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18. 19:05ㆍ국내 명산과 사찰
여주기행 신륵사(神勒寺)
신륵사를 가 본지도 어언 20여년이 넘었나 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옛적에는 주말이면 망설임없이 휑하니 떠났던 곳인데..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러갔었을 줄이랴..
무상한 것이 세월이라더니 덧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황혼의 문턱에서 느끼는 감회가 오늘따라 무겁기만 하다.
모든 것이 변했다. 허기사 어느 도시인들 안 그렇게느냐만은 여주도 신륵사관광단지로 지정되면서 너무 많이 변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데 어언 두차례 강산이 바뀌어도 바뀌었을테니 말이다.
신륵사 정자 앞 바위에 앉아 명상을 했던 옛추억의 여울을 따라 잔설이 덮힌 신륵사길을 다시 밟아 본다.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 기슭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에 속한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神勒)’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제어했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회자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 조당(祖堂) 승당(僧堂)선당(禪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 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신륵사사적비)
이 중에는 각운(覺雲) 신조(神照) 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
조민수(曺敏修) 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세심정)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 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지장전 내부)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 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 선료(禪寮) 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 명부전 심검당(尋劍堂) 적묵당(寂默堂) 봉향각(奉香閣)
칠성각(七星閣) 종각(鐘閣) 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석종과 석등)
석등
보물 제231호. 높이 1.94m. 신륵사 북쪽에 자리한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 제 228호)의 앞에 서 있다.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의 모습을 따른 석등이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이 명확한 구분이 없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점은 석등의 양식이 점차 형식화되어 간 시대적 변화를 보여준다.
석등은 제법 높은 8각의 바닥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등의 받침돌 모습은 장흥 보림사 서승탑(보물 제156호)의 받침돌과 매우 닮아 주목된다. 곧 8각의 아래받침돌에는 윗부분에 2장의 꽃잎이 겹쳐진 상태로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가 매우 두껍고 도식적으로 돋을새김되어 있다. 간주(竿柱)처럼 생긴 가운데받침돌은 높이가 낮아서 마치 승탑의 가운데받침돌과 비슷한데, 8각의 각 모서리마다 둥근 마디의 난간이 장식되었고, 각 면에는 가운데부분에 꽃 무늬가 돋을새김된 안상(眼象)이 얕게 오목새김되어 있다. 윗받침돌은 아래부분에 아래받침돌의 윗부분과 똑같이 2장의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가 겹쳐진 채 조각되었고, 윗부분에는 1단의 낮은 받침과 함께 덮개돌처럼 생긴 1단의 높은 받침이 새겨져 있다.
윗받침돌 위에는 불을 켜 놓은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 특별한 받침이 없이 바로 올려져 있다. 8각의 각 면에는 꽃 무늬로 반원형(半圓形)의 윗부분을 장식한 화창(火窓)이 뚫려 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툭 튀어나온 둥근 기둥과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용이 깊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가장 윗부분에는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새겨져 있고, 화창의 윗부분에는 각 면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비천상(飛天像)이 역시 깊이 돋을새김되어 장식되었다. 화사석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다른 부재와 달리 특이하게 납석(蠟石)으로 만들었기에, 여러 장식이 더욱 섬세하게 장식될 수 있었다.
지붕돌은 전각(轉角)이 두꺼운 편으로, 8각의 윗면마다 기왓골의 표현은 없지만 각 모서리에는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둥글게 쑥 내밀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의 윗부분을 깎아 만든 복발(覆鉢) 모양의 장식이 있고, 2단의 받침 위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이 석등은 규모가 작으면서도 세부 구성이 안정감을 주고, 특히 화사석의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석등이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등 가운데 가장 우아하면서 장식성이 뛰어난 석등이자 고려 말의 석등 양식을 대변하는 석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1379년(우왕 5)에 보제존자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1376)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을 세우면서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종)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8호. 높이 1.9m. 고려 말에 활동하였던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1376)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다. 혜근의 사리를 안치한 또 하나의 승탑은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原州令傳寺址普濟尊者塔, 보물 제358호)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은 1376년(우왕 2)에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서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로 가던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1379년에 각신(覺信)과 각주(覺珠) 등이 주선하여 신륵사를 크게 중창한 뒤, 조사당 뒤쪽의 명당을 골라 나옹의 묘역을 마련하고서 승탑을 건립하였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型)을 따르지 않고, 고려 말기에 영향에 미쳤던 라마탑(喇嘛 塔)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받침돌은 금강계단(金剛戒壇)처럼 네모난 모습이다. 낮으면서도 넓은 받침돌 위에는 받침돌 주변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다. 받침돌 가운데부분에는 2단의 받침이 마련되었으며, 그 위에는 종처럼 생긴 석종형(石鐘形) 몸돌이 놓여 있다. 받침돌의 앞쪽은 물론 왼쪽과 오른쪽의 중간 쯤에는 2단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간략한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석종형 몸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완만한 타원을 이루어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편이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어깨부분은 마치 잘라진 포탄처럼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그 위에는 불꽃 무늬를 새긴 단면 4각의 보주(寶珠)가 장식되어 있다.
