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삼소(虎溪三笑)

2017. 12. 10. 20:52조사어록과 잠언




호계삼소(虎溪三笑)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이런 날은 호젓한 강변의 선술집에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앞에 놓고

옛 지기들과 탁배기 한잔 걸치면서 담론을 즐기면서 호계삼소(虎溪三笑)가 아니라도

한 웃음 즐겼으면 오직 좋으랴만은 무상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이가 많아 그런 연()은 없을 듯하다.


(진천 보타사 삼소당)

 

@사찰을 다녀보면 삼소당(三笑堂)이나 삼소암(三笑庵)이란 편액이 걸린 전각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삼소(三笑)라는 말의 어원은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호계(虎溪)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

여산(廬山) 서북쪽 기슭에 있는 동림사(東林寺)라는 절 앞을 흐르는 계곡 이름이다.

 

동림사라는 절은 동진(東晋) 때 여산의 고승 혜원(慧遠:335~417)

도반이었던 혜영(慧永)이 먼저 여산의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다가 혜원을 이곳으로 오게 한 후

당시의 자사 환이(桓伊)에게 부탁해 산의 동쪽에 혜원을 위해 다시 지은 절이라고 한다.

 

@혜영선사 머물었던 서림사도 풍광이 뛰어나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여산을 다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이곳의 서림사에 와서 이런 한 수를 남겼다고 한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이리 보면 고개요 저리 보면 봉우리라

원근고저 보이는 건 모두가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은 알기가 어려워라

내 몸이 이 산중에 들어 있기 때문이리.

 

세간에 회자하는 진면목(眞面目)이란 말도 이 시에서 유래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글쎄...


(송대 화승 석각의 호계삼소도)
 

호계삼소란 말이 생긴 유래는 동림사에 수행하던 여산의 고승 혜원(慧遠)

 항상 내 그림자가 대문 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고 발자국은 속세에 들여놓지 않겠다.

손님을 배웅하더라도 호계 다리를 넘지 않겠다.(影不出戶跡不入俗送客不過虎溪橋)”고 하였는데

어느 날 찾아온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도사 육수정(陸修靜, 406-477)과 환담을 나누고 돌아갈 때

두 사람을 배웅하면서 이야기에 취한 나머지 이 호계를 지나처버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하여 생긴 말이다.

이 이야기는 송()나라 진성유(陳聖兪)여산기(廬山記)에 나온다.

 

유천(流泉)은 절을 돌아 내려가 호계(虎溪)로 들어간다.

옛날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손님을 배웅할 때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 호계라 이름 지었다.

당시 도연명(陶淵明, 도원량(陶元亮))은 율리산에 살았고,

산남의 육수정(陸修靜)도 도를 아는 선비였다.

혜원법사가 이 두 사람을 배웅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도취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쳐 버리고는 모두 크게 웃어 댔다.

오늘날 전해지는 삼소도(三笑圖)는 이에 근거한 것이다.

(流泉匝寺, 下入虎溪. 昔慧遠法師送客過此. 虎輒號鳴, 故名之. 時陶元亮居栗里山,

山南陸修靜, 亦有道之士. 遠師嘗送此二人, 與語合道,

不覺過此. 因相與大笑. 今世傳三笑圖蓋本於此.)

@(): 돌다. 두르다.@(): 문득, 갑자기. 홀연히


(작자미상, 호계삼소도) 

호계(虎溪)에서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이 고사에서 유래하여

어떤 일에 열중하여 평소의 습관이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인용되는 된 것인데

오늘날 불교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도 이 말이 회자하고 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호계삼소의 설화를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東林送客處 동림사 절 앞에서 손님 배웅하는데

月出白猿啼 달이 밝게 떠 있고 원숭이가 우는구나.

咲別廬山遠 웃으며 헤어지는 여산의 혜원 스님

何須過虎溪 아뿔싸, 그만 호계의 다리를 건너고 말았군.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호계삼소도)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은 중국 정토교(淨土敎)의 개조로 알려져 있는데,

그를 북주(北周)의 혜원과 구별하기 위해 보통 여산(廬山)의 혜원이라 부른다.

그는 처음에는 유학을 배웠고 이어 도교에 심취했는데,

스무 살이 넘은 뒤에 중이 되어 여산에 동림정사(東林精舍)를 지어 불경 번역에 종사했다.

호계는 바로 이 동림정사 밑으로 흐르는 시내이다.

 

호계삼소에 대한 이야기는 당()나라 때 퍼지기 시작했는데,

송 대에 이르러 이용면(李龍眠)에 의해 삼소도로 그려졌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교제에 대한 이야기는 후인들이 지어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이 있다.

혜원은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3(417)에 약 83세의 나이로 입적했고,

도연명은 남북조시대 남조의 송나라 원가(元嘉) 4(427)에 죽었다.

두 사람은 비록 나이 차이가 30년 정도 나지만 도연명은 여산에서 멀지 않은 심양(潯陽) 사람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교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육수정은 남조 송나라 원위(元徽) 5(477) 72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나이 차이로 볼 때 이들이 교제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혜원의 생몰 연대는 334416(혹은 417),

도연명은 365427, 그리고 육수정은 406477년이다.




 

이런 고사에서 유래된 그림이 <호계삼소도>인데

이는 송대 이용면(宋代 李龍眠字公麟1049-1106)이 처음 그리기 시작했고

지원(智圓)이 그림에 글을 써넣었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