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1. 22:13ㆍ국내 명산과 사찰
(청양기행1/3) 칠갑산 장승마을
6월의 마지막 일요일. 이제 이 한해도 어느새 반이 흘러갔다. 아래쪽에는 7월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도 있다.
아침 하늘을 보니 잿빛이다. 요즘 따라 일요일 날씨는 맑은 날이 없다. 다행히도 비 소식은 없다.
아침 5시, 가볍게 공양을 끝내고 청양 칠갑산으로 길을 나섰다.
날이 그래서 그런지 고속도로는 그리 밀리지도 않았다.
충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청양에는 4가지 볼거리 있다.
하나는 칠갑산이고 둘은 2개의 대웅전을 가진 장곡사이고
나머지 둘은 칠갑산 장승 마을과 출렁다리이다.
가수 조용필의 <뽕밭매는 아낙네>로 익히 알려진 칠갑산. 그 칠갑산의 장곡사 바로 아래에 장승마을이 있다.
충남 청양은 서울에서 2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거리.
육산인 칠갑산은 높지는 않지만 오지(奧地)로 우리나라 100대 명산에 속한다.
그 곳 칠갑산 장곡사의 바로 아래에 300여개의 장승이 전시된 마을이 청양장승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장승마을로서는 큰 곳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시나·이정표 구실도 한다.
대부분 남녀 1쌍을 세우고,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이나 12곳에 세운다.
동제(洞祭)의 주신(主神)이 되기도 한다.
솟대·돌무더기·서낭당·신목(神木)·선돌(立石) 등과 함께 동제 복합문화를 이룬다.
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의 토지경계 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솟대·선돌·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명칭은 장승·장성·장신·벅수·벅시·돌하루방·수살이·수살목이라고도 불리며,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고 있다. 사용된 재료에 따라서 목장승·석장승·복합장승으로 분류된다. 보통 남녀 1쌍을 이루고 있고, 목장승은 주로 소나무나 밤나무를 사용하는데, 그 형태는 솟대형·목주형(木柱形)·신장조상형(神將彫像形)이 있다. 석장승의 형태로는 선돌형·석적형(石蹟形)·석비형(石碑形)·돌무더기형이 있고, 복합장승은 돌무더기나 흙무더기에 솟대와 석인(石人)의 복합형태를 이룬다.
장승에 쓰는 장군 명에는 민속적 신명(神名)이 등장하는데, 동쪽에 있는 장승에는 동방청제축귀장군(東方靑帝逐鬼將軍), 서쪽에는 서방백제축귀장군(西方白帝逐鬼將軍), 남쪽에는 남방적제축귀장군(南方赤帝逐鬼將軍), 북쪽에는 북방흑제축귀장군(北方黑帝逐鬼將軍)이라는 신명을 써서 잡귀를 쫓는다. 장승은 서낭당·산신당·솟대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된다.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될 때 장승에 제사지내는 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경계표나 이정표의 구실과 함께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마을 수호신으로서, 또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으로서 신앙적인 성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출처: 브리테니카>
문헌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원 보물 제157호인 장흥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
이미 장승을 사찰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 표시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누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시대이지만 옛적에는 시집살이에 회자하는 말이 있다.
3년은 귀먹거리, 장님, 벙어리로 살아야 한다는.
이 석장승은 아마도 작가가 옛추억이 그리워서 만들었나 보다.
@장승의 기능은 경계표시장승, 로표장승과 축귀장승과 공공장승으로 구분되지만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경계표시장승은 사찰등의 입구에 세워 잡귀들의 출입을 막고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로표장승은 길목에 세워 길을 안내하는 기능을 지닌 장승이다.
축귀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마을로 드는 재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공공장승은 성문이나 병영, 해창(海倉)등에 세워진 것으로 관리지역임을 표시하는 장승이다.
장승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의미로 당간(幢竿)이란 것이 있다. 당간은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유행했는데 공주 갑사의 철당간 지주가 유명하다. 당간은 사찰의 경계와 신성한 곳임을 알리며 때로는 법회나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경우 오늘날 게양대와 같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당(幢)이란 깃발이나 수레의 휘장을 의미한다.
석장승으로 조성된 오방장승
굿을 하거나 무가에서 오제 또는 오방신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오방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지키는 신들로 여기고 있는데 오제(五帝)와 오방신장(五方神將)은 그 의미가 다르다. 하늘에서는 오제(帝)라 하고 땅에서는 오방대장군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를 오방신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오방대장군과 오방신장은 완전히 다르다.
하늘에서는 제(帝)라 하고 땅에서 대장군이라 한다. 오제는 중국역사에 나오는 삼황오제를 의미하고
오방신장은 오방을 살피고 감독하는 자를 천하대장군이라 하고
지하를 감독하고 살피는 자른 천하여장군이라고 한다.
