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9. 22:05ㆍ국내 명산과 사찰
안동 연미사와 보물 제115호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보물 제115호 지정된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은 연미사에 있다.
거대한 자연 암석을 그대로 불신(佛身)암각하고
그 위에 두상(頭像)을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은 미륵 마애불상인데
그 형상이 여느 사찰의 마애불보다도 그 조형기법이 뛰어나고 또한 특이하다.
<연미사(鷰尾寺)>는 경북 안동시 오도산(五圖山)에 자락에 있는 사찰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 소속이다.
창건은 신라 선덕여왕 때로 추정되지만
창건 이후 사찰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 것이 없어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연미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 곳은 1608년 작성된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인데,
동 영가지권6 불우(佛宇)조에, 「연비원불사(燕飛院佛寺)는
안동부(府) 서북쪽 12리 떨어진 오도산 남쪽에 있다.
돌을 세워 불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8년(634)에 조성했으며 6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는데
그 집 모양이 하늘에 날개를 펴는 날아가는 듯했다.
후에 두 차례에 걸쳐 중창하였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 재목은 다 옛것을 사용했다.」라는 것이다.
(연미사 대웅전)
위의 기록에 따르면 석불과 전각의 조성연대가 당나라 정관 8년(634년)이라면
신라 선덕여왕 3년에 해당하며, 전각은 연자루(燕子樓)로 하는 데
날아가는 새의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을 하고 있어 연비원(燕飛院)으로 불리었던 모양이다.
그 후 그 전각을 두 차례에 걸쳐 중창했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의 재목은 옛것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보아
창건 이후 상당한 기간 존립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영가지가 편찬될 당시인 1608년에도 연미사 석불과
석불을 덮은 전각은 보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연미사의 가람은 그때까지 존재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길 없다.
다만 전각의 이름은 없고 <연비원불사(燕飛院佛寺)> 라고만 기록하고 있어서
사찰의 이름은 이미 실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미사의 창건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는데
<삼국유사> 권 제3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에
고구려 고승 보덕 스님의 11제자 중 한 사람인 명덕(明德)스님의 창건설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덕법사(普德法師: 595~681)에게는 11명의 높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무상(無上)은 금동사(金洞寺)를,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浮)은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계육(契育)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창건하였다. 」
위의 두 가지 기록의 연대를 살펴보면 선덕여왕의 재위는 632~647년이고,
보덕화상이 활동한 시기는 595~681년이므로 두 기록은 일맥 상응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사찰은 1000여 년을 폐사로 방치되어 왔던 것을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옛 절을 승계하여 새로 절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연미사가 관리하는 이천동 마애불상은 원래 연미사(燕尾寺)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근래에 제비원이라는 암자가 새로 들어서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이 마애불로 공식 명칭은 <안동 이천동 석불상>이다.
연미사의 유일한 전각인 대웅전이다.
대웅전이지만 본존불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협시불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두었다.
연미사의 유일한 전각으로 건축한 지 얼마 않아서 그런지 색상이 화려하다.
법당 안에는 3개의 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지장탱
칠성탱
신중탱. 가운데 위태천(동진보살)을 모셨다.
연미사에서 마애불 가는 길. 초파일이 가까워져 연등들이 달려있다.
마애불 가는 길 옆에 조성된 나한상
<마애불에 얽힌 전설1>
전설에 따르면 이 마애석불을 조각할 때 당시 이름난 석공에게 의뢰하였는데,
그보다는 제자가 더욱 조각의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난 스승은 제자가 절벽에 사닥다리를 딛고 올라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사닥다리를 치워버렸다.
그러자 그 명공(名工)은 한 마리의 제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 전설에 의하여 이곳의 지명이 연미원(燕尾院), 즉 제비원이 되었다 한다.
이 밖에도 이 마애불에는 임진왜란 때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당시의 재상이었던 유성룡(柳成龍)과 이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예불을 올린 뒤에 지나갔다는 전설 등이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 높이12.38m, 너비 7.2m,
암벽 위에 2.43m 크기의 머리 부분을 조각하여 얹어 놓은 입상이다.
보물 제115호 지정되어 있으며 암벽에 몸체 부분을 선각(線刻)하고
그 위에 머리 부분을 따로 조각하여 얹은 거대한 불상으로,
경기도 파주 용암사의 마애쌍석불(17.4m)보다 약간 작으나 조각미는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신라 시대의 창건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전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 불상의 위에는 3층 석탑 1기가 있다.
