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4. 17:11ㆍ국내 명산과 사찰
충주 탄금대와 대흥사
오전 내내 흐린 날씨가 오후가 되어도 개일 줄을 몰랐다.
충주3대철불을 돌아보고 귀경길에 늦은 점심 공양을 하고 나니
식당에서 탄금대공원이 그리 멀지 않아 둘러 보았다.
충주의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400년 전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우륵이라는 악사는 조국의 멸망 후에
이곳에 강제로 이주당한 수많은 가야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우륵은 탄금대 절벽 바위를 주거지로 삼고 풍광을 감상하면서
가야금을 타는 것으로 이곳에서 소일했다.
그 오묘한 음률에 젖어 들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루고 그곳을 탄금대라 명명했다.
@탄금대공원은 자연경관의 보호와 시민의 건강·휴양 및 정서 생활 함양에 이바지하기 위해
1956년 8월 21일 당시 내무부 고시 제1956-342호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받아 건립되었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7월 9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42호로 승격되었다.
탄금대공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도시공원인 근린공원이다.
탄금대공원은 충주시 서북쪽의 칠금동에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남한강과 상류 쪽으로 1㎞쯤 뻗은 해발 200m가량의 대문산에 자리 잡고 있다.
산세가 평탄하고 송림이 우거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탄금대공원은 입구에 충주문화원과 야외음악당, 잔디광장이 있고,
대문산(大門山)을 한 바퀴 도는 산책길을 따라 아동 문학가 권태응(權泰應)의 감자꽃 노래비,
탄금대사연노래비, 탄금대비, 탄금정(彈琴亭), 열두대, 궁도장, 조각공원 등이 있다.
또한, 열두대 근처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탄금대 토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부대 시설로 주차장과 매점이 있다.
@탄금대사연 노래비
충주을 대표하는 향토가요인 탄금대 사연의 노래가사를
화강암과 오석으로 음표을 형상한 비석에 새겨 놓은 노래비이다.
@충혼탑(忠魂塔)
탄금대공원에 세워진 이 충혼탑은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주 출신 전몰장병과 경찰관,
군속, 노무자 2838인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6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향사를 지낸다.
<충혼탑(忠魂塔)>이란 글씨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팔천고혼위령탑>과 충장공 신립장군
신립장군의 본관은 평산 시호는 충장 1546년(명종1년) 출생,
아버지는 생원을 지낸 신화국이며,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지낸 신상이다.
어렸을 때 글공부보다 무예를 좋아했다고 하며,
22세 때1567년(선조 즉위) 무과 급제하여 1583년 온성부사로
북변에서 처들어온 여진족 니탕개를 물리처 두만강 건너 적을 소탕하여 병마절도사가 되고,
평안도병마절도사, 우방어사, 중추부동지사, 한성부판윤 역임한다.
임진왜란 때 한성부판윤 겸 도순변사 가 되었다.
임진왜란 도순변사 신립 과 종사관 김여물을 보내 왜군을 막게 하자,
4월26일 충주에 다다른다. 신립은 처음에 문경새재 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길이 너무 험하여 달래강 뒤에 두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첬다.
8000여명의 병사로 대항했지만 조총을 앞세운 왜군에게 무참하게 참패했다.
신립과 김여물은 수 십명 적을 죽이고 탄금대 빠져 죽었다.
후에 조정에서 영의정 추증하고 충장 시호을 내렸다.
@팔천고혼위령탑 상단의 불꽃형상은
임진왜란에 산화한 8000여기의 영령들을 추모를 기리며
또한 조국을 수호신이 되어주길 바라는 기원을 상징하며
아래 신립장군과 5인의 군상은 임란에서 최후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호국충정의 애국정신을 기린 것을 상징하고 있다.
@감자꽃시비
이 감자꽃시비는 아동 문학가 동천 권태응의 시비다.
권태응 시인은 1918년 충북 충주시 칠금동에서 태어나 충주 공립보통학교와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으로 유학갔지만 중퇴했다.
대학 재학 중 이른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1년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0년 병 폐결핵에 걸려 출소 귀국한 권태응은 인천 적십자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결혼 후에도 계속 치료를 하며 1948년 12월 동요집<<감자꽃>>을 (글벗집)에서 출간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 생활 때문에 병세가 악화하여
이듬해인 1951년 3월 28일 34세의 생을 마감했다.
1968년 5월 5일 이곳 충주 탄금대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이 작품은 일본강점기 때 일본식 성명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에 항거
민족의 혼을 지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동요시로 유명하다.
탄금대기
열두대의 조망
탄금정
신립장군순국지지
@玉貫子:
신립은 전투에 패전하자 이곳에서 물결을 따라 내려가다 중앙탑면 창동 암벽에 자화상을
그려놓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는데, 자결한 후 시신을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낚시꾼이 잡은 잉어의 배에서 나온 옥관자가 신립 장군의 것으로 판명되어
그 자손들이 안장하였다 전해진다.
