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론(肇論)의 《물불천론(物不遷論)》

2018. 3. 3. 21:05조론


(영은사의 관음도)


조론(肇論)물불천론(物不遷論)

~사물의 동()과 정()의 현상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 뒤편에 청련암이란 절이 있다.

 절 앞 바위에 우탁의 이런 시가 암각되어 있다. 우탁(禹倬:1263~1342)은 고려 후기의 학자이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싀 쥐고

늙난 길 가싀로 막고 오난 백발(白髮)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白髮)이 졔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덧없이 흐르는 세월의 무상을 읊을 시다.

사람은 누구나 늙게 마련이다. 늙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우탁도 늙는다는 그것이 서글펐던 모양이다.

늙는다는 것이 왜 서글픈 것일까. 늙음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평생 늙기만 하고 죽지 않는다면 늙음이 무슨 문제가 될까. 생사(生死)가 문제다.

그런데 부처님은 생사(生死)가 일여(一如) 하여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다고 한다.

동정(動靜)이 일여(一如) 하여 젊음이란 것도 늙음이란 것도

 중생의 미망(迷妄)에 따른 것일 뿐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조론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보자.

(승조의 스승 구마라집의 동상) 

사람이란 청년일 때나 노인이 되었을 때나 그 몸은 같은 형질이긴 하나 늙음과 젊음이 같지 않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처럼 하얗게 변하듯 외형의 모습은 변한다.

이를 조론에서는 천류(遷流)라고 표현했다.

젊음에서 늙으므로 변해가는, 그 천류 하는 모습은 변함이 있는 듯하나,

실제로 젊은 시절의 얼굴은 스스로 과거 젊은 시절을 따라가 있지

현재의 늙음으로 오지 않았으며, 늙음은 스스로 현재에 머물러 있지 젊음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것이 <불천(不遷)>이며, 천류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라고 했다.

젊음이 늙음으로 옮겨 간 것도 아닌데

실체가 없는 허상을 범부는 미망(迷妄)으로 실체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장미를 생각해 보자. 여름철 붉은 장미가 때가 지나면 시들어 퇴색한 검은 장미가 된다.

붉은 장미가 자성 곧 실체가 있다면 이는 검은 장미가 될 수 없다.

실체란 불변(不變) 부동(不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퇴색한 검은 장미 안에 붉은 장미가 있고,

붉은 장미 안에 검은 장미가 있다고 한다면 두 개의 장미가 모두 실체(자성)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물과 얼음이 형태가 변해도 그 실체는 물이듯이 하나의 사물에 두 개의 자성이 있을 수는 없다.

하나의 붉은 장미가 시들어(움직여) 검은 장미가 된 것은 자성이 옮겨 간 것도 아니고,

퇴색한 검은 장미가 붉은 장미로 자성이 옮겨 가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붉은 장미가 현재의 검은 장미로 옮겨 온 것도 아니고,

현재의 검은 장미가 과거 붉은 장미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이는 단지 현상이 변한 것으로 보인 것이지 자성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천(不遷)인 것이다.


(영은사 여래와 신장)


()이란 관찰할 객관인 현상의 만법을 지적한 말이고,

 불천(不遷)은 모든 만법의 자체는 성공(性空) 실상(實相)인데도

일상적인 범부의 허망한 마음으로 모든 만법을 보면 흡사 천류함이 있는 듯도 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야(般若)로서 이를 관찰한다면 모든 법의 실상은

당체가 적멸(寂滅)한 진상(眞常)이어서 끝내 천류 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없다.

왜냐하면 의타기(依他起)로 연생하는 제법은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만법마다 당체가 본래 스스로 천류 하지 않은 것이지

현상의 차발적인 모습은 천류 하나 그 자성은 천류 하지 않는다 함은 아니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천류(不遷流)란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실체 즉 자성을 말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조론에서

사물 자체가 진여의 성공이라면 허망한 마음에 해당할 만한 법은 끝내 하나도 없다.

이러한 이치로서 속제(俗諦)를 관찰한다면 속제(俗諦)가 바로 진제(眞諦)이다.

실로 진여성공(眞如性空)의 진제(眞諦) 이치로서 현상의 사물을 이루었으므로 사물마다 모두 진여이다.

모든 성공(性空) 실상(實相)이 여기에 나타났다 하리라.라고 했다.

 

젊다는 것도 늙었다는 것도 범부의 허망한 마음에 따를 뿐 젊음도 늙음도 없다는 것이다.

