 최고 경지를 일컫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이 날개가 돋아서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는 의미인데

고운사의 우화루(羽化樓)라는 누각명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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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대웅전 앞 마당에 설치된 수각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측에 문수보살, 우측에 보현보을 모셨다.

석가모니불

대웅보전의 주불 뒤쪽의 후불탱화(後佛幀畵)1887(고종 24)에 조성되었고,

서쪽 벽면의 탱화는 1892년에 조성되었다.



보현보살


문수보살



신중탱, 중앙에 위태천을, 그 위에 예적금강을 배치하고 있다.

예적금강(穢跡金剛)은 오추사마(烏樞沙摩)라 불리기도 한다.


고운사 역대 조사들의 영정

위첫줄은 청허 휴정대사와 사명당 유정대사,

 둘째줄은 함흥 치릉대사, 의상대사, 수월 영민대사,

 셋째 줄은 송원 혜민, 상운 우총, 미상승(未詳僧),

아래 줄은 도암 최서, 의산 정활, 성월 지순대사












고금당



나한전


협시불 없이 석가모니불만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 앞에 조성된 삼층석탑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현재 나한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으며,

아래층 기단에는 희미한 안상(眼象) 무늬가 보이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약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치켜 올림이 크지 않고,

 밑면에 1층은 4, 2·3층은 3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돌),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뒤집혀진 앙화(仰花: 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등을 올린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석재가 많이 닳아 있고, 아래층 기단이 특히 심하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줄어든 규모나 지붕돌의 조각양식 등에서 시대가 조금 내려간 모습들이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나한전을 내려오면서 본 대웅전


약사전


                           




@의성 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

삼층석탑과 더불어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 제246. 불상 높이 79cm, 대좌 높이 72cm, 광배 높이 134cm.

불신·광배·대좌가 모두 완전한 상태이다. 석가여래좌상은

원래 1482(성종 13) 안동 갈라산(葛羅山) 낙타사(駱駝寺)에서 옮겨 와 대웅전에 봉안하였으나

지금의 약사전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우견편단으로 법의를 입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굴암 본존상 계통의 상으로 오른손 끝이 떨어져나갔다.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불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네모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게 표현되었고

 이마에 백호공이 큼직하게 뚫려 있다.

불신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록하며 결가부좌한 다리의 폭도 넓어서 양감 있는 신체를 표현하고 있으나

 목을 짧게 조각해 자세가 움츠리고 앉은 듯 경직되어 있다.

법의는 몸에 밀착되어 있으며 옷주름이 얇은 층단형의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이다.


 

대좌는 3단의 8각연화좌로 이중연판이 큼직하게 조각되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것이 불신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조형과 상통한다.

반면에 보주형(寶舟形)의 광배는 그 안에 이조선(二條線)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얕은 부조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했다. 둥근 형태의 두광과 신광 안에는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바깥의 주변에는 불꽃무늬가 자연스러운 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의 광배와 매우 흡사하다.


 

불신과 옷주름 표현의 경직성과 도식화 경향으로 미루어 9세기 정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항마촉지인 불좌상 중에서는 비교적 우수하다.






적묵당


명부전


명부전은 1670년 신축되었으며. 명부전의 후불탱화는 1740(영조 16)에 조성되었다.


지장보살을 도명존좌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불단 아래 양쪽에 시왕들을 봉안하고 있다.



~제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