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11. 22:45ㆍ국내 명산과 사찰
태화산 광덕사(廣德寺)
아산시와 천안시의 경계를 이루는 광덕산(699.3m) 동남쪽, 그리고 태화산(455.5m) 서남쪽 산자락에 있는 광덕사는
설경(雪景)으로도 유명하며 천안의 6경 중 하나로 선정되어 있는 사찰이다.
일주문 앞쪽은 "태화산 광덕사", 뒤쪽은 "호서제일선원"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참선을 수행하는 스님들의 도량임을 짐작게 하듯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천년고찰임을 알 수 있다.
광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 소속인데 마곡사는 그 산너머 남쪽에 자리한다.
광덕사는 652년(진덕여왕 6년) 자장(慈藏)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 1과와 사리 10과, 금은자(金銀字) 《화엄경》 《법화경》 《은중경(恩重經)》 각 2부 등을
승려 진산(珍山)에게 주어 새 도량(道場)을 연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1464년(세조 10년) 세조가 이곳에 거동하였을 때 한계희(韓繼禧)에게 명하여 전지(傳旨)를 써 내렸는데,
위전(位田)를 바치고 각종 요역(徭役)을 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28방(房)에 부속암자가 약 89개, 9개의금당(金堂), 80칸의 만장각(萬藏閣),
3층으로 된 천불전(千佛殿)은 불교도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번창하여,
경기 ·충청 일대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는 대찰이 되었다.
이 비는 옛적에는 광덕사 입구에 백련이 피는 큰 연못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백련지로 추정되는 연못 )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려,
가까스로 대웅전 ·천불전만 중건되어 큰 절의 명맥만을 유지하였고,
1981년 대웅전 ·천불전 등을 신 ·증축하였다.
(광덕사 효자비)
광덕사 고려사경(高麗寫經)인 보물 제390호 《금은자 법화경》(6책)과, 천불전의 대형 후불탱화 3점,
《금자사적기(金字事蹟記)》 《세조어첩(世祖御帖)》 등 문화재가 있다.
그런데 1680년(숙종 6)에 안명로(安命老)가 쓴 이 《사적기》는,
이 절의 개창을 신라 흥덕왕 7년(832)으로 적고 있는데, 자장을 흥덕왕 때 사람으로 착각한 듯하다.
또 《태종실록》(28권)에 따르면, 1414년(태종 14) 가을에 왕명으로
《대반야경(大般若經)》(전부)을 일본의 승려 규도(奎籌)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 6년(1679)에 안명로가 지은 「광덕사 사적」에 따르면
개창 당시에는 금당이 아홉에 종루가 여덟, 이층 범각과 삼층 법전이 있는,
충청·경기 지방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한다.
*역사적 변천을 살펴보면
652년(진덕여왕 6) 자장(慈藏)이 창건하였고, 832년(흥덕왕 7) 진산(珍山)이 중수하였으며,
1344년(충혜왕 복위 5)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 중의 하나로서
사찰소유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렀고, 89개에 달하는 부속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누각이 8개, 종각이 9개, 만장각(萬藏閣)이 80칸, 천불전(千佛殿)도 3층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타버린 뒤 1598년(선조 31) 희묵(熙默)이 중수하였고,
1665년(현종 6) 석심(釋心)이 불상과 종을 개수하였으며, 1679년(숙종 6) 상민(尙敏)이 중창하였다.
대웅전과 천불전만이 중건된 채 1980년까지 사세가 계속 기울었다.
1981년에 대웅전과 종각 등을 신축하고 천불전도 증축하였으며, 그 앞으로 석교도 가설하였다.
1996년 철웅(哲雄)이 15년 동안의 불사를 마무리하여 대웅전·천불전·명부전·범종각·적선당·보화루 등을 중창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천불전은 1998년에 소실되었다.
천불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천불전 안에는 천불이 그려진 후불탱화(後佛幀畵) 3점이 있어,
전체 3,000불의 그림이 장엄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
이 탱화는 가로 28자, 세로 35자의 거대한 규모이다.
또 고려 말기의 사경(寫經)으로 추측되는 금은자법화경(金銀字法華經)은
비록 낙질본(落帙本: 한 질을 이루고 있는 책에서 권책 수가 빠진 것)이기는 하지만 여러 권이 남아 있는데,
그 중 6책이 보물 제390호로 지정되어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269호와 제270호로 지정된 마곡사의 금은자법화경도 원래는 이 절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금자사적기는 다른 데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시대의 작품이며,
세조어첩은 1457년(세조 3) 세조가 온양 온천에 왔다가 이 절의 부처님 치아와 사리를 친견한 뒤,
광덕사와 개천사(開天寺)의 부역을 면제시켜주고, 위전(位田: 위토전)을 사급(賜給)한다는 교지를 친서한 것이다.
