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8. 20:01ㆍ국내 명산과 사찰
예천기행(5/5) 아미타 목조삼존불탱화로 유명한 예천 용문사(1/2)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법보사찰 예천 용문사(龍門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로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소백산(小白山. 782m)의 줄기인 용문산 남단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에 의하면, 870년(경문왕 10)에
두운(杜雲)스님이 절을 창건하여 용문사라 하였다고 한다.
@두운스님은 생몰연대가 미상이나 신라의 고승으로
883년(헌강왕 9) 에는 소백산에 있는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하신 분이기도 하다.
용문사는 두운스님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절을 짓기 시작했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 하나를 캐어
그것으로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하는 전설도 지니고 있다.
@그 뒤 태조는 936년(태조 19)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성종2년 (983년)에는 청석(靑石)으로 구층탑을 세웠기도 했지만 세월과 더불어 절은 쇠락해졌다.
1165년(의종 19) 조응스님이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다시 건립하고,
1166년에는 의종의 칙명으로 중수를 시작하였고,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기도 했다.
그후 1478년(성종 9)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다시 절 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
1608년(광해군 41)에는 혜명(慧明)이 제하당(霽霞堂)을 중수했고,
1636년(인조 14)에 학문(學文)이 적묵당(寂墨堂)을, 그리고 1637년에는 두인(杜印)이 그 남쪽에 범종루를 지었다.
당시 그 밖에도 광명전(光明殿)이 세워졌다. 그뒤 1783년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린 것을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 등
여러 승려들이 힘을 합쳐 1840년대에 공사를 끝마쳤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45호로 지정된 대장전(大藏殿)을 비롯하여
보광명전(普光明殿)·응향각(凝香閣)·진영각(眞影閣)·명부전(冥府殿)·응진전(應眞殿)·회전문(廻轉門)·
범종루·강원·천불전(千佛殿)·두운암(杜雲庵)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輪藏臺)와 보물 제729호인 용문사교지,
보물 제989호로 지정된 1663년(현종 4)에 목각한 후불탱화(後佛幀畵) 등이 있다.
(출처:한국문학 대백과사전에서)
@보광명전
보광명전 내부 중앙에는 높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지권인을 결한 본존인 진리의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藥師佛)을 함께 모셨다.
보광명전에 봉안된 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상에서는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보광명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부처님 몸 두루하여 시방세계 충만하여
삼세의 부처님은 모두가 한 몸일세
넓고 크신 자비원력 항상하여 다함이 없고
넓고 넓은 깨침의 바다 헤아리기 어렵다네
@신중탱
예적금강穢跡金剛을 중심으로 한 명왕의 무리를 가로로 삼등분하여 중앙에 과감히 배치하였다.
화면의 왼편에는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을 위시하여
아름다운 천녀들이 천상임을 암시하듯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보검을 가로 쥐고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는 위태천(韋馱天)과 여러 무장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위태천은 일명 동진보살이라고도 불린다.
명왕중(明王衆)과 제석(帝釋)∙범천중(梵天衆), 위태천중(韋馱天衆)을 같은 비중으로 두면서
명왕중을 중앙에 배치해 다른 천중보다 우위에 두는 파격적인 구성은
불교의식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보광명전칠성탱>
1884년 6월 용문사에 상궁들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불화불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아미타후불탱, 시왕탱, 신중탱 등 일련의 불화와 함께 제작된 칠성탱이다.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가 중앙에 결가부좌하고
선정인(禪定印)을 한 손바닥위에는 진리의 수레바퀴인 보륜(寶輪)이 놓여있다.
여래의 대좌 밑으로 각각 연꽃과 모란을 든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중단에는 여래의 좌우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七星如來)가 자리하고 있다.
칠성여래가 치성광여래만큼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칠성은 원래 수명신(壽命神)으로 수복연명(壽福延命)은 물론 자식 점지까지 해주는 영험스러운 존재로
민간에서 인식되었다. 종교적 효험으로 인해 칠성신앙이 민간에 깊게 뿌리내리게 되면서
사찰 내에 칠성각(七星閣)이 지어지고 칠성탱이 다량으로 조성∙봉안되었다.
중단 화면의 오른편에 수명을 관장하는 긴 이마의 수성노인과
화면의 왼편에 개덕진군(開德眞君)이 화면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
화면의 하단 양측에는 원류관을 쓴 칠원성군(七元星君)이 홀을 들고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상단 치성광여래의 주변에는 도교적인 신인 28수가 매우 작은 크기로 빽빽하게 모여 있는데
28수를 37위로 그린 것은 매우 특이하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 대응하는 삼각형 구도를
대칭적으로 만들어 수많은 인물을 넣고 있는 이러한 형식의 칠성탱은 19세기 말에 유행하였고,
이 칠성탱 초본은 이후 1911년 직지사 칠성탱이나 1939년의 운암사 칠성탱에서도 보여
20세기 전반까지 경상북도 일대에서 유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지장탱>
지장시왕탱地藏十王幀은 죽은 자의 죄와 고통을 구제하기를 서원한 지장보살과 인간의 전생을 심판하여
사후에 태어날 곳을 정해주는 시왕이 함께 그려진 불화이다.
연화대좌 위에 편하게 앉아 있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4단으로 나눠 권속들을 좌우대칭 하였다.
화면 가장 아랫단의 연화대좌 앞에 선악동자善惡童子가 공양물을 들고 있으며
그 옆으로 원류관을 쓴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승형의 도명존자道明尊者가 합장하고 있다.
그 옆에는, 각각 2위의 시왕이 홀을 쥐고 있으며 윗 단에는 6명의 시왕이 시립해있다.
