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천등산 봉정사(1/2)

2018. 4. 22. 13:15국내 명산과 사찰



안동 천등산 봉정사(天燈山 鳳停寺)(1/2)

 

안동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82(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1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능인(能仁) 대사는 화엄종의 창시자로 불리는 의상(義湘, 625~702)의 제자로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이며 동문 표훈과 함께 금강산에 표훈사(表訓寺)를 창건하신 분이다.


 

봉정사는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 ‘()의 서쪽 30리에 천등산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1566(명종 21) 퇴계 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2월 대웅전 지붕 보수 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 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4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목조건축물이 반경 20m 이내에 집약되어 있고,

목조건축물은 모두 각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어서,

봉정사는 한국 고 건축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고건축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진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최근에 보물 제55호에서 국보 제311호로 승격된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古今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인 영산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인 만세루(萬歲樓), 우화루(雨花樓),

요사채 등 21동의 건물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4호인 봉정사 동종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이 밖에도 고려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일주문 가기 전 사찰 입구에 명옥대(鳴玉臺)가 있으며,

부속암자로는 영산암(靈山庵)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智照庵)이 있다.



만세루

@만세루(萬歲樓) 는 조선 숙종 때의 건축물이며, 2001111일 시도 유형문화재 325호로 지정되었다.

 만세루는 원래 중국 진나라 때에, 윤주 자사 왕공이 양쯔강 근처

윤주의 성벽 서남쪽에 세운 높은 누각 이름이지만

불교사찰에서는 부처의 설법이 만세를 누린다는 뜻으로 조성한 전각이다.

봉정사 만세루(萬歲樓)의 본래 이름은 덕휘루(德輝樓)였다.

<천등산 봉정사 현판>은 동농노어서/東農老漁書 (東農 金嘉鎭, 18461922)의 작품이라고 한다.


<천등산봉정사>란 현판 뒤에 <나무아미타불> 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 쪽에 바라 본 만세루. 안에는 법고와 운판 목어가 있다.









중앙에 대웅전을 좌측에 화엄강당을, 우측에 무량해회란 전각을 배치하고 있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 다포계 건물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법당이다.

주심포 양식의 극락전은 고려 말기에 중창한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이고,

다포 양식의 대웅전은 지금까지 조선 전기에 중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962년 수리작업을 위해 일부 해체를 했는데,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이나

후불 벽화의 고려 불화 기법으로 볼 때

극락전 중창과 비슷한 고려 말기까지 조성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고 추정된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3간인 단층집으로 팔작(八作)지붕을 가진 전형적인 다포(多包)집이다.

일반 법당과는 달리 건물 앞쪽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상이 있다.

1963121일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630일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봉정사 대웅전의 불교 회화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대웅전 내부의 경우, 우물천장 범문자 단청, 고 주의 용 그림 단청,

어칸 대들보 안팎에 있는 금단청 위의 용 그림 단청, 똑같은 소불좌상 52개의 포벽화,

굵은 묵선으로 둘린 고형의 머리초 단청과

금단청, 천장 안쪽으로 들어간 닫집 한가운데 있는 쌍용 그림 단청 등이다.




대웅전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봉안했다.

뒤편 탱화는 영산회상도이다.








신중탱(중앙에 위태천을 모션 신중탱이다.)


칠성탱







@화엄강당(華嚴講堂)과 무량해회(無量海會)

화엄강당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1969년 해체 ·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588(선조 21)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장대석(長臺石) 댓돌 위에 두꺼운 널판을 쪽마루처럼 깔았고,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았다. 한때는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듯하나

지금은 승려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7623일 보물 448호로 지정되었다.

 

요사채인 무량해회(無量海會)는 조선 후기 건물로,

법당의 중심 마당으로 향한 툇마루를 단아하게 하여

내방객을 맞이하는 방식이라든지, 높이가 크게 차이가 나는 구릉 쪽에 마루를 내어

수직의 경직감을 여유 있게 처리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장중하고 품격 있는 주변의 건축물과 잘 어우러진다.



극락전풍경이다. 3층 석탑이 서있고 좌측에 고금당이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신라 시대의 건축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시대의 건축물이다.

극락전은 영주시의 부석사와 함께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건립 시기는 주심포식인 점에서 고려 중기로 보는 견해와 고려 말기로 추측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특히 1972년 극락전 해체 보수 때, 1363(공민왕 12)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극락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임이 확인되었다.

정면 3,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의 건물이다.

19621220일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마당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인 삼층석탑이 서 있다.







극락전 옆에 모셔진 안정사의 석불이다.







고금당

@고금당(古金堂)

화엄강당은 큰 규모와 견고하고 아름다운 짜임새 면에서,

고금당은 규모는 작아도 견고하고 아름다워

화엄강당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7623일 지정).


범종각



공덕당




~제2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