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 17:59ㆍ명승지
부여기행 (4/4) 궁남지 연꽃축제(1/2)
이번 부여기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궁남지의 연꽃이다.
몇 년을 벼루고 벼렸지만 기회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궁남지의 연꽃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큰마음 먹고 집을 나썼다.
연꽃하면 경기일대에서는 유명한 세미원과 관곡지가 있어 매년 즐겨 찾지만
이번은 궁남지의 연꽃축제가 끝나는 마지막날이 마침 일요일이라서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비소식도 있었지만 달리 선택할 기회가 없어 알면서도 떠났다.
다행히 날은 내내 흐렸지만 큰 비는 내리지 않고 조금 뿌릴 정도였다. 하늘이 도와 준 모양이다.
모처럼 찾아간 궁남지연꽃은 기대가 커서 있지 욕심이 많아서 인지 분량이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했다.
궁남지(宮南池)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지(宮苑池)이다.
별궁 인공 연못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연못의 동쪽 일대에는 대리석을 팔각형으로 짜 올린 어정, 기와편,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
1964년 대한민국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궁남지에 대해서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년)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되어 있다.
백제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발굴된바 있다.
《삼국사기》무왕 37연조에는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39년조(年條)에는 "3월에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 붙은 이름이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규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造景)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서동요 이 노래의 해독은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남몰래 사귀어 두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薯童房乙) 밤에 뭘 안고 가다(夜矣 夗[卯]乙抱遣去如).”
그동안 이 노래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이제 올바른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이 노래는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지만, 그 표현수법에 있어서 특유한 비법을 활용하였다.
「서동요」는 무엇인가 감추는 표현으로 일관되어, 이른바 감추는 묘법, ‘감춤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은 눈부신 존재로 절대적 주인공의 위치에서 군림하고 있다.
그러한 공주가 ‘남몰래 얼러(他密只 嫁良)’ 바로 몰래 간통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여기서 그녀는 절대적인 요정으로부터 사랑의 화신으로 변모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조용히 감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주는 그 상대를 감추어 ‘두고(置古)’ 내어 놓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오롯하게 확보하고 있는 안정감을 드러낸다.
그런 가운데에 ‘서동방(薯童房: 서동의 방)’이 갑자기 등장하여,
그 공주의 상대가 겨우 서동이요 그들의 야합처가 바로 그의 방인 것을 확인시킨다.
공주는 금지옥엽의 몸으로 미천한 서동과 결합하여 파격적인 충격을 주면서,
그가 숨어 있는 밀실로 찾아간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과 만남의 현장을 감추기 위하여.
‘밤에(夜矣)’ 비로소 행동을 개시한다.
이 밤에 공주는 ‘무엇을(卯乙)’가지고 갔는가.
이것은 이 노래의 큰 관심거리로서 그 ‘무엇’의 실상을 끝까지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이 노래의 함축미와 신비성이 그 ‘무엇’에 매여 있다.
이 공주는 그 ‘무엇’을 ‘안고(抱遣)’ 가는 것이다.
이 ‘안고’는 그 대상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직접 교감하면서 가슴 속 깊이 감추고 있음을 명시한다.
드디어 공주의 ‘가다(去如)’로 이 노래는 끝난다.
그것은 공주가 ‘간다’는 긍정적 종결이 아니고, ‘가는가’라는 의문형 종결이다.
이 노래에 일관되는 감춤의 문맥으로 보아서 감탄성 의문형이라야 맞는다.
마지막 어미를 이런 의문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노래는 긴 여운을 남기며 끝까지 감춤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사랑의 주사’로 승화된 것이다.
@무왕
무왕(武王, ? ~ 641년 음력 3월, 재위: 600년 ~ 641년 음력 3월)은 백제의 제30대 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이다. 다른 이름은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법왕(法王)의 아들이나, 위덕왕의 서자 또는 손자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중국의 ‘북사’에는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또 다른 별칭은 무강왕(武康王), 무광왕(武廣王), 호왕(虎王)이다.
어릴 적 이름은 서동으로 뒤에 장으로 개명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
《삼국유사》의 무왕열전에서는 강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나온다.
무왕의 어머니는 강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강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남북조 시대 때 북조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에서는 '백제 위덕왕의 아들 무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북사》만 백제 위덕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다른 중국사서는 법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일본 신찬성씨록과 , 《신찬성씨록》과 오오치 씨, 도요타 씨의 족보에 의하면 그는 진이왕의 아들이라 한다.
중국 《후주서》와 《만성통보》에 의하면 그는 부여관의 아들이라 한다.
@무왕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에 궁 밖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며 마를 캐는 서동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신라의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경주시)로 갔다.
그러고는 서라벌의 아이들에게 마를 주는 선심을 쓰고,
선화공주가 ‘맛둥서방’과 몰래 사귄다는 ‘서동요’라는 노래를 전해주어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로 선화공주는 신라 왕실에서 쫓겨났고, 선화공주와 서동이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대의 금제 사리 봉안기록을 판독한 결과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의 딸 출신인 백제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결혼이 사실상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고 인식하는 분위기다.
~2부로 이어집니다~
조계사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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