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기행(4/7) 마고할미의 전설이 깃든 지리산 용유담

2016. 6. 26. 23:09국내 명산과 사찰

함양기행(4/7) 마고할미의 전설이 깃든 지리산 용유담


고담사에서 500m 정도 내려오면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인 송정리 마을이 있고

그 강을 강을 가로지른 용유교라는 다리가 하나있다.

이 다리 밑에 흐르는 강이 엄천강이고 용유담은 이 강에 있는 한 담()이다.

서암정사 가는 길이라 잠시 머물러 다리 위에서 용유담을 바라보니

소문과 달리 풍광이 그저 그런 계곡과 강이였기에 기념 인증 샷으로 몇 카트 찍고는 돌아섰는데

돌아와서 인터넷을 들치니 다리에서 본 풍경은 하용유담이고

기암(奇巖) 등 볼꺼리는 상류에 있다고 한다. 용유담은 상하의 두 곳이 있는 모양이다






@용유담은 연려실기술별집 권16 지리전고(地理典故)함양의 지리산에 관한 글에서 

 북쪽에 영원동(靈源洞), 군자사(君子寺), 유점촌(鍮店村), 벽소운동(碧霄雲洞), 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고, 흘러 내려가서 용유담(龍遊潭)이 된다.

물은 군()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옛적에는 풍광이 무척 뛰어났던 곳인가 보다.





@용유담은 지리산 천왕봉성모와 연계된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본고장 중 한 곳이다.

용유담이 있는 엄천강의 계원(溪源)은 곧 백무동계곡과 연결되고

백무동계곡은 지리산의 명소로 꼽히는 계곡 중에 하나이다.

우리나라 원시 무속신앙의 원류가 지리산 천왕봉이란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천왕봉 성모(聖母)100의 딸을 낳아 8도의 곳곳에 보내

무당의 주인노릇을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용유담의 전설과도 무관하지 않다.

천왕봉의 성모가 무당의 시조할머니이고, 백무동(百巫洞)이란 이름이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라 한다.

이런 연유로 천왕봉에는 성모를 모시는 성모사(聖母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이 성모는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라거나 옥황상제가 내려준 마야부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원시인의 신앙형태로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 성모상은 천왕봉 밖에도 백무동의 천방산 굴바위와 용류담에도 모셔졌기 때문이다.

이 세 곳은 옛적에는 삼굴(三窟)이라 불리어 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교남지(嶠南誌 1867)성모사는 하나는 지리산 천왕봉 위에 있고 하나는 용유담에 있다.

고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태조의 모후 위숙왕후를 제사지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聖母祠 一在智異山天王峰上一在龍游潭上 高麗李承休帝王韻記云祀太祖母威肅王后)라는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비슷한 내용이 권도용의 천령악부(1905) 및 함양군지에도 나와 있다





@이에 관련하여 용류담 성모상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바둑을 두던 마적도사가 비가 오지 않는데도 물이 붉은 색을 띠며 불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물을 따라 가보니 마고할미가 소피를 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배필이 될 만하다 하여 같이 살며 아흔아홉 명의 딸을 낳아 8도 무당이 되게 했다고 한다.

 

  

 

현재의 백무동으로 오르다보면 계곡 건너편으로 천방산 굴바위 기도처가 보인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이곳에는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머리에 고깔을 쓰고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있었다.

한번 도난당한 것을 백 년 전에 다시 꼭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으나 또다시 도난당하고 말았다.





무당들이 성모에게 제사를 올릴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을을 이루다시피 했고,

밥을 해주고 소를 잡느라고 솥과 그릇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밤이 되어 기온이 급강하하면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유지를 했으므로 풍기문란 문제가 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성모석상은 굴바위와 용류담에서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마지막 남은 천왕봉 석상은 온갖 수난 끝에 현재는 두 동강 난 몸통을 봉합한 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용유담에는 얽힌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용유담가에는 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부쳐 보내면 그 나귀가 어디로인지 가서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등에 싣고 오게 된다.

그 말이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용유담에서 용 아홉 마리가 놀다가 싸움을 시작하였다.

용이 싸우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장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장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와 자연에 도취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마적도사는 듣지 못하고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강변에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고 한다.

나귀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곧 나귀바위다.

마적도사는 나귀가 죽어서 화를 못참고 장기판을 부수어 버렸다.

그 장기판 부서진 조각이라는 돌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용유담은 서암정사 가는 길에 잠시 들린 덤이라 자료가 빈약하다.

어설픈 글 용유담에 얽힌 황준량의 시로 마감한다.

@용유담에서 동년 유자옥과 함께 가다龍遊潭與兪同年子玉偕行

~황준량~

흐르는 물에 복사꽃 가득한 동천의 봄 / 流水桃花滿洞春(유수도화만동춘)

유완이 서로 손잡고 진경을 찾았네 / 聯裾劉阮共尋眞(련거유완공심진)

용유담에서 소매 가득 주옥편 담아가니 / 潭邊袖盡驪珠去(담변수진려주거)

신룡이여 우리들을 꾸짖지 마소서 / 爲報神蛟莫我嗔(위보신교막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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