무속이나 민간신앙에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한 방편으로 오방신장을 세우는데 이는 치우천왕의 고사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치우천왕은 도깨비대왕으로 불리는 14대 환웅이신 자오지천왕을 말한다. 치우천왕은 탁록에서 헌원황제의 부대와 전투를 벌리게 되는데 그 황제 헌원의 부대를 귀신부대라고 불렸다. 이 전투에서 황제의 부대는 싸울 적마다 치우대왕의 부대에 패하자 치우천왕의 깃발만 보면 도망갔다고 한다. 그래서 귀신은 도깨비를 보면 달아난다고 하는 말이 생겼으며 민간신앙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치우천왕은 죽어서 사후에 사방에서 들어오는 귀신들로부터 후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신을 동서남북 중에 나누어 묻게 하니 그 시신에서 나온 혼백이 오방신장이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오방신장은 동방은 천제신장, 남방은 적제신장, 서방은 백제신장, 북방은 흑제신장, 중앙은 황제신장이라고 한다.
치우천왕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오제본기〉를 비롯한 중국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우는 신농의 후예로 황제 헌원과 탁록지전 등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신농의 치세 말기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세상을 안정시켰는데, 이때 치우가 가장 포악하여 염제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헌원이 신농을 대신하여 제후들을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였을 때 치우가 다시 난을 일으키자 헌원은 군대를 일으켜 치우를 탁록(涿鹿)에서 잡아 죽였다고 한다. 중국의 일부 신화에는 치우에게 81명(또는 72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이 있고 머리는 구리와 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창과 방패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치우의 부족은 일부가 헌원에 협조했고,
일부는 여족(黎族), 일부는 요족(瑤族)이 되었다고 한다.
치우와 헌원이 전쟁을 벌였던 사실은 흔히 <황제 신화>라고 부르며 이러한 신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의견이 존재하였다. 치우가 이끌었던 구려족(九黎族)은 먀오족의 조상이라고 하며 양쯔 강 유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대체로 치우로 상징되는 양쯔 강 유역의 남방 부족과 황제로 상징되는 황하 유역의 한족이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흩어져 사는 묘족 흐몽족 등은 구려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한다. 한국의 일부 야사에서는 치우씨(蚩尤氏), 치우천왕(蚩尤天王) 등으로 부르며 치우 또는 그 부족이 한민족에 속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위서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국어>, <산해경>,<상서> 등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여러 서적을 통하여
전하여지지만, 모든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산해경(山海經)>〈해경〉에 치우와 황제(黃帝)가 서로 힘을 겨룬 내용이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모셔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유방이 항우와의 마지막 전투 전에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고, 그 전투에서 이겼다고 한다. 동양 천문에는 특이한 형태의 혜성이 '치우기(蚩尤旗)'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의 무덤인 마왕퇴에서 치우기를 묘사한 백서가 발굴되었다. 한국의 옛 기록에는 치우와 관련된 제례나 풍습이 전해지는데, 이는 모두 중국의 예법에 정해진 제례를 받아들여 제사한 것으로 중국이 전쟁의 신으로 치우를 숭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풍습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둑제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군영을 대표하는 대장기로서
치우의 형태라고 전해지는 ‘둑’이라는 깃발을 둑소에 두고 매년 갑옷을 입고 제를 지냈다.
@마제 - 강무(講武)시에 치우에게 제를 지내는 것으로, 조선 세종 이후 주나라의 제도를 본따 실시하였다.
@천중부적 - 단오날에는 치우를 이용하여 악귀를 쫓는 부적을 그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 이후로 저술된 일부 기록에서는 치우를 한민족의 일부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위서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들은 인정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있는데, 전자에서는 '치우씨(蚩尤氏)'라 불리며, 환웅의 부하로 일족을 이끌고 환웅 및 단군에 협력하였던 부족 및 부족장으로 설명된다. 치우씨는 환웅의 명령에 따라 집을 만들고 방어와 병기 제작을 담당하였고, 신농의 말기에는 중국 본토에서 천왕이 되었으며, 단군조선 시대에는 고조선의 서남쪽인 남국에 봉(封)하여졌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제후들과 함께 중국 본토로 진출, 여러 나라를 세워 그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고 서술되었다. 후자에서 치우는 배달국의 제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으로 등장한다. 중국의 역사서 및 신화의 내용과 반대로 《환단고기》의 치우는 헌원(軒轅)에게 승리하였다고 한다. 또한 2002년 FIFA 월드컵 때 유명해진 붉은악마의 트레이드 마크 도안이 치우라는 주장되었는데 해당 도안은 신라 귀면와를 토대로 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귀면와의 형상은 치우와 관련짓지 않는다. 그러나 붉은악마 측에서는 이 그림이 치우의 형상이라 주장하고 있다.
눈을 즐겁게 하려고 외국 장승도 3점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네 장승과는 그 풍기는 맛이 영 다르다.
장승마을의 최대장승이다.
대장군은 키 10m, 몸무게는 15톤이며, 여자대장군은 키 10m, 몸무게14톤으로
청양군민의 안정과 평화를 기원하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무병장수와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전래되고 있는 귀신이 많다. 민속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나라만 하드라도 가정에서 숭상되는
가택(家宅)신이 11종, 부락에서 숭상하는 부락(部落)신이 136종, 무속(巫俗)에서 말하는 무신이 114종,
민간신앙에서 받드는 잡신까지 합치면 273종의 신들이 있다고 한다.
이 신 저 신 이렇게 신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 민초들의 삶이 그렇게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千江流水에 千江月이다.
한 평생 길어봤자 백년도 아니되는 데..
그래서 부처가 일찌기 오온성고(五蘊盛苦)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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