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나들이 인천 차이나타운

2016. 3. 26. 15:39국내 명산과 사찰




일요 나들이 인천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찾아 가 보왔다.

인천차이나타운은 이름과 달리 먹거리만 많은 곳이라 알려져 별 볼꺼리가 없을꺼라 생각되었지만

전철1호선을 타고 종점에 내려 역을 나와 길만 건너면 되니 교통이 번거롭지는 않을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일요일이지만 비소식도 있는 흐린 날이라 무료하기도 했지만

관광지로 새롭게 단장 했다는 소리가 내 호기심에 한 몫을 했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화교들이 살고 있는 집단 거주지다.

()는 중국인을 가리키고 교()는 잠시 거주한다는 의미다.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는 의미다.

  



  

@인천역(仁川驛)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1가에 있는

수도권 전철 1호선, 수인선의 시발역이며 종착역이자 또한 환승역이다.

1899918일 경인선 철도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974815일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과 함께 전철역이 되었다.

부기역명은 차이나타운이며 길 건너편에 차이나타운 입구가 바로 있다.

 

@인천이 우리역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것 중 하나는

인천역이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라 불리는 경인선철도가 개설된 곳이기 때문이다.

경인선철도는 18973.22일 인천역을 시발점으로 이곳에서 착공되어

18999.18 노량진역까지 개통된 역으로 길이는 33.8km 이다.

이때 운영되었던 첫 기차는 <모갈 1>로 불리는 증기기관차였다.

이 증기관차는 미국 브록스사에서 제작한 4대가 반제품을 들어와

인천에서 조립되어 투입되었다고 한다.

인천역 입구의 위의 조형물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져 있다.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연기 나는 곳에 화교가 있다.

한 그루 야자나무 밑에는 세 명의 화교가 있다.등의 비유가 나올 만큼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화교의 수는 대단하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남아시아,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등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의 수만도 약 4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광동, 복건성계가 많지만, 최근에는 상하이나 베이징계 화교도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출신지와 거주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며, 최근에는 표준 중국어와 영어도 널리 쓰이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주로 광동, 복건 등의 화남 지방 출신이 많으며,

 소수민족이면서도 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현지의 정치, 경제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화교들은 다른 나라와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계된 경우가 많으며, 화교들끼리 서로 단합하여 성장하기도 한다.

또한 화교 중에서는 다른 국가에 오래 머물러 혼혈이 많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의 화교는 그 나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중 다수가 현지 국적으로 바뀌고 2·3세가 늘어남에 따라

지금은 현지 국적을 가진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자

이들을 화교와 구별하기 위해 화인(華人)이라 부르기도 한다.






1929년 청나라 헌법과 1929년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 부른다.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화교가 들어온 시기는 그 역사가 상당히 깊다.

중국의 상서대전(尙書大傳)과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따르면

중국인이 한국에 건너와 살게 된 것은 고대 은, 주나라시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화교사회가 정식으로 형성된 것은 19세기인 1882(고종19) 임오군란 이후로 기록된다.

이 임오군란시 일본군의 개입에 대해 청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해

광동성 수사제도(水師提都)인 오장경(吳長慶)을 선봉장으로 3척의 함선에 3000여명의 군대를 보냈는데

그때 40명의 화상(華商:중국상인)들이 함께 들어왔다.

이들 40명의 화상들이 이 땅에 정착한 첫 화교의 시작이며

이로서 우리나라의 화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도 하였다.

그 후 18844"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이곳에 세워졌다.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기에

이곳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가 된 것이다.




중국인들이 1925년에 건립해 사용한 중국신 점포건축물은 주상복합건축물로

대개의  화교인들은 중국요릿집, 상가, 주거로 사용하고 있다.

연와조의 2층 벽돌조 건축물로 각각의 공간이 연속되어 있고

중국 특유의 원색을 사용해 화려한 색채를 강조했으며 박공형 지붕, 목조 청풍차양, 개발형 발코니가 특징이다.



@위 사진에서 좌측 계단에서 오르는 길을 스카이힐이라고 부르고 있다.

차이나타운 3패루(선린문)을 지나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조성된 계단으로 양 옆에 자금성, 만리장성, 갑골문자, 경극, 우슈, 팬더 등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자유공원에 오르면 멀리 인청항의 전경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패루(牌樓)란  

절에 가면 속()과 비속(非俗)의 경계를 표시하는 일종의 경계표시가 되는 일주문이 있듯이

중국 건축물에는 이와 비슷한 경계표시로 패루(牌樓), 또는 패방(牌坊) 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을 짓는다.