이 절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는 진산의 부도 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부도 4기가 있으며,
천불전 우측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또한, 이 절 일대에는 호도나무가 많기로 유명한데,
대웅전 앞에 있는 호도나무는 700여 년 전 유청신(柳淸臣)이 중국에서 처음 들여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안양암(安養庵)과 극락전
안양이란 말은 불교에서는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함을 의미하는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정토를 일컫는 말이다.
이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여러 이름이 있다.
극락 (極樂), 극락정토 (極樂淨土), 금색세계 (金色世界), 무량청정토 (無量淸淨土), 안락국 (安樂國),
안락세계 (安樂世界), 안락정토 (安樂淨土), 연화세계 (蓮花世界).
유사어로는 안양계 (安養界), 안양보국 (安養寶國), 안양세계 (安養世界), 안양정토 (安養淨土) 등이 있으며
광덕사의 안양암은 극락의 이명을 사용하여 극락전 앞에 암자로 안양암이라고 한 모양이다.
극락전의 앞 마당전경
(안양암 요사채)
@양산 통도사 극락보전과 같이 광덕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지장보살과 감로병을 든 관세음보살을 협시불로 두고 있다.
대개 일반사찰에서는 관음 아미타불 대세지보살 순으로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의 이명은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다.
@호두나무의 원산지는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이라고 한다. 박물지에 의하면 한 무제가 중앙아시아에 파견한 장건 장군이 갖져온 것이라고 한다. 그후 400년이 지나 실크로드를 따라 호두나무는 유럽과 아시아지역으로 파급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광덕면 일대는 호두나무 25만8천그루가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호두나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광덕산에는 모기가 없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자랑이다.
그런데 그 까닭이 고려 때 거란군을 물리쳐 유명한 강감찬 장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강감찬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느라고 야영을 하는데 모기가 너무 극성을 부려 병사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했다.
보다 못한 장군이 “모기야 물러가라”고 호령을 하자 모기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고려 후기 천안 광덕사에 호도를 전래했다고 전하는 문신 유청신(柳淸臣)은
본관은 고흥(高興), 본래 이름은 유비(柳庇), 시호 영밀(英密)이다.
공민왕 때 좌정승을 지낸 유탁(柳濯)의 할아버지이다.
유청신(柳淸臣)[1257~1329]은 장흥부(長興府) 고이 부곡(高伊部曲) 출신으로, 선대도 모두 다 부곡 아전이었다.
당시 부곡 아전은 비록 공로가 있어도 5품을 넘지 못하였는데,
유청신은 어려서부터 담대하였으며 몽고어를 습득해서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응대를 능숙하게 하였다.
충렬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서 낭장이 되었는데 그때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유청신은 조인규(趙仁規)를 따라서 진력하여 공을 세웠다. 비록 그 가세(家世)로 봐서는 5품으로 제한하여야 할 것이나
그 본인에게는 3품까지 허가한다.”라고 했으며, 또한 고이 부곡을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조인규의 추천으로 장군이 되었는데, 원나라 세조(世祖)의 막내 동생인 내안왕(乃顔王)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충렬왕이 출병(出兵)하여 토벌에 협조하라는 명을 내려 원나라로 파송되었다.
유청신이 돌아와서 “적은 이미 평정되어 황제도 연경(燕京)으로 돌아갔으니 출병을 중지하고
왕은 역마로 입조하여 경절(慶節)을 축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라고 전하자
충렬왕은 유청신에게 대장군 벼슬을 내리고 밀직 승지(密直承旨)로 전임하였다가 곧 동지밀직 감찰대부로 승진시켰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한 뒤 광정 부사(光政副使) 및 여러 관직을 거쳐 판밀직사사가 되었으며,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청신을 첨의 정승(僉議政丞)으로 삼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하였으며, 옥대(玉帶)를 상으로 주었다.
1321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로 갔을 때 왕위를 노리는 심왕 고(瀋王暠)에게 가담하여 충선왕을 모함하려 하였고,
본국에 정동성(征東省)을 설치할 것을 원나라에 건의하는 등 반역 행위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9년간 원나라에 머물다가 죽었다. 이처럼 말년의 심왕 옹립 운동(瀋王擁立運動)과 입성 책동(立省策動) 때문에
『고려사』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유청신이 심왕옹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 아니고, 다만 그가 역관출신이었다는 이유로 인해
조선의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천시되어 오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적선당
선화루
명부전은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로 있으며 뒤는 지장보살 탱화가,
그 옆은 시왕, 동자상, 역사등이 봉안되어 있다.
육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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