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7. 18:04ㆍ국내 명산과 사찰
(충주 3대철불 2) 미친 부처(狂佛)라 불렀던 충주 대원사 철불좌상
불교에서 삼보(三寶)란 불법승(佛法僧)을 말한다. 3보 중에서도 불(佛) 즉 부처님이 으뜸이다.
그래서 사찰이라면 당연히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상(佛像)을 모시고 있다.
불자들은 불상에 대하여 신심(信心)을 다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피를 구한다.
그런데 충주에는 철불을 모신 절이 세 군데 있는데
유독 지현동 대원사(大圓寺)에 모셔진 이 철불은
<광불(狂佛)> 즉 <미친 부처>라 불려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갖은 수난을 당했다.
(무량수전)
이 철불을 모시고 있는 대원사의 창건 경위와 역사를 보면 충주시 지현동에 있는데
이 절의 경내에 있는 <우암승현선사지비(愚岩勝鉉禪師之碑)>라 음각된 비석의 뒷면에
「1929년 9월에 김추월(金秋月) 선사( 禪師)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기록이 있어
창건주는 현승선사이며, 창건 연대는 1929년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 법당. 중앙에 아미타불 협시불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봉안했다.)
대원사는 1929년 이후 포교당으로 운영되다가 1994년 화재로 대웅전 일부와
충주 철불좌상을 봉안했던 보호각이 소실되었으나
1998년 극락전을 새로 지어 충주 철불좌상을 안치하였다.
1994년 화재 이후 당시 주지였던 현덕스님에 의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재건하여
주불인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후불탱화가 조성되었으며,
대원 어린이집도 당시 개원되었다. 이후 보호각 없이 대웅전 앞에
방치된 충주철불좌상의 봉안을 위해 1998년 승려 법광이 극락전(極樂殿)을 건립하고
후불탱화를 조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사찰이다.
(철불이 봉안된 극락전)
@충청북도 충주시 지현동 대원사 극락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좌상(忠州 大圓寺 鐵造如來坐像)은
고려 시대의 철조 여래 좌상으로 이 철불의
정식 명칭은 <충주철불좌상(忠州鐵佛坐像)>이며
보물 제98호로 지정(1963년 01월 21일 지정) 되어 있다.
대원사의 철불은 앞서 포스팅한 단호사 철불좌상과 같은 양식이지만
엄격미가 강조된 된 추상화된 양식을 띤 철불이다.
<사찰고기(寺刹古記)>에 의하면 이 철불은 고려 인종 23년(1145년)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높이 1m의 중형 불상이며 삼각형에 가까운 얼굴, 길고 넓은 눈,
꽉 다문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 형의 주름이 근엄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좌우대칭을 지키면서 기하학적 옷 주름 선을 규칙적으로 표현하였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유행하던 철로 만들어진 불상 가운데 하나로,
도식화된 표현으로 볼 때 제작시기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불상의 이미지는 신성(神聖)한 모습이라기보다 아수라 같은 풍모를 지닌,
신비스럽고도 절대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불상이다.
이는 아마도 고려 초에 유행한 밀교의 영향을 받은 고려 불교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충주철불좌상은 원래 성남동 마하사 앞뜰에 있었다.
1770년(조선 영조46년)무렵에 지은 <약전원수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 있다.
「633년에 절을 창건한 후 높이 3척 2촌 5푼의 철조 석가 좌상을 조성하여
염바다들 서쪽(지금의 충주공고와 성남초등학교 부지 일대)에서
마지막 재로 향하는 안림로의 오른쪽 길가에 서쪽을 향하게 봉안하고
그 뒤로 수 백 년을 내려왔다」라고 한다.
그간 불상이 노천에 방치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들이 건물을 지어 철불좌상을 봉안하면
당우가 소실되거나, 또는 향불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면 꼭 괴질이 유행하므로
이 철불을 <광불(狂佛)>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본래는 완전했던 철불의 두 손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손실되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파손된 손을 나무로 깍아 보안했다.)