 젊음도, 늙음도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범부의 눈으로 보면(속제로 보면)

변해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일체 제법이 연기로 머물 뿐 달리 실체가 없는 공으로 보면,

 즉 진제의 측면에서 보면 그 둘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性空)이 바로 가유(假有)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영은사 여래상)


 자동차를 생각해 보자정지된 모습의 자동차나

움직이는 자동차가 같은 것으로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나 정지된 자동차가 실체가 있는데 움직이는 자동차라고 한다면

정지됨 속에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움직이는 자동차가 정지된 실체와 같은 것이라면 움직임 속에 정지됨이 있어야 한다.

시간적으로 묘사하면 현재 속에 과거가 있고, 과거 속에 현재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에 정지됨과 움직임이 시공간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속의 움직이는 자동차나 정지된 자동차는 허상이듯

이는 마음이 그려낸 허상이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있다는 것은 같은 시간 속에 하나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정지된 자동차와 움직이는 자동차가 모두 실체가 있다면 정지된 것은 움직이는 자동차가 아니고,

움직이는 자동차는 정지된 자동차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존재는 크든 작든 동일한 시간속에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한 물건이 동시에 두 공간에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에서  움직인다, 변한다는 말은 다른 시공간에 머문다는 의미다.

하나의 물건이 다른 시공간에 머문다면 이는 다른 것이란 의미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 온 것도 아니고, 현재가 과거로 흘러간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재 속에 과거가 있고, 과거 속에 현재가 있다면

이는 천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움직이는 자동차나 정지된 자동차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는 의미다.


사진 속의 자동차는 실체가 아닌 허상이듯 정지된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실체가 없는 가유(假有)이기 때문이다. 정지된 자동차나 움직이는 자동차는

그 실체는 공이기 때문에 연기하여 일심(一心)의 본무(本無)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조론에서는 이를

현상의 제법은 일심의 본무(本無)가 인연을 따라 발생하였을 뿐 마음 자체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인연으로 발생한 만법은 본래 무생(無生)의 본무(本無)이기 때문에

만법이 소멸한다 해도 인연이 사라졌을 뿐 마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연의 화합을 따라 제법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인연의 분리를 따라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 본무(本無)일심(一心)이다. 라고 했다.

움직임이 없는 데 중생의 미혹된 마음이 그렇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조론에서는 다시 이를 이렇게 말한다.

 

(영은사 약사여래상) 

모든 법의 실상은 당체가 여여(如如)하여 본래 흘러가거나, 흘러오면서 움직이고 구르는 모습이 없다.

불안(佛眼)으로 이를 관찰하면 진공(眞空)인 제법은 고요하나

범부는 무명(無明)에 미혹한 허망한 견해로 보기 때문에 사물이 천류함이 있는 듯한 것이다.

이것으로 물부천론(物不遷論)의 종지로 삼았다.고 했다.

불안(佛眼)으로 관찰한다는 말은 깨달음의 지혜로 본다는 의미다.

가유(假有)를 실유(實有)로 보지 말라는 의미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움직이는 자동차이든 정지된 자동차이든 이는 허상이다.

실물의 이미지일 뿐 당체는 아니다. 공이다.

그러나 자동차는 실체가 없는 공()이지만 현상으로 드러난다.

 실체가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묘유(妙有)한다.

묘유로 보이는 자동차의 실체는 공이다.

()인 것이 일심의 연기로 나타나는 현상, 실체가 공이라면

연기를 따라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으로 묘공(妙空)이라 한다.

그러므로 묘유(妙有)가 곧 묘공(妙空)이며,

묘공(妙空)이 곧 묘유(妙有)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제법의 움직임 가운데서 본질의 고요함을 구하면

현상의 모든 움직임이 목전에 나타난다 해도 마음의 세계가 담연(湛然)하다.

 그 때문에 움직이지만, 항상 고요하다라고 했다.

굳이 움직임을 버리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기 때문에

마음과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의 중도는 텅 비고 한가하여,

마음에 감응하는 세계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해도 중도에 화합함을 잃지 않는다.

 이는 화엄경에서 보리의 도량을 떠나지 않고 일체의 세계에 보편 하다말한 것이나

 <신심명>에서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여(萬法一如)라는 말과 같다.

 이른바 부처님의 法身은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중생 앞에 보편 하게 나타나네.

빠짐없이 인연 따라 감응하시나 항상 보리좌(菩提座)에 계시네!라고 한 경우와 같으며,

 <법성게>궁좌실제(窮座實際) 중도상(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란 말과도 같은 의미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과 정()이 둘이 아닌 종지를 밝히기란 어려운 것이다.라고 조론은 밝히고 있다.