석종형 승탑은 양산 통도사, 김제 금산사, 달성 용연사 등에도 자리하고 있다. 이 승탑은 통도사와 금산사의 석종형 승탑과 함께 계단탑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주로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던 석종형 승탑의 선구적인 양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석종비)
석종비
1379년(우왕 5)에 건립. 전체높이 212㎝, 비신높이 121㎝, 너비 61㎝. 보물 제229호.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는데 상단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워 보강하고, 그 위에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형식을 잘 보여준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교양종의 통합운동을 통해 불교재건에 힘쓰던 명승으로, 1376년 새로운 유교세력과의 미묘한 정세로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로 있다가 왕명에 따라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문도들이 그의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종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명서가인 한수(韓脩)가 썼다. 글씨는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다.
산신각과 내부
(극락보전)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 신중탱화 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상
보물 제1791호. 신륵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으로, 불상 내부에서 복장원문이 발견되어 1610년에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정확한 조성시기와 새로운 17세기 초 조각승의 발견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아미타여래상(본존) : 높이 149.5㎝, 무릎너비 96.9㎝
관음보살상(좌) : 높이 177.5㎝
대세지보살상(우) : 높이 174.2㎝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서 있다. 이들 삼존상은 장방형 얼굴과 세장한 신체비례, 금엄하면서도 단정한 인상, 협시보살상의 각각 다른 착의 형식 등이 특징이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중품하생인을 하였으며 얼굴과 목이 길고 어깨와 무릎은 넓어 전체적으로 길쭉하면서도 비례가 안정적이고 자세는 당당하다. 머리에는 육계가 유난히 높게 올라가 독특하고 정수리에는 정상계주를 표현하였으며 큼직한 나발을 빼곡히 조각하였다. 긴 얼굴은 눈두덩이가 두터운 좌우가 긴 눈, 기다란 코, 작지만 도톰한 입술 등을 표현하여 근엄하고 이국적인 인상을 풍긴다. 특히 아랫눈꺼풀을 바깥 방향으로 굴곡지게 나타내거나 인중을 돌출되게 표현하고 입술 양 끝을 오목하게 패도록 조각하여 얼굴의 입체감을 더하였다. 곧고 긴 목에는 삼도를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착의법은 오른쪽 팔에 편삼을 두르고 그 위로 대의를 걸친 변형 통견식으로 목깃이나 옷주름 등이 두껍고 간결하며 두 다리 사이의 옷은 그 끝을 각지게 주름잡아 딱딱한 인상을 준다.
보살상들은 긴 신체비례나 얼굴 표현 등에서는 본존불상과 유사하지만 착의법이나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의 표현에서 차이를 보인다. 좌측의 관음보살상은 양 손을 배 부분에 두어 무언가를 쥐고 있었던 형상이며 어깨 위를 덮고 흘러 내린 천의는 팔목을 감아 길게 내려와 있다. 허리에서 무릎 아래에는 화려한 장식을 걸쳤으며, 무릎 부분에는 띠로 묶어 위아래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등 이례적인 표현을 보인다. 우측의 대세지보살상은 본존과 손모습이나 옷 주름의 표현에서 닮은 모습을 보이는데, 특히 변형 통견식 대의라든지 두터운 목깃 등이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옷 주름을 보이지만 주름에 변곡을 주어 입체적으로 처리하고자 하였다. 보살상의 머리카락 표현을 보면 관음은 어깨 위에 여러 가닥의 보발이 흘러내리지만 대세지보살은 생략하는 등 두 협시보살상의 표현에 차이를 둔 점도 특징이다. 장식은 두 보살상이 거의 같은데 귀에는 큰 화형 귀걸이를, 가슴에는 둥근 화형문에 구슬이 달려 있는 간결한 형태의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좌상의 여래, 입상의 보살로 이루어진 삼존의 구성과 두 협시보살상의 착의법을 달리 표현하는 사례로는 1603년 안성 청룡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제1789호), 1620년 약수선원 목조보살입상 등이 있어 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1610년 백 여명이 넘는 승속인들이 발원한 불상으로 원 봉안처, 제작시기, 제작자가 명확하여 17세기 초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유난히 높은 육계, 이국적인 얼굴, 옷 주름 표현의 독창성 등 다른 불상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조형적 특징을 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불상을 만든 조각승 인일(仁日)은 이 불상을 통해 처음 소개된 조각승으로 주목된다.