신립 장군의 시신에 대한 다른 이야기로는 부하들이 시체를 건져 올리면서
“장군 님”하고 부르자 관 속에서 “오냐” 하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장군의 시신을 옮기는 데 이천 기치미고개 에서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모셨다고 한다.
현재 신립 장군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산1-1)에 있다.
열두대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여 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맞아 격전 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 백 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100척이나 되는 절벽 열두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하여 열두대라고 한다.
신립장군에 얽힌 설화 원녀이야기
어느 날 신립이 사냥을 하다 날이 저물어 인가를 찾던 중 깊은 산속에서 대궐 같은 집을 만난다.
사람을 찾으니 나오질 않아 들어가 보니 소복을 한 여인이 홀로 있었다. 여인은 그 집의 딸이었다.
여인은 신립에게 소복을 입은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집에 종의 아들이 있었는데
주인집 딸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종을 죽이려 하였는데,
종은 죽지 않고 살아 오히려 주인집 식솔과 종들을 모두 죽이고 그 처녀만이 남게 되었다.
처녀는 종의 아내가 되든지 맞아 죽든지 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신립이 의기가 나서 종의 아들과 싸워 그를 죽이자
처녀가 부모의 원한을 갚았으니 자기를 받아달라고 애걸하였다.
신립은 처자가 있는 몸이라 사양을 하였다.
이튿날 여인이 집에 불을 지르고 죽어 원귀가 되고 말았다.
그 원혼이 신립으로 하여금 문경이 아닌 탄금대에 진을 치게 하여 결국 왜군에게 패하게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982년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신립과 원녀」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981년 중원군에서 발행한 『내 고장 전통 가꾸기』 와 2002년 충주시에서 발행한
『충주의 구비문학』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열두대에서 바라 본 풍경, 저 멀리 보이는 다리가 탄금대교다.
@우륵(于勒)
우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아 정확한 생존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가야국 가실왕과 신라 진흥왕 때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가실왕의 뜻에 따라 12현금(絃琴,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금 연주곡 12곡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551년(진흥왕 12) 신라에 투항하고, 552년 대내마 계고와 법지,
대사 만덕 등 세 사람에게 각각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
신라 진흥왕에 의해 우륵이 지은 가야금 곡이 궁중음악이 되었다.
우륵은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열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근처라는 설과
산반해국(散半奚國)이라는 설이 엇갈린다. 결국, 그가 어떤 가야에서 태어났는지,
그에게 12현금을 만들도록 한 가실왕이 몇 대 임금인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가실왕이 우륵에게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며 12곡의 악곡을 지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이는 가실왕이 음악을 통해 가야의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다 가야국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우륵은
제자 이문(尼文 혹은 泥文)과 함께 낭성에 숨어 살며 노래와 춤을 닦았다.
그러다 그 이름이 신라 진흥왕에게 알려져 우륵과 이문은 궁으로 불려가 궁에서 새 노래를 지어 연주했고,
이에 감동한 진흥왕의 배려로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륵은 552년 진흥왕이 보낸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대사(大舍) 만덕(萬德) 세 사람에게 각각 음악적 재능을 전수하였다.
이때 우륵은 세 사람의 제자를 받아 각각의 재주를 따져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세 제자는 우륵이 만든 12곡을 가리켜
“번거롭기만 하고 바르지 못하다.”라며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이를 전해 들은 우륵은 처음에는 매우 화를 냈지만
곧이어 제자들이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즐거우면서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가히 바르다 하겠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진흥왕이 가야금 곡을 궁중음악으로 선포하고
〈하림조(河臨調)〉, 〈눈죽조(嫩竹調)〉의 2조가 생겨 가야금 곡 185곡이 남겼다.
열두대에서 대흥사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신립장군비를 모신 전각이 있다.
대흥사는 이 비전각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대흥사
대흥사는 현재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주는 알 수 없으나 용흥사라는 절이 있었다.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고려 시대 거란족의 침입 시 소실되어 천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956년 오범우스님이 3월에 이 터에 절을 재건하고 대흥사로 했다.
그러나 1968년 10월 다시 원인 모를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자
1969년 5월 오범우스님이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가 자리 잡은 이 산을 대문산이라고 하며 가야의 악성 우륵이 이곳에 머물면서
가야금을 탄 후 탄금대라 불리었다. 열두대를 내려오면 신립장군비가 있는 데 이는 사찰관리가 아닌 모양이다.
대흥사에는 대웅전, 산신각, 요사 2동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네 개의 석등, 종각, 다층석탑, 석비 등이 있다.
대웅전 옆에는 대흥사의 창건자인 오법우의 승탑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 산신각이 있다.
대흥사 7층석탑
이 탑은 고증된 것은 아니지만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불상과 약사전 그리고 범종각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네 개의 석등, 종각, 다층석탑, 석비 등이 있다.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봉안했다.
우측에 지장보살을 모셨다.
지장보살
칠성탱
영산회상탱
대흥사 법당과 닫집이 모두 붉은 색으로 조성되어 있다.
범종각과 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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