(영은사의 여래상)


@위에서 현재와 과거의 사물이 본래 흘러가고 흘러옴이 없다고 말은 했으나

 이 말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시간엔 고금(古今)의 차이가 없이

평등한 하나의 즈임()을 보게 하려 한 것이다.

고금이 평등하게 하나로 상즉(相卽)한다는 이치를 통달한다면

사물은 저절로 고금의 시간을 따라 왕래함이 없게 된다.

이는 이른바 꿈속에서 한해를 지냈더니 깨어보니 잠깐 사이였으라했던 시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한량없지만 한 찰나 사이에 포함된다.

이는 옛 시에서 말한 베개에서 잠시 봄 꿈을 사이에 강남 수천 리 길을 다 갔었네!라고 한 것과 같다.

 <법성게>에서는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 했다.

꿈에서 일어난 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한다면 시간에는 고금이 없으며

제법은 시간을 따라가고 옴이 없다는 것에 마음이 환해진다. 구래(舊來) 부동(不動) 이다.

그러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의식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바로 생멸 유전하는 천류에 떨어진다.

이러한 경지는 일상적인 범부의 허망한 마음으로 도달할 바가 아니다.라고 조론은 밝히고 있다.


(영은사 여래상)


@ <법성게>의 말을 빌리자면 무명무상 절일체(無名無相切一切) 증지소지 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다.

일체 만법은 이름도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져 있으므로

깨달음의 지혜로만 알 수 있을 뿐 달리 경계가 없다는 말이다.

생사의 문제는 <반야심경>에서 아주 단적으로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라 했고

무지(無知)역무득(亦無得)했다. 노사(老死)도 없고, 노사가 다함도 없다는 말이다.

앎도 없고 지혜로도 얻을 것도 없다는 의미다.

()이란 연기로 인한 오온(五蘊)이니 그 실체가 공()하다.


()은 생함이 없다. 그러므로 무생(無生)이다.

실체가 없는 생()에서 어찌 늙음()이나 죽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범부의 눈으로 보면 생()도 있고 노()도 있고 사()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반야심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반야심경>을 보면 보리살타는 반야(般若)에 의함으로 모든 공포를 벗어나 구경에 열반을 얻는다 했다.

그런데 무위의 열반을 증득한 삼세제불은 반야에 의해

 아뇩다라삼막사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곧 무상(無上) 정등각(正等覺)을 의미한다.

(영은사의 석가모니불상) 

사물의 이치를 증득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오(解悟)이다.

이는 이치(理致)로서 구경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둘은 증오(證悟)이다.

이는 말이나 글은 물론 일체의 정식(情識)을 벗어난 깨달음의 지혜다.

그러므로 생사(生死), 열반(涅槃)의 문제는 해오(解悟)의 문제가 아니라 증오(證悟)의 문제다.

 

중생의 미망으로 본다면 생사(生死)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열반(涅槃)은 바램의 대상이라 할 수 있지만 증오(證悟)하면 생사열반이 다른 것이 아니고

생사열반이 서로 상즉(相卽)하는 것이다. 생사열반(生死涅槃) 상공화(常共和)라는.

 <법성게>의 말처럼

생사열반이 늘 상즉 하는 것이라면 유위(有爲)의 생사나 무위(無爲)의 열반도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

조론의 말을 인용하면

생사가 흘러간다 해도 천류 하지 않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항상 고요하며,

열반에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히 상주하면서도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무위(無爲)의 열반에 안주하지도 않고, 현상의 유위법(有爲法)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열반에서 고요해도 항상 생사의 세계로 가기 때문에,

간다 해도 생사에 천류 하지 않으며, 생사의 세계로 간다 해도,

항상 열반에서 고요하기 때문에 고요해도 열반에 머물며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조론의 물불천(物不遷)의 요지는 천류(遷流) 하는

사물에 나아가서 천류 하지 않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진여(眞如)의 세계를 볼 수 있다면 눈에 부딪히는 대로가 제법실상의 상주가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생사(生死) 문제는 중생들의 미망일 뿐

생사의 주체인 오온(五蘊)이 연기(緣起) 성공(性空)임을 증득하게 되면

생사(生死)의 유위법에 머물면서도

그 동정(動靜)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벗어나게 된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영은사의 쌍석탑 ) 

 

@위 글은 성조법사의 조론의 略註(감산덕청)를 번역한 송찬우씨의 글을 편집한 것임을 밝힌다.

분문에 올린 영상들은 조론의 저자인 동진의 승려 승조법사(334~414)

활동하기 이전에 건립된(326, 동진시대) 항저우의 영은사(靈隱寺)의 불상들이다. (본방 영은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