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의 원림 담양 소쇄원(瀟灑園)

2017. 11. 8. 19:30국내 명산과 사찰

 한국최초의 원림 담양 소쇄원(瀟灑園)


규봉암을 돌아보고 귀경하는 길 담양을 지나는 길목에 대숲으로 유명한 소쇄원이 보이길래 들려 보왔다.

소쇄원은 한국 최초의 원림으로 민간 정원으로서 최고라 일컬어지는 곳으로

특히 진사들에게는 대숲의 경관이 일품이라고 알려진 곳이라 호기심을 가졌던 곳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0월말까지 보수 중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원내를 둘러보지 못하고 입구에서 광풍각만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 조광조(趙光祖)가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에게 몰려 전라남도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소쇄원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 있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1548(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48() ()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敬命) 15744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23일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 있다.


@광풍각

광풍각은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뒤편에 짝을 이루는 제월당이 있다.

광풍각의 한가운데에는 방이 있는데 호남 지방에 많이 지어진 정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광풍각의 건너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위쪽에 초정으로 지어진 대봉대(待鳳臺)가 자리하고 있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지은 조그마한 정자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이름의 대봉대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를 심었다.

김인후는 소쇄원 48에서 대봉대의 풍광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작은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小亭憑欄 (소정빙란)

오동나무 대에 드리운 한여름의 녹음을 보네

桐臺夏陰(동대하음)

해 저문 대밭에 새가 날아들고

叢筠暮鳥(총균모조)

작은 못에 물고기 노니네

小塘魚泳(소당어영)











소쇄원은 계류가 암반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의 자연을 다듬어 만든

전통적인 계원(溪園)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담장으로 계곡을 가로막아 정원의 구획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교각을 세워 담장을 만든 오곡문은 매우 세련된 조경기법이라 할 수 있다.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담장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광풍각에 누워 머리맡으로 계곡 물소리(枕溪文房)를 듣는다.

대숲에서 울리는 바람소리(千竿風響)를 들으며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본다(廣石臥月).

걸상 바위에 조용히 앉아(榻巖靜坐) 바둑을 두고(床巖對棋)

도는 물살에 술잔을 띄운다(洑流傳盃).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危巖展流)

계곡에는 대나무 다리가 위태롭다(透竹危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