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조관음의 도량 강화 보문사

2015. 5. 28. 22:21국내 명산과 사찰

 

 

 

 

 

해조관음의 도량 강화 보문사

강화는 유서 깊은 사적지가 많은 곳이라 매년 여러 번 다녀보지만 보문사는 참 오래간 만에 둘러보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언제나 강화를 가게 되면 이곳저곳을 둘러보려는 욕심으로 승용차로 움직였기에

외포리선착장에서 석포리항구까지 차를 배에다 승선시키는 일이 번거로워서

아마도 보문사 쪽은 매번 발길이 멀어진 모양이다.

이번에는 아예 느긋하게 움직여 볼 요량으로 옛날 추억의 오솔길을 따라 홀로 대중교통으로 가보기로 했다.

2호선을 타고 신촌역에서 내려 옛적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으니

그 옛날 터미널은 흔적도 없고 대신 일반버스 정류장에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만 있었다.

변한 것은 그 뿐만 아니었다.

강화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서도 옛적 생각만 하고 역사를 나와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외포리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는데 가는 버스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길가는 행인에게 물어보니 터미널 안에서 탄다고 한다.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강화를 그렇게 다니면서도 이렇게 까막눈으로 살았으니...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외포리선착장에서 석포리선착장까지 짧은 뱃길이지만 반겨주는 갈매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오가는 행인들을 즐겁게 반겨주는 갈매기.

보는 나도, 반겨주는 갈매기도, 옛적 그 사람 그 갈매기가 아닐 진데 말이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근본도량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이며,

중국은 주산열도(舟山列島) 경치 좋은 섬, 보타도(補陀島)의 조음동(潮音洞)이 관음성지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은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기도도량에 얽힌 설화와 영험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불리는 남해 보리암,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서해 강화 보문사 모두 바다에 면해 있다.

 

 

@강화 보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선덕여왕 4) 4,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 돌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과 송자관음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1812(순조 12)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고,

1867(고종 4)에는 경산(京山)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으며,

1893(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정대사의 생몰연대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대략 1080년 경에 태어나 1150년 경에 입적한 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보덕굴 보덕각시의 전설로 알려진 보덕스님의 후신이라고 한다.

보덕굴은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 법기봉 중턱 만폭동에 있는 절이다.

이 절은 627년 보덕이란 스님이 수도하기 위해서 자연굴을 이용하여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법향루

 

윤장대

 

 

 

 

종루

 

 

 

 

 

 

 

@극락보전

정면 5, 측면 3, 내부 60평 규모에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을 두었다.

뒤편은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으며 3000개의 적은 옥불로 장엄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1972년 중수스님이 중수했다.

 

 

 

<극락보전주련>

靑山疊疊彌陀窟(청산첩첩미타굴)

 

蒼海茫茫寂滅宮(창해망망적멸궁)

 

物物拈來無罣碍 (물물염래무가애)

 

幾間松亭鶴頭紅(기간송정학두홍)

一葉紅蓮在海中(일엽홍련재해중)

 

碧波深處現神通(벽파심처현신통)

 

@극락보전의 주련은 원효대사의 오도송으로 알려져 있다.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불 법당이요,

 

망망한 푸른 바다는 부처님의 적멸보궁

 

물물은 오고 감에 걸릴 것이 없는데

 

솔밭의 학머리를 몇 번이나 보았는가!

바다 위에 떠있는 한 송이 붉은 연꽃

 

푸른 파도 깊은 곳에 신통력을 나투셨네.

 

 

 

 

 

 

삼성각

 

 

 

 

 

 

 

 

 

 

 

 

 

 

 

 

 

 

 

옛적에 없었던 용 조형물

 

 

 

@여의주(如意珠:cintamani)

용의 지물이 여의주다. 여의주의 여의란 말은 보주(寶珠)를 따라

여러 가지 구하는 것이 뜻과 같이 나오므로 여의(如意)라 했다.

풀어 말하면 일체 형액(刑厄)이이나 재난으로부터 구원받고,

모든 간난(艱難)이나 화복(禍福)으로 부터 구하고

바라는 바대로 뜻과 같이 성취시켜 준다는 구슬을 의미한다.

 

 

<지도론(智度論)10>에 이르기를

여의주는 불사리(佛舍利)에서부터 나온다.

만일 모든 이 멸진(滅盡)할 때 사리(舍利)가 변하여 여의주가 된다.고 했다.

 

 

 

<지도론 35>에서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보주(寶珠)는 용왕(龍王)의 뇌() 중에서 나온다.

사람이 이 보주를 얻으면 독()이 능히 해()할 수 없고, 불에 타지 않으며,

제석(帝釋)이 가진 금강(金剛)으로 아수라전(阿修羅戰)에 사용하여 부서져서 염부제에 떨어진 것이라고 했으며,

또 과거 구원불(久遠佛)의 사리로 법이 이미 멸진하여 사리가 변하여 이 주()가 되어 중생을 유익하게 하였다.고 했다.

 

 

<잡보장경(雜寶藏經)6>에 이르기를

 ()께서 말하기를 이 주()는 마갈대어(磨竭大魚)의 뇌() 중에서 나오며

이 고기의 신장은 28만 리()나 되고, 이 구슬의 이름은 금강견(金剛堅)이다.라 고 했으며,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1>에는

금시조(金翅鳥)의 육심(肉心)이 여의주가 된다.고 했다.

 

마애불 가는 길에서 조망

 

 

 

 

 

 

 

 

 

 

 

 

 

 

 

 

 

 

 

석실 옆에 모셔진 용왕

 

 

 

@보문사석실(普門寺 石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 신라 선덕여왕 4(635) 회정대사가 처음 건립하고

 조선 순조12(1812)에 다시 고쳐 지은 석굴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놓은 감실(龕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이들 석불에는 신라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서 본대로 모셨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석실에서 바라본 마애불 전경

 

 

 

 

 

 

 

 

 

 

 

 

 

 

 

 

와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