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19. 16:48ㆍ국내 명산과 사찰
북한산 노적사
북한산 하면 떠오르는 시(詩)가 하나있다.
옛적에는 너무나 귀에 익었던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충의가(忠義歌)>라는 시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古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다가가,
척화신(斥和臣)으로 몰려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불모로 잡혀 갈 때 지은 시(詩)다.
그 삼각산이 지금의 북한산이다.
@북한산(北漢山)은 서울특별시 강북구·도봉구·은평구·성북구·종로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양주시·의정부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835.6m(2013년 6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산으로,
이름은 조선 후기시대 때 한성의 북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북한산은 1억 7천만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이곳은 최초 백제땅으로 지역명으로 한산이었고,
산의 명칭으로 31년 이후 횡악(橫嶽)이라고 하였다.
고구려가 475년 백제로 부터 이곳을 정벌하여 지역명으로 북한산주이라 칭하고 산명은 그대로 횡악으로 불렀다.
신라가 이곳을 정벌하고(553년)난 후 557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라 칭하였다.
신라는 횡악을 부아악으로 고쳐부르고, 이곳 북한산주 부아악에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다.
비봉에 세워진 비가 바로 진흥왕순수비다.
백제 초기에는 횡악(橫嶽), 신라때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이후 부아악(負兒岳)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에는 부아산이라 불렀고,
고려 시대에는 993년 이후 때 부아봉(현 인수봉 810.5m), 중봉(현 백운대 835.6m),
국망봉(현 만경대 800.6m, 국토지리정보원) 세 봉우리가 모여 있어
삼각(三角)처럼 보여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려왔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에 축성(築城)한 중흥산성을 보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축성(1711년)한 이후
한성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별칭으로 사용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로 점차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삼각산의 삼봉(三峯)중 국망봉(망경대) 바로 앞에 노적봉이란 거대한 흰 바위산이 있다.
백운대와 만경봉 그리고 노적봉을 조망하면 역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노적사는 노적봉 바로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노적봉(露積峰,715.5)은 고려시대 적석봉(積石峰)이라고 불린 산이다.
그후 적석봉이 노적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적봉(露積峯)의 노적이란 말은 이슬이 쌓이는 봉우리란 뜻이다.
바위의 흰빛이 마치 이슬을 머금은 듯, 서린가 낀듯 같아서 붙인 모양이다.
노적사는 도선사만큼 잘 알려진 사찰은 아니지만 북한산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끌고 있는 사찰이다.
최근에 지은 적멸보궁은 북한산에서 유일한 적멸보궁이라
적멸보궁에 관심있는 불자들의 내방이 증가하고 있다.
@북한산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어있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다.
노적사가 창건 된 원래 목적은 북한산성내의 중성문 일대를 관리하는 승영사찰이었다.
이 산성은 조선시대 숙종39년(1711년)때 고려시대의 중흥산성을 바탕으로 축성된 산성이다.
북한산성을 숙종37년(1711년) 4월 3일부터 동년 10월 18일까지 약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시대 초기에 처음 축성돼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수없이 증개축 되어 왔던 산성이다.
축조당시는 산성에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御駕)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고,
이곳의 성곽 및 군영을 관리하가 위해 승군을 주둔시킨 13개의 승영사찰을 두었는데
노적사는 이때 세운 13개 승영사찰 중 하나로 주로 중성문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노적사는 북한산성 축성 그 다음해인 조선 숙종 38년(1712년) 성능(性能)스님에 의해 창건 되었다.
창건될 당시 사명은 <진국사(鎭國寺)> 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쇠락하여 흔적만 남아 있다가
1960년 무위스님에 의해 중창되면서 이름이 노적사(露積寺)로 바뀌었다.
(보림루)
노적사의 창건주 성능스님이 집필한 옛 문헌 <북한지>의 기록을 보면
「노적사는 노적봉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85칸으로 노적봉 아래쪽 중성문 안에 있다.」 고 되어 있다.
처음 창건될 당시는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범종각)
30년 넘게 긴 세월을 북한산성과 함께 살아온 성능스님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여러 사찰의 증설,
승병의 모든 관리를 시종일관 감독하였는데, 영조 21년(1745년) 북한산성을 떠나 남쪽 화엄사로 내려간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섭에게 자신이 관장했던 모든 사무를 인계하고 그 사실들은 종합하여
한 권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14개 항목으로 분류한 책이 바로 <북한지>이다.
<북한지>는 숙종 당시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의 과정을 중심으로
1745년(영조21년)에 성능스님이 기록한 삼각산내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지리서인 셈이다.
(보림루)
2층으로 된 이 누각은 1층은 동인당, 2층은 삼보전의 편액이 걸려있다.
(삼보전 내부전경)
삼보전 앞에서 바라 본 노적봉
대웅전에 올라 내려다 본 전경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高陽 露積寺 石獅子像)
노적사의 적멸보궁의 좌측에 석사자상이 있다. 정식 명칭은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高陽 露積寺 石獅子像)>이다.
노적사는 북한산성 내 전통사찰로 조선 숙종 38년인 1712년 성능스님이 진국사(鎭國寺)라는 이름으로 최초 창건했지만
이후 폐사돼 흔적만 남아 있던 자리에 1960년대 무위스님이 중창하면서 사찰의 이름을 변경했다.
이 돌사자는 1970년대 노적사 입구에 주둔했던 군부대에서 막사를 건축하면서 출토됐다고 전한다.
<노적사 석사자상>은 방형의 가까운 몸통과 대좌, 신체에 비해 간략해진 다리의 표현 등을 통해
조선말~근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어 옆면을 응시한 모습,
머리부터 목선까지 조각된 갈기, 두터운 눈썹 아래에 툭 불거든 두 눈,
다문 입술 사이로 드러난 뾰족한 뻐드렁니 등의 표현에서 사실적이며 해학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석사자상은 현재 정확한 제작 시기는 파악할 수 없지만 출토지가 노적사 인근이라는
점과 조선말~근대에 돌로 만들어진 사자상의 예가 많지 않다는 점,
또 당시의 사자상에 대한 양식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북한산성 내 문화유산의 다양성을 알려줄 수 있다는 점 등을 인정받아
현재 고양시 향토문화재로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좌측 전각이 적멸보궁이 있는 대웅전이고 우측 전각은 극락전이다.
극락전
약사미륵보살상과 우측 전각이 나한전이다.
나한전 내부전경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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