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3. 21:23ㆍ국내 명산과 사찰
가을향기를 따라서 소요산으로(2/2)
<소요산 자재암역사> 자재암(自在庵)은『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다. 「자재암(自在庵)」조에 의하면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74년(광종 25년) 각규대사(覺圭大師)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소요사라 했다. 그리고 1153년(의종 7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찰에 대한 구체적인 연혁이 전하지는 않으나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 소요사(逍遙寺) 조에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밭 1백 50결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범우고(梵宇攷)에 있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년)의 시에 소요사가 언급되고 있으나 페허가 되었다고 했다. 이로보아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엔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후기 들어서는 1872년(고종 9년)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이 퇴락한 자재암을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이때의 일은 설화같이『소요산영원사중건기(逍遙山靈源寺重建記)』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은 같은 꿈을 꾸고 만나 영산전ㆍ만월보전ㆍ독성각ㆍ산신각ㆍ별원(別院) 등 모두 44칸을 중창 하였다고 한다. 1907년에는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09년 성파(性坡)스님과 제암 스님이 다시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러한 내용은『자재암재차중건기(自在庵再次重建記)』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근세에 들어 한국전쟁 당시 다시 소실된 것을 1961년 진정(眞精) 스님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이어 1984년에는 동두천 시내에 부설 연화유치원(현)이 개원하였고,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중창을 하여 지금의 사격을 갖추었다. <출처: 자재암홈피>
대웅전 내부
중앙에 석존을 모시고 좌우 협시불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우측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좌측에 위태보살을 모셨다. 위태보살은 동진보살과 동명이다.
@위태천이라고도 하며 위태천 [ 韋駄天 사건타(私建陀), 건타(建陀) 산스크리트의 스칸다(Skanda)의 음을 딴 것으로 사건타(私建陀), 건타(建陀)라고도 표기한다. 본래는 브라만교의 신으로 시바신 또는 아그니신의 아들이었는데, 불교에 받아 들여져서 호법신이나 가람의 수호신이 되었다. 남방 증장천(增長天)의 팔장(八將)의 한 사람으로 사천왕에 속하는 삼십이장의 장으로, 신속하게 사신(邪神)을 항복시켰다. 석가가 열반시 불사리를 훔친 서질귀(擾疾鬼)를 쫓아가서 그것을 되찾았다는 설화에 의거해서 발이 빠른 것을 <위타천 달리기>라고 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Kārttikeya 다. 서사시의 시기(기원전 600~서기 200년)에 성립한 천신(天神)으로, 가네샤와 함께 시바(혹은 아그니)의 아들이라고 한다.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이후 지위가 올라, 신군(神軍)을 지휘하여 마군(魔軍)을 퇴치하는 군신(軍神)으로 제석의 지위를 능가하게 되었다. 북인도에서 스칸다Skanda, 쿠마라Kumara라고 부르며, 남인도에서는 서브라마야Subramaya라고도 불린다. 한역하면 ‘塞建陀’ 혹은 ‘違陀’이며, ‘위태천(韋駄天)’ ‘위장군(韋將軍)’ ‘위태보살(韋駄菩薩)’이라고 부르며, 조선시대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인도의 힌두신화에서 육면십이비(六面十二臂)로 표현되고 창이나 그 밖의 무기를 쥐고 공작새를 타고 다닌다. @《도선율사감통록道宣律師感通錄》에서 위태천은 남방증장천왕의 8장군 중의 한 명이자 32장군의 우두머리이며,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출가인을 보호하고 불법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었다. 또한 여래입멸 후에 첩질귀가 돌연히 여래의 어금니를 훔쳐 달아나자 위태천이 되찾아오는데, 이후 탑의 도굴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남송대(南宋代) 이후 사경을 수호하는 천신으로 나오고, 원, 명대(元明代)에는 천왕전에 반드시 모셔진다. 형상은 새깃털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합장한 팔위에 보봉(寶奉)이나 칼 혹은 금강저를 가로질러 놓는 모습으로 중국에 들어와서 한화(漢化)된 형상이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의 목판화인 1286년 등에서 사경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으로 등장하며, 조선시대 신중탱화에서 무장상들을 이끄는 대장격으로 나타난다. 나한전 가을국화꽃이 색이 아름답기 그지없어 이슬 젖은 그 꽃잎을 헤아려보네 이 세상 근심걱정 세상에 띄우고는 인간사 모든 정을 저 멀리 보낸다네. 비록 홀라 앉아 술잔을 비우지만 술잔이 비워지니 술병이 절로 기우네. 서산에 해지니 만물은 잠이 들고 둥지 찾은 새들은 숲을 향해 지저귀네. 동헌마루 거닐면서 휘바람불어보니 또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거라네/도연명 @국화는 청순, 정조, 평화, 절개, 고결을 말 할 때 어련히 국화를 떠올린다. 꽃 모양이 어느 상황에서든 품격을 잃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에서 군자의 풍모를 느끼고, 추위에도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까닭에 그 모습이 지조 굳은 충신이나 절개 높은 여인에게 비유하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상징이 되는 국화꽃. 그래서 4군자 중 하나로 칭송되나 보다. @중국복건성 무이산 정상 천유봉에는 팽조라는 신선을 모신 사당이 있다. 800여년을 살았다는 전설의 신선이다. 신선인 팽조는 국화로 가득한 연못가에 살면서 매일 새벽 국화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받아 마신 까닭에 아주 오래 장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국화꽃은 장수(長壽)와도 관계가 깊은 꽃이다. @중국에는 9월 9일 중양절에는 국화주를 마시는 세시풍습이 있다. 이 날에 국화주를 마시면 재앙을 피한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비장방(費長房)이란 신선이 어느 날 자기는 승천해야 한다고 하면서 제자 항경(恒景)에게 오는 9월 9일 날에는 재앙이 일어날지 모르니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있어라고 했다. 그리고 국화주가 필요할 테니 잊지 말고 가지고 가라고 당부했다. 제자는 스승이 말씀하신 그 9월9일 아침 날이 밝자 일찍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산으로 갔다. 그러나 산에서 하루를 보내기가 지루했는지라 가지고 간 국화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보니 집에 있는 가축이란 가축은 다 죽어 있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나 사람대신 가축들을 모두 도륙한 것이다. 이로부터 중앙절에 국화주를 마시면 재앙을 피한다고 하여 이런 세시풍습(歲時風習)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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