이는 중국의 독자적 건축양식으로서,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의 건축물로 궁전이나 능()을 비롯하여

절의 전면(前面)에 세우거나, 도시의 십자로 등에 장식 또는 기념으로 세운 것인데

기둥은 두 개 내지 여섯 개이며, 지붕을 여러 층으로 얹은 것을 말한다.


   

 

패루로 오르기 전 오른쪽에는 인천교회가 있는데 인천에서 중국어로 예배를 보는 곳이다.

원래 이곳은 1917년에 설립된 중화기독교 터로 한국에 세웠어도

중국 본토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 교두보 역할을 하였기에

선교사들이 매우 오고 싶어 하는 교회의 하나였다고 한다.

 

 

처음 계단을 오르면 양쪽 면에 자금성내의 태화전과 만리장성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중간 의자부분에 앉아 사진을 찍으면 옛날 진나라 병사가 양쪽에서 호위하는 용상에 앉은 모습이 나온다.









특별한 중국 건축물 앞에는 이런 돌기둥을 세운다. 이 돌기둥을 화표라고 한다.

(화표에 대해서는 뒤에 기술한다.)






@선린문(善隣門)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이 선린문(善隣門)이라는 페루다.

선린문은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자는 뜻이며, 또한 옛날 이곳의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선린문 좌우측 벽에는 초한지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타일공예로 묘사되어 있다.


@벽화는  길 양쪽의 벽면에는 초한지에 나오는 중요인물과 장면들을 설명과 함께 타일로 제작하여 장식한 것이다.

초한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림으로써 알 수 있는 총 80여컷의 장면이 있는데

차이나타운을 찾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눈요기를 제공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본 선린문


계단을 올라서 뒤에서 본 선린문, 앞 뒤가 동일한 모양이다.



선린문을 지나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에 선 정자


자유공원에 오르면 인천항만을 조망할 수 있다. 불행히도 날이 너무 흐려 시야가 흐리다.

자유공원 안에는 익히 알려진 한국전쟁의 영웅이며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인 맥아더장군의 동상이 있다.













@자유공원에는 몇개의 정자가 있는 데 그 중 하나인 연오정이다.

연오정은 인천에 사는 조길씨라는 분이 부친을 기리며 1960822자유공원에 세운 정자로

육이오 동란시 인민군에 의해 쇠사글에 묶여 사살당한 슬픈 역사의 흔적을 지닌 정자라고 한다.




@석정루(石汀樓)

이 정자는 역사적인 큰 의미는 없고 인천의 유지이며 삼화조선의 이후선(李厚善)사장이란 분이

이곳 자유공원에서 건강을 위해 30여년을 소일했던 것을 보원한다는 의미로

19666.23일 자신의 호 석정(石汀)을 따서 이 정자를 짓어 인천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현판은 서예가 박세림의 작품이라고 한다.



석정루에 올라 내려다 본 인천항만. 날이 너무 흐려 시야가 좋지 않았다.



아래 사진들은 선린문을 내려와 다른 입구쪽으로 내려오면사 둘러 본 풍경이다.





이 한중문의 좌측에 멋진 팔선도의 벽화와 2기의 화표가 있다. 




@화표(華表)

차이나 타운에는 천안문에 세워져 있는 것과 같은 화표(華表) 4기가 세워져 있는데,

둘은 선린문에 둘은 화중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화표(華表)는 고대 제왕이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궁밖에 간고(諫鼓)을 세우고,

길가에는 방목(謗木)을 세웠는데 이는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던 우리나라의 신문고와 같은 것이고,

방목은 세월이 흘러 나무대신 돌로 대치되고 그 의미도 형이상학적이고

신비한 것을 즐겨하는 중국인의 속성답게 매우 다양해 진 것이 지금의 화표라고 한다.



  

  

화표는 주두(柱頭; 머리부분), 주신(柱身; 몸통부), 기좌(基座:기초)3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기둥(화표) 위에는 횡으로 구름 모양의 운판(雲板)이 있고

그 위에 쟁반같은 석판이 있는데 이를 화개(華蓋)또는 승로반(承露盤)이라고 한다.

도교에서는 승로반에 이슬을 받아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하는데

특히 도교를 숭상한 한무제(漢武帝)는 하늘에서 내린 감로수라 하여 불로장생약으로 여기고 마셨는데

이에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승로반 위에 후()라는 동물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승로반(承露盤) 위에 앉아 있는 후()라는 동물은 용의 9번째 자식이라고 하는 설(),

() 과의 동물인 후()라는 설이 있다.

