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기행(2/7) 지리산 조망대 금대암(金臺庵)

2016. 6. 23. 21:43국내 명산과 사찰

함양기행(2/7) 지리산 조망대 금대암(金臺庵)

금대암에 오르면 천왕봉을 비롯하여 지리산 제 봉오리를 조망할 수 있고,

일출도 볼 수 있다기에 아침 식사 이전에 일출 시간대를 맞추려고 서둘러 일찍 금대암으로 향했다.

금대암은 우리가 머물은 숙소에서 20분 정도 거리였다.

그러나 어제 천왕봉을 오르는 날은 날씨가 그리 좋았기에 오늘도 당연히 그렇거라고

막연히 기대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급이굽이 돌아 올라 금대암의 전망대에 오르니

일출은커녕 그런 산이 언제 있었는냐는 듯 지리산은 운무의 바다 속에 숨어 버리고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역시 영산(靈山)은 제 모습을 쉬이 보여주지 않는가 보다.

자욱한 운무 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금대암은 너무 조용했다.

금대산 깊은 자락이기에 그렇겠지만 이른 아침시간대라 인적도 없는 운무 속에 갇힌 금대암은

고요함보다는 음산할 정도로 적막했다. 나한(羅漢)의 도량이라서 그런가.

























금대선원

@금대암(金臺庵)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읍 가흥리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태종 무열왕3(656)에 행호조사(行乎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서 금대사(金臺寺) 라고도 한다.

창건한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506.25 전란때 소실된 뒤 금대암 복구 기성회가 조직되어 중건되었다.

금대암은 신라 도선국사가 참배지로 인정했으며, 고려 보조국사 서산대사가 수도 성취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경내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금대사3층석탑

문화재 자료인 금대암 동종(268), 금대암신중탱화(269),

그리고 경상남도기념물 제212호인 금대암 전나무가 있다.

삼층석탑은 행호가 절을 창건할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탑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탁영 김일손(金馹孫)이 쓴 기행문(1489416)의 기록에

일두 정여창 선생과 함께 산사를 찾으니 20여명의 스님이 정진도량 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뇌계 유효인 선생의 시()중에

'잘있느냐 금대절아 송하문(松下門)이 옛날같구나, 송풍(松風)에 맑은 꿈 깨어 문득 잠꼬대를 하는구려'

라는 시가 남겨져 있는 고찰이다.




운무속의 무량수전


무량수전






지방 문화재 제 269호로 지정된 금대암 신중탱


범종, 지방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진흥원 금대암에 대한 기록을 보면 금대사의 안내판에는 행우(行宇)가 창건했다고 하고 있으나

 행호(行乎)로 나온 곳도 있어 불문명하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나한전을 중창하면서 나한도량으로 세를 떨쳐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430(세종12) 천태종의 판사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 행호(行乎)스님이

안국사와 함께 중창하여 금대사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행호(行乎)스님은 조선 초기의 승려로서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천태종(天台宗)의 영수가 되었으며, 태종이 지은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의 낙성식을 주재하고

장령산 대자암(大慈庵)의 주지가 되었다. 세종 즉위 초에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가 되었으나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 금대사(金臺寺), 안국사(安國寺)와 천관산 수정사(修淨寺)를 중수하고,

1430년부터 1436년까지 강진의 백련사(白蓮寺)를 중수했다.


@금대암 바로 아래에 위치한 안국사는 태종 3(1403)에 행호조사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1947년 소실되었다가 1965년에 중건되었으며 안국사부도가 특이하다.

안국사를 지나 비탈길을 계속 올라가면 산 정상의 구부증선 아래에 있는 암자가 바로 금대암이다.

금대암은 안국사의 옛적 암자였다고 한다.

지금의 안국사는 같은 시대 같은 사람이 창건한 절이지만 사찰의 명맥만 겨우 유지할 정도로 쇄락해 있다.



무량수전 위 전각이 나한전이다.


나한전의 주련은 내가 좋아하는 선시가 걸려 있어 눈이 한번 더간다.

도봉산 망월사의 산신각에도 똑같은 주련이 걸려있다.


<나한전 주련>

白雲淸風自去來(백운청풍자거래)

日落西山月出東(일락서산월출동)

 

@흰 구름 맑은 바람 절로 오가고

서산에 해지니 동산에 달뜨구나.

 

千江流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월)

萬里無雲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

 

@천강에 흐르는 물 위에 비친 천개의 달이요

만리에 구름 없으니 만리가 (푸른) 하늘일세


오호라, 신심명(信心銘)에 이른 저 구()가 이 경지가 아니던가!

一切不留 하여 無可記憶이니 虛明自照 하여 不勞心力이로다



나한전에는 석불 나한이 모셔져 있다.



