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1. 12:05ㆍ국내 명산과 사찰
신라 구산선문 사자산문파의 효시 영월 사자산 법흥사(1/2)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의 한 곳으로서 대표적인 불교성지인 법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신라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裟)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월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한 절이 흥녕사(興寧寺)다.
@법흥사(흥녕사)의 일주문 편액에 <사자산문 흥녕선원>이 걸린 것은
신라 말에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의 문하인 보원대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았던
신라의 선승 도윤 철감선사(澈鑒禪師)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이
886년 흥녕사를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도량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라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도윤(道允)선사는 798(원성왕14)에 태어나 868년(경문왕8))에 입적한 신라의 승(僧)으로
호는 쌍봉(雙峯), 속성은 박(朴)이며 그의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 탑호는 징소(澄昭)다.
18세에 출가하여 귀산사에서 화엄경을 연구하였으며, 825년(원덕왕17) 당에 가서
마조도일 문하의 보원(普願)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문성왕9년(847)에 귀국하여
전남 능주(綾州, 현재의 화순군)의 쌍봉사로 가서 크게 선법을 펼치고
그의 제자 절중(折中)에게 전하니
절중은 그의 선풍을 이어받아 사자산파(獅子山派) 창건하여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가 되었다.
도윤의 제자인 절중은 사자산 석운선사(釋雲禪師)의 초청으로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사자산 흥녕선원(현 법흥사)에 머물면서 882년 산문을 개창하였다.
당시 신라의 왕실은 이 절을 중사성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할 정도로 지극한 관심을 보였는데,
산문이 번창할 때는 2,000여 명이 넘는 스님들이 수행했으며,
공양 준비를 위해 쌀을 씻으면 10여리 밖에 떨어진 수주면 무릉도원까지 그 물이 흘러갔다고 한다.
그러나 절중은 왕이 그를 국사(國師)로 봉하고자 하였지만 신라 왕실의 귀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절중은 스승과 달리 당에 유학함이 없이
화엄학(華嚴學)의 무애법계연기(無碍法界緣起)에 입각한 깨달음을 홀로 터득했다.
이는 일찌기 그의 스승 도윤스님이 마조 도일(馬祖 道一) 문하의 남전 보원(南泉 普願) 스님에게 선법을 배울 때
보원 스님은 첫눈에 도윤 스님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법을 전한 후
“우리 종의 법인(法印)이 모두 동국(東國)으로 간다”고 찬탄했다고 <조당집> 전하듯
달마 혜능에서 비롯된 선법이 해동불교에서 꽃피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화엄학에서 출발해 선(禪)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해동불교의 우수성을 말하는 또하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족으로 도윤선사가 첫 출가한 귀산사(龜山寺)를 소개하면
귀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676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한다.
신라 말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圓明)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 춘봉(春峯)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명부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주요문화재로 귀신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62)·귀신사부도(지방유형문화재 63)·
귀신사석수(지방유형문화재 64) 등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
@법흥사 일주문(一柱門)
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법흥사의 일주문 기둥에는 코끼리와 거북이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하며 사자산문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조성되었다.
편액은 전면은 <사자산 법흥사>이고 후면 편액은 <사자산문흥녕선원>이 걸려있다.
일주문천장인데 무엇을 상징하는 지?
그러나 흥녕사는 891년(진성여왕 5) 병화로 소실되었고,
944년(혜종1)에 중건하였으며,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고,
1730년 조선 영조 6년, 1778년 조선 정조2년, 1845년 조선 헌종 11년까지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소실(燒失)과 중창(重創)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일주문 좌측 언덕에 세웨진 일주문건공비)
그 뒤 다시 불타서 천년 가까이 소찰로서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에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흥녕사를 중건하고 사찰명을 법흥사로 개칭하였다.
1912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된 뒤 1930년에 중건하였으며,
1931년의 산사태에 옛 사지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어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 중수하였다.
@ 원음루(圓音樓)
원음(圓音)이란 말은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음성을 말하며 곧 부처님의 말씀을 일컫는 말이다.
법흥사의 2층 누각으로 조성된 법흥사의 원음루는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사물인 법고(가죽 걸친 짐승),
운판(날 짐승과 허공을 떠도는 영혼), 목어(물속에 사는 생명)가 2층에 마련되어 있고
1층은 금강문(金剛門)의 편액이 걸려있다. 금당(金堂)으로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가 된다.
예불시간에 이 소리들을 법계에 울리는 뜻은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고
깨달음의 진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징효대사 보인탑비(보물 제612호)
징효대사 절중 스님(826~900)은 신라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도윤 스님(798~868)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보인탑비는 절중 스님의 행장과 신라 효공왕이 ‘징효대사’라는 시호와 ‘보인’이라는 탑명을 내린 것 등을 적고 있다.
@@절중(折中)은 826년(흥덕왕1)~900년(흥덕왕1). 신라말기의 승. 시호는 징효대사(澄曉大師). 선당(先幢)의 아들.
7세에 출가하고, 15세에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882년(헌강왕8) 왕명으로 곡산사(谷山寺)에 있다가 석운(釋雲)의 청으로 여러 학자와 사귀어 명성이 높았으며
진성여왕이 국사로 봉하려하였으나 사퇴하였다. 탑호는 보인(普印) 고려 혜종 때 비가 세워졌다.