(적묵실)
(심검당)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 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구룡루)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경을 읽는 모습이다.
다층석탑(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높이 3m. 석탑은 현재의 보존 상태와 절 안의 건물 배치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로 추정된다.
석탑은 흰색의 대리석을 네모난 단면으로 다듬고 쌓은 모습이다. 받침돌부터 지붕돌까지 각 층의 석재를 각각 한 장의 돌로 구성한 것은 구하기 어려운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규모 역시 크지 않다.
2층의 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여러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은 신라 석탑이나 고려 석탑의 기본적인 수법을 따른 것이지만, 각 세부의 조형은 양식을 달리하였다. 바닥돌 위에는 아래층 받침돌이 놓였는데, 하대석(下臺石)의 윗부분에는 꽃잎을 아래로 향하게 둔 홑잎의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연꽃의 배치는 가운데에서 모퉁이로 향하면서 점차 경사를 짓는 모습인데,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연꽃 무늬의 배열 수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면석은 매우 낮은 편으로, 각 면마다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형식적으로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면에는 물결[波狀] 무늬가 새겨져 있다. 덮개돌은 마치 윗층 받침돌의 하대석까지 포함한 듯 면석에 비해 유난히 두꺼워 중후한 느낌을 주지만, 각 면마다 여러 장식적인 의장(意匠)을 두어 둔중함을 다소 감소시켰다. 곧 옆면에는 한 줄의 띠로 된 굽을 둘렀고, 위아래면에는 홑잎의 연꽃 무늬를 각각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의 모습으로 새겼다. 앙련의 연꽃 무늬 아래와 복련의 연꽃 무늬 위에는 각각 1단의 각진 받침이 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에는 꽃 무늬와 구슬[連珠] 무늬 등으로 꾸민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고, 4면의 각 면마다 용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용 주위의 우아한 구름 무늬가 용과 잘 어울려 조각 수법은 능숙한 편이다.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마치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곧 윗면은 아무런 굄도 없이 평평하지만, 옆면에는 윗부분에 굽의 띠를 돌렸고, 아래부분에는 맨 아래에 이르기까지 각 면마다 꽃잎이 위로 향한 홑잎의 연꽃 무늬가 9개씩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현재 8층 몸돌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다만 8층 몸돌 위의 지붕돌과 몸돌은 8층 바로 위의 것은 아니다. 각 층의 체감은 적은 편이며, 특히 몸돌의 높이가 매우 낮아 지붕돌의 높이와 비슷하므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층수가 다층이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각 층의 몸돌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은 평박(平薄)한데, 밑면 받침은 매우 낮게 조각되었고, 윗면에는 1단의 각진 굄이 새겨져 있다.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개되다가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서 반전(反轉)을 이루었지만, 낙수면의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둔중해 보이고, 내림마루인 우동(隅棟)도 거의 수평이어서 반전이 약해져 경쾌한 느낌은 줄어 보인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의 여러 부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석탑은 일부분에 고려시대 양식이 남아 있지만,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새로운 양식을 더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특히 대리석의 질감 때문에 각 세부의 조각이 한층 우아해 보인다. 신륵사의 창건 시기는 신라시대로 일컬어지지만, 현재의 유물은 대체로 고려 중기 이후의 것이고, 1472년(성종 3)에는 여러 건물이 다시 건립되었다. 따라서 이 석탑의 건립 시기도 1472년 전후로 추정된다.
(ㄷ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높이 1.33m, 폭 0.88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륵사에는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이 있었는데, 이 비는 대장각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은 석비이다. 이 비는 1383년(고려 우왕 9) 이색(李穡)이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여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생략되어 있다.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보호하고 있다. 비문은 해서로 직제학 권주의 글씨로 새겼는데,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을 인쇄하고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전탑(塼塔)
보물 제226호.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각 층의 옥개는 옥신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는 전으로 된 노반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앙화·보륜·보개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강월헌
'국내 명산과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강서원(鷺江書院) (0) | 2015.02.09 |
---|---|
양평 두물머리 아침 소경(素景) (0) | 2015.01.30 |
여주기행 세종대왕 능(陵) (0) | 2015.01.17 |
용문산 상원사(上院寺) (0) | 2015.01.09 |
아산기행 현충사 (0) | 2014.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