금대사에 얽힌 유사(1)


 팔월 초칠일 금대사에서 자다 [宿金臺寺八月初七日]

~ 김종직/점필재집~

 

우연히 사찰의 경내에 이르니 / 偶到招提境(우도초제경)

두류산이 그림 병풍처럼 벌리어 있네 / 頭流列畫屛(두류열화병)

서풍은 풍경으로 소리를 내고 / 西風語鈴鐸(서풍어령탁)

남두성은 처마 위에서 자는구나 / 南斗宿簷楹(남두숙첨영)

조용히 새나온 초롱불빛 사랑하고 / 靜愛篝燈吐(정애구등토)

그윽히 여울 물소리를 듣노라 / 幽聞石瀨鳴(유문석뢰명)

세속 일의 시달림을 잠시 쉬면서 / 塵勞暫休暇(진로잠휴가)

애오라지 이로써 내 생을 웃노라 / 聊此笑吾生(료차소오생)



금대사의 유사(2)

금대사에서 묵다.~

이 절은 고승 행호가 머물렀던 곳이다[宿金臺寺寺曾爲高僧行乎所住]

~ 김종직/점필재집~

 

천기 차갑고 낙엽진 석방의 가을에 / 天寒木落石房秋(천한목루석방추)

직무 수행한 여가에 잠시 틈을 내었는데 / 簿領餘閒只暫偸(박령여한지잠투)

담화 속의 팔환은 알아듣기가 어렵고 / 話裏八還聊聽瑩(설리팔환료청영)

조는 가운데 삼매는 우선 즐길 만하구나 / 睡中三昧且優游(수중삼매차우유)

만일 선승을 짝하여 운하 속에 늙어 간다면 / 禪僧若伴雲霞老(선승약반운하로)

어느 여론이 형벌을 주자고 꾀하리오 / 物論誰爲斧鑕謀(물론수위부쇄모)

고금에 공명 다툼이 한 언덕 오소리일 뿐이라 / 今古名場一丘貉(금고명장일구학)

맑은 새벽에 창문 열고 두류산을 쳐다보네 / 曉來開戶看頭流(효래개호간두류)

 

@: 이 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있을때 지은 것임.

@팔환은 능가경에서 나오는 말로 모든 변화상(變化相)은 각각 본처(本處)

인처(因處)로 돌아가는데 8종이 있다는 의미다.

@한 언덕 오소리란 동류(同類)를 의미한다.






금대사 유사(3)

~ 김일손(金馹孫)의 속두류록(續頭流錄)~

 

험한 고개를 넘어 산 중허리를 타고 바른편으로 굴러서 북으로 향하니 바위 밑에 샘이 있기에 두 손을 모아 물을 떠서 마시고, 따라서 세수도 하고 나와 한걸음으로 금대암(金臺庵.금대사)에 당도하니 중 한 사람이 나와 물을 긷는다.

나는 백욱(정여창)과 더불어 무심코 뜰 앞에 들어서니 몇 그루 모란꽃이 피었다.

그러나 하마 반쯤 시들었는데, 꽃빛은 심히 붉다. 그리고 백결(百結)의 납의(衲衣)를 입은 중 20여명이

바야흐로 가사(袈裟)를 메고 경을 외우며 주선하는 것이 매우 빠르므로 내가 물으니 정진도량(精進道場)이라고 한다.

백욱이 듣고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하여 섞임이 없고, 전진이 있고 후회는 없으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나아가서 부처의 공덕을 짓자는 것이다.” 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일이 있으면, 그 무리 중의 민첩한 자가 기다란 목판으로 쳐서 깨우쳐 졸지 못하게 한다.

나는 말하기를, “중노릇하기도 역시 고되겠다. 학자의 성인을 바라보는 공부도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가 없겠는가.”

하였다. 암자 내에 육환(六環)의 석장(錫杖)이 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금대사 유사(4)

무오당적(戊午黨籍) 정여창 연려실기술~

 

김일손(金馹孫)이 일찍이 (정여창)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금대암(金臺庵.금대사)에 이르렀는데

중들의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김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공부하는 방법이 정()하고 잡되지 않으며 진()하여 물러남이 없으니,

우리가 성현을 배우는 데에도 이렇게 공부를 하면 도를 얻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 하였다.




금대사 유사(5)

~진각국사(眞覺國師)의 비명(碑銘)~

지리산(智異山) 금대암(金臺庵.금대사)에 거할 때에

() 위에서 연좌(宴坐)하는데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로 쌓였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마치 마른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죽었는가 의심하고 흔들었으나 반응이 없었으니, 그의 각고(刻苦)는 이와 같았다.

무릇 도()와 함께 정기가 응결되어 생사를 도외시하고

형체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서 누가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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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석탑이 있는 바위 위에 솔이 운무속에 눈팔매짓을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