다시 그 위로는 두루마리를 든 판관, 마두, 우두옥졸의 모습이 보이며4단에는6위의 보살이 지장보살을 향하고 있다.
보광명전 옆에 조성된 포대화상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 145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장전은 고려 명종3년(1173년)에 초창되었고
17세기에 대대적으로 중수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전각 내에는 보물급인 윤장대와 아미타삼존불, 아미타목각탱이 안치되어 있다.
@윤장대
보물 제684호. 높이 4.2m, 둘레 3.15m.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회전식 경장(經藏)으로, ‘전륜장(轉輪藏)’이라고도 불린다.
보광명전 왼쪽의 대장전(大藏殿)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대칭하여 각각 1기씩 놓여 있다.
곧 불단 앞의 좌우 마룻바닥을 단면 8각으로 뚫고 회전축을 세운 뒤,
지도리를 놓아 경장을 받치고 회전축을 천장에 고정시켰다.
윤장대는 대장전이나 장경각(藏經閣)처럼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인 불교 공예품이기도 하다.
현재 기록이나 파손된 몇몇의 사례를 찾아 볼 수는 있지만, 특이한 모습을 갖추고서 완벽한 상태로 남아
현재 보물로 지정된 우리나라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에는 1173년(명종 3)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대장전과 윤장대를 건립하였다고 하였지만,
사적기(事蹟記)에는 1670년(현종 11)에 고쳐 수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윤장대는 1670년 쯤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문사 성보유물관에는 일반 대중들의 참배를 위해 사본 2기를 따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대장전의 아미타불좌상
보물 제989-2호. 용문사 대장전(大藏殿)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목조삼존불좌상의 후불탱으로 봉안된 작품이며
불화인 동시에 조각의 성격을 지닌다. 관련 기록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하단부의 묵서 화기와 2001년 수리 복원할 당시 목각탱에서 발견된
‘백지묵서 용문사금당시창복장기(白紙墨書 龍門寺金堂始創腹藏記)’에 의해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 갑자년인 1684년에 조성되었음을 밝혔다.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높이 265.5㎝, 너비 218㎝의 직사각형 화면 좌우에
봉황, 빛, 구름이 장식된 능형 장식판을 붙인 비교적 큰 목각탱이다.
화면은 세로로 긴 목판 5매를 이었고, 그 상단에 2매, 하단 1매, 중심부 왼쪽 구름만 표현한 목판 1매,
테두리를 장식한 능형판 2매 등 모두 12매의 판목 위에 다양한 존상들이 조각되었다.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팔대보살과 사천왕,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삼단으로 배치되었다.
불상의 윗면에는 아미타불 머리 위로 상서로운 구름이 뻗쳐나가고
존상 간의 구획 및 여백에는 연봉, 연잎, 넝쿨가지를 새겨 화면을 가득 메웠다.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는 상 높이가 46㎝로 조선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배모양의 광배를 갖추었으며 방형의 얼굴에 변형통견식 대의 그리고 평면적인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2, 3단에 위치한 팔대보살은 본존불과 비례, 얼굴, 옷 표현 등은 유사한데 민머리형의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손에는 각기 다른 지물을 쥐고 서 있다.
여의가지와 연봉우리를 든 문수와 보현, 정병과 경책을 든 관음과 대세지, 금강저와 검을 든 금강장과 제장애,
연꽃모양 용화수와 연봉우리를 각기 든 미륵보살과 석장과 보주를 든 지장보살이 표현되었다.
이 보살 가운데 미륵과 제장애보살은 복부에 복갑과 무릎 갑대를 착용하고 있어 복식에서 조금의 차이는 있다.
미륵과 지장보살 옆에는 늙은 가섭과 젊은 아난이 측면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합장하였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장검을 든 동방지국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증장천왕, 비파를 든 북방다문천왕,
당과 보탑을 든 서방광목천왕이 투구나 보관을 쓴 무인의 모습으로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데 그 자세가 매우 역동적이다.
이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의 가장 큰 특징은 사각의 화면 틀에 장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은 명문과 화기로서
좌우와 하단의 틀에 만(卍), 명심(明心), 범어 옴자, 그리고 팔괘(八卦)를 새겼다.
외곽의 좌우 틀에 적힌 글은 ‘대우주 안의 무량한 찰토, 삼세의 공과 색은 원만한 법, 미래 극락세계의 연지에 구품,
아미타삼존과 성스러운 스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극락세계의 구품왕생에 대한 내용이다.
명심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흔들리지 않는 밝은 마음을 말한다.
또한 다양한 연꽃, 연봉우리, 연잎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천개조차 연꽃을 뒤집은 모양으로 표현되는 등
아미타극락회를 극대화시켜 형상화하였다.
상단부의 빛과 구름들이 뻗어나가는 곡선도 동세가 강하여 역동적이다.
대장전수미단 중앙에 아미타불을 위시하여 좌우협시로 관세음, 대세지보살이 봉안 되어 있는
용문사 대장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아미타극락회상 장면을 조각으로 극대화시켜
형상화한 작품으로 정교함과 역동성, 평면적이면서도 입체성을 가진 우수한 목각탱이다.
이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1684년 소영당대사 신경이 총괄 책임하에
금당, 목조아미타삼존상과 동시에 제작되었는데,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명부전주련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恒河沙劫難說盡(항하사겁난설진)
見聞瞻禮一念覺(견문첨례일념각)
利益人天無量事(이익인천무량사)
지장보살 위대하신 신통함은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려워라
보도듣고 우러러 예배의 일념으로 깨달았네
사람과 하늘에 이익되는 길 헤아릴수 없구나
천불전
@산신각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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