@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하며 이곳에는 징효대사 스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사리탑 옆으로 오랜 밤나무(500여년)가 함께 도량을 지키고 있어 세월의 깊이와 숭고한 멋을 느끼게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대웅전, 무설전(無說殿), 요사채 겸 공양실인 심우장(尋牛莊)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1939년에 중수하였으며,
법당 안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있다.
이 적멸보궁 좌측 뒤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토굴이 있고
좌측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넣고 사자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石函)이 남아 있다.
적멸보궁 뒤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가 있다.
토굴은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었고,
봉토를 올리기 위하여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
내부구조로 보아 고려시대에 축조 또는 보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의 높이는 160㎝, 깊이 150㎝, 너비 190㎝이다.
이 밖에도 보물 제612호인 영월흥령사징효대사탑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된 징효국사부도(澄曉國師浮屠)와 패엽경(貝葉經)이 있다.
이 중에서 패엽경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인도에서 영라수(靈羅樹) 잎에 경전을 기록하였던 것으로,
앞뒤 가득하게 범어로 쓰여져 있는 희귀한 것으로, 본래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봉안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공산 치하를 피하여 한 승려가 남한으로 가지고 내려왔다.
그 후 30여 년 동안 행방이 묘연하다가 부산의 한 절의 주지가 신도로부터 얻어 법흥사에 봉안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범종각
대종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을 치는데
우리나라 종은 특히 소리가 아름답고 여운이 길다.
종을 매단 부분을 용뉴라 하는데 용의 모양을 하고 있고, 종을 치는 나무는 당목이라 하여 물고기(고래)모양을 하고 있다.
옛날에 바닷가에 용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포뢰용이라는 용이 잘 울고 고래를 무서워했다.
그 울음소리가 마치 종소리와 같았다고 해서 종 위에 용모양의 용뉴(龍鈕)를 만들게 되었으며 ,
고래를 무서워해 고래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종을 치게 되었다.
@조사전
조사전은 조사스님, 사찰의 창건주 그리고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 국사전, 국사당, 영각, 조사각 등으로 부른다.
특히 선종사찰에서는 한 종파를 개창한 조사스님과 그 사법(嗣法) 제자들은 그 사찰의 상징적 존재이기에 영정을 봉안한다.
교종은 경전에 의거한 문헌적 해석을 중시하지만, 선종은 직관을 통한 실천수행을 강조하기에 스승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징효대사의 스승 철감국사는 전남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하여 그곳에 승탑을 모셨으며,
그의 제자 징효대사는 사자산문을 크게 중흥시킨 후 스승 도윤철감국사를 사자산문의 개창조로 모시어 세웠다.
법흥사의 조사전내부에는 자장율사와 징효대사를 모셔놓았다.
우측 한 칸이 비어있는 것은 후일 사자산파의 개조인 도윤 철감국사를 모시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성각
삼성 신앙은 불교가 우리 민중의 생활과 정신에 깊숙이 토착화됨을 말해주는 곳이다.
칠성님 또는 칠원성군님, 독성님 또는 나반존자님(홀로 깨달아 아라한의 경지에 이름), 용왕(물의 신)을 모신 곳이다.
@대웅전
법흥사는 불사(佛事)중이라서 그런지 전각에 편액이 걸린 곳이 많지 않다.
전각 안내서를 보면 대웅전만 나와 있고 극락전은 없는데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이다.
법흥사의 대웅전 격인 전각 안에는 주불로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보통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을 극락전(極樂殿) 이라고 한다.
법흥사의 본사격인 월정사도 석가모니불을 모시면서 법신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적광전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법흥사의 대웅전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보살로서 봉안되어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지장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만다라전(曼茶羅殿)
만다라는 티베트 불교인 밀교에서 발달한 우주 진리의 법신세계를 나타낸다.
원래는 가는 모래로 색깔을 입혀서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였다고 한다.
신성한 단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하여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다.
원래는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컫는다.
여기에 조성된 만다라는 2003년 방한한 티베트 스님들이 법흥사 법회 때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범어로 Mandala라고 한다. Manda는 ‘진수’ 또는 ‘본질’이라는 뜻이며 접속어미 la는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다라의 본래 의미는 본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불화를 뜻한다.
또한 만다라는 다양하게 전개된 각종 신앙형태를 통일하는 원리에 입각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불화를 뜻하기도 한다.
만다라의 성립은 밀교(密敎)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사회 구제를 표방하며 이전의 불교가 용인하지 않았던 재래신앙의 요소를 불교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사상체계를 갖추고 탄생한 밀교는 보다 많은 보살(菩薩)을 출현시키고
인도 재래의 신들까지 수용하여 그들의 상(像)을 만들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만다라는 크게 양계만다라(兩界曼茶羅)와 별존만다라(別尊曼茶羅)로 나뉜다.
양계만다라는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와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를 지칭하는데,
이 둘은 밀교의 2대 경전인 ≪대일경 大日經≫과 ≪금강정경 金剛頂經≫을 근거로 하여 그리는 불화로서
만다라의 양대 기둥을 이룬다.
심우당
현심당
~적멸보궁은 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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