@<마애불에 얽힌 전설 2>
예전에 제비원에서 원이라는 처자가 음식 장사를 하였다. 돈 받고 음식을 내주는 장사를 하였지만,
그래도 돈 없는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이 오면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밥을 내주었다.
장사하여도 영리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착하여 자선 사업을 많이 한 것이었다.
한편 이송천에 삼송천(三松川) 김씨 성을 쓰는 큰 부자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그만 젊었을 때 비명에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아들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갔는데, 염라대왕이 하는 말이
“너는 아직 들어올 때도 안 됐는데 왜 들어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내가 죽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잘못 들어왔으니 그만 나가거라!” 하였다.
그리고는 또 하는 말이 “가긴 가는데 자선 사업을 좀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송천 부자 아들이
“자선 사업을 하라니요? 빈손으로 왔는데 어떻게 자선 사업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여기에 원이가 저장한 창고가 저기 어디 가면 있다. 금은보화가 들어 있는 창고가 있으니
그 창고의 반만 가지고 가서 사람을 돕고 가라.”
염라대왕은 이렇게 말하면서 보물의 반을 꺼내서 이송천 부자 아들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갚을 때는 어떻게 갚는가 하면, 네 살림을 원 이한데 반만 주면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송천 부자 아들은 한 사나흘 뒤에 깨어났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부잣집에서는 경사가 났다.
이송천 부자 아들은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래서 재산의 반을 들고 원이를 찾아갔다.
“내가 저승에 가 보니 자네 창고가 있었네.
그런데 내가 자네 재산을 좀 쓰고 왔단 말일세.
염라대왕이 내 살림의 반을 원이 처자에게 주어 빚을 갚으라고 말하였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내 재산의 반을 갖고 왔네.”
이렇게 하여 원이는 이송천 부자 아들의 재산을 받게 되었다.
원이는 재산을 받아서 지금의 제비원 자리에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여 법당을 하나 세웠는데,
그 법당이 바로 연미사(鷰尾寺)라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제비원 석불이라 불리는 석불,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는 이천동 마애석불은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조각된 불신(佛身) 위에 불두(佛頭)를 따로 제작하여 올린
특이한 형태의 마애불로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불두(佛頭)는 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소발(素髮)의 머리와
얼굴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서 조립하였는데 미끈한 얼굴의 질감과는 달리
거칠게 표면 처리한 머리를 이마 위에 얹어 놓아 멀리서 보더라도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얼굴의 미간(眉間)에는 白毫(백호)를 큼직하게 돋을새김하고,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위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깊게 파인 눈썹이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의 윤곽선에 이어져 있다.
붉게 채색된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 강한 윤곽으로 표현된 얼굴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삼도(三道)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돋을새김한 장식이 표현되었으며,
강한 각선으로 조각된 환조의 머리와는 달리 장대한 신체는 선각으로 처리하여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옷 주름이
오른쪽에서 수직으로 드리워진 법의 자락과 교차되어 접히고,
넓게 트인 가슴 밑으로 내의(內衣)의 띠가 수평으로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은 복부에 대고
왼손은 손등이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려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의 발밑에는 큼직한 단판 연화문을 음각하여 대좌로 삼고 있다.
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11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미사에 있는 보물 제115호인 ‘이천동 석불’은 속칭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불리며
이 석불은 우리 불교사에서도 몇 되지 않는 대표적인 미륵불에 속한다.
연미사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 시대 여행객이 쉬어가는 숙소인 연비원(燕飛院),
속칭 제비원이라 불렀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당시 연미사 석불에는 연자루(燕子樓)라 불린 제비 모양의 누(樓)가 덮고 있었으며
법당은 제비의 부리에 해당한다고 해 연미사(鷰尾寺)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또한, 이 석불은 대표적 민요인 ‘성주풀이’에도 나올 만큼
민초들이 오랜 세월 동안 뿌리내리려 한 신앙의 대상과도 닿아 있다.
때문에 연미사가 사찰로써는 매우 작은 규모이긴 하나
저 미륵불이 담고 있는 미술적, 민족적 유산은 그 어느 것보다 값진 보배라고 할 만한 것이다.
마애불 옆 숲속에 작은 3층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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