대원사에 봉안된 이 철불의 조성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 기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인종 23년, 경기도 양재 땅에
불상이나 화상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여진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충주 화암사 주지라고 하는 노승이 찾아와 철로 된 부처님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여진이 그 노승을 살펴보니
얼굴이 괴이하게 생겼고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노승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기가 이글대고 있어 보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불상 안치일을 결정하고 노승이 돌아간 후 여진은
불길한 생각을 물리치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 후 조불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진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불상 작업을 하는 과정 내내 눈앞에 떠오르는 노승의 괴이한 얼굴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써도 노승의 광기 어린 눈동자나 얼굴 모습이 생생하게 뇌리에 파고들었다.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그 노승의 얼굴이 떠올라 시달렸다.
어느 날인가 하루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아 눈을 떴다.
그랬더니 눈앞에는 그 괴상한 노승이 석장을 짚고 서 있었다.
여진이 기겁해서 일어나려는 찰나 잠을 깼는데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꿈에서 찔린 옆구리가 계속해서 아파져 오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해 가을 화암사 철불을 마지막으로 완성한 후 여진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사연을 간직한 채 철불은 충주 화암사에 안치되었는데
그로부터 괴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밤이면 대웅전에서 웃는 소리가 법당을 울리고,
낮에는 정면으로 안치되었던 불상이 옆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괴이한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자 절을 찾는 신도들의 발걸음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절 살림은 탁발에 의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탁발을 나갔던 주지가 어찌 된 연유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주지 스님이 없는 빈 절에서 오래도록 혼자 절을 지키고 있던 철불은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내려오다가 원인 모를 불로 인해 절마저 소실되자
불상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철불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안림동 염바다들 서쪽 풀숲에 방치되어 있던 철불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철불이 발견되면서부터 충주에는 미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를 근거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철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철불을 학대하는 등 마구 다루어 그때 양손이 파손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철불이 있었던 거리를 광부처 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충주철불좌상은 고려시대의 불상을 대표하는 매우 특이한 철불로
1922년에 옛 중원 군청, 곧 지금의 관아공원 구내의 석가산으로 잠시 옮겨 보관되다가
1937년 성남동 마하사로 옮겨졌고, 다시 1959년에 대원사로 옮겨 봉안했다.
별도의 전각 없이 대웅전 앞 오른쪽 담장 옆에 안치되어 있다가
1982년 중원문화권 개발사업의 하나로 충주시의 보조를 받아
대웅전 오른쪽에 단칸의 보호각을 짓고 봉안하게 되었다.
그 뒤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보호각은 소실되고 철불상도 일부 손상을 입었다.
이후 문화재관리국에서 보존 처리한 후 충주시립박물관으로 잠시 이전했다가,
1998년 대원사 극락전을 새로 지은 후 다시 옮겨 봉안했다.
이 같은 내용은 1959년 중원군 교육청에서 발간한 《예성춘추》에 실려있다.
위에서 나온 지명인 염해평은 ‘염밭’ 또는 ‘염바다’라고도 한다.
그 지명에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기록이
《예성춘추》와 《중원향토기》(1977년)에 나와 있어 소개해본다.
「예로부터 현 성남동 마하사 앞뜰에 철불이 서향해서 앉아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이곳을 ‘광불거리’라고 한다.
곧 계족산(鷄足山) 아래의 어림리 앞과 금봉산(남산) 서쪽의 넓은 들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 시대부터 어림리에 고도(古都)가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때인 930년(경순왕 4)에 견훤(甄萱)은 이곳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려 했는데,
지렁이의 후신인 견훤은 이 일대가 염바다라 하므로 질겁을 하고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은 기록 또는 전해 오는 전설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염해평은 지금의 충주공고 북쪽의 들판이다.
이곳에 철불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므로 광불거리로 불렀다.
염해평에서 동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대원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위의 인용문에서 나온 어림리는 대원고와 약 200여m 떨어져 있다.
어림리는 이궁지(離宮址)·대궐터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에 절이 있었다 하여 어림동사지로 칭하기도 한다.」
'국내 명산과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주 탄금대와 대흥사 (0) | 2018.04.14 |
---|---|
(충주3대철불 3) 충주 백운암 철재여래좌상 (0) | 2018.04.08 |
(충주3대철불1) 충주 단호사(丹湖寺) 철불여래좌상(鐵佛如來坐像) (0) | 2018.04.05 |
용암사와 파주 광탄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龍尾里磨崖二佛立像) (0) | 2018.04.02 |
천안태학산 태학사와 법왕사(2/2) (0) | 2018.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