()는 사리에 밝은 품성을 지니고 있는 동물로 고개를 조금 들고 있는 것은

천자가 백성을 살피기 위해 궁은 나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하여 망천후(望天犼)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시 이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즐기는 중국인들의 상징물중 하나인 신수(神獸)인 것이다.



화표의 뒤 벽화에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8명의 신선을 그린 팔선과해라는 그림이 타일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팔선도

팔선도(八仙圖)는 종리권(鍾離權),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조국구(曹國舅),

여동빈(呂洞賓), 이철괴(李鐵拐), 남채화(藍采和), 하선고(河仙姑) 8인의 신선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문학작품에서 여러 사람을 지칭할 경우 등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팔선이란 곧 군선(群仙) 또는 모든 신선을 상징하는 의미를 내포하며

가난, 부귀, 귀족, 평민, 늙음, 젊음, 남성, 여성 등 삶의 모습을 다양하게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팔선도의 연원 및 변천

각각의 팔선에 대한 개별적인 고사는 중국 당송 문인의 기록에서부터 나타나다가

팔선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인 것은 원대의 일이다.

청대 조익(趙翼)해여총고(陔余叢考)에는 이들 팔선이 그려지기 시작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지만

원나라 이전에는 그려진 것이 없어 원나라 때에 비로소 팔선도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중국의 도교사원인 영락궁(永樂宮)의 벽화 중 원나라 때에 그려진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

바다를 건너는 팔선의 모습을 표현한 최초의 예로서, 하선고 대신 서선옹(徐仙翁)이 표현되어 있다.

이후 서선옹이 하선고로 대치되고 하선고가 팔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명대 이후이며,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팔선도들은 대개 하선고가 포함된 팔선들이 주로 그려지고 있다.


이들 이외에 용성공(容成公), 이이(李耳), 동중서(董仲舒), 장도릉(張道陵), 장군평(蔣君平),

이팔백(李八百), 범장생(范長生), 이주선생(爾朱先生) 등의 촉나라 팔선이 있으며,

두보(杜甫)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노래한 이백(李伯), 하지장(賀知章),

이적지(李適之), 소진(蘇晉), 최종지(崔宗之), 장욱(張旭), 초수(焦遂) 등의 팔주선(八酒仙)도 있다.



종리권은 팔선 중의 우두머리로서 순양자 여동빈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때 사람으로 장년의 모습으로 도복을 입고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부채, 주로 파초선을 들고 있다.


조국구는 송나라 태후의 동생으로 중년의 모습이며 관복을 입고

 벼슬을 한 사람의 상징인 박판을 든 도상으로 묘사된다.


장과로는 당나라때 방사(方士)로 늙은이의 모습이며 나귀를 거꾸로 탔거나

혹은 어고간자(漁鼓簡子 : 죽통(竹筒))를 든 모습으로, 때로는 박쥐를 동반하기도 한다.


철괴리는 철괴를 든 불구의 거지형상으로 연기나는 호로병을 들고 서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한상자는 9세기경의 실존 인물로 항상 피리를 불고 다녔다고 하며,

대개 피리나 어고간자를 가진 젊은이로 묘사된다.


여동빈은 당나라때 사람으로 화양건(華陽巾 : 도가(道家)나 은거 생활을 하던 사람이 쓰던 쓰개을 쓰고

칼을 등에 메거나 들고 있는 서생의 모습으로 조선시대에 팔선 중에서도 단독으로 즐겨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팔선 중 유일한 여선인 하선고는 역시 당나라때 사람으로 연꽃줄기나 국자를 든 젊은 여인의 도상으로 나타난다.


남채화는 당말기의 은사(隱士)로 누더기 적삼을 입고 꽃바구니 혹은 꽃을 든 젊은 선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돌아나오는 길 구석에 의선당이란 곳이 있었다. 인천 개항 후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불어남에 따라

교화 및 정신적 안녕을 기리는 중국식 사당으로 산동지방의 도교 식으로 1893년경 세워졌다고 한다.

안에는 사후 안식을 기원하는 관음보살, 돈을 벌어준다는 관우상, 자식을 점지해준다는 삼신 할미상,

중국을 왕래할 때 뱃길의 안녕을 보살펴 주는 용왕상,

그리고 원행길이나 산길을 보호해 준다는 호산할아버지(산신령)의 다섯 분이 모셔져 있다.

한국전쟁 후 화교들의 수도 줄어들고 찿는 이들이 줄어들며 무술수련장으로도 쓰이다가,

20065월 수리를 거친 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날도 흐린데다가 실내가 어둠침침하고 설상가상으로 입장도 막아서 사진촬영도 못하고

간신히 양해를 구해 눈팔매짓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