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19. 22:09ㆍ국내 명산과 사찰
구례 화엄사 연기암(緣起庵)
@연기암은 노고단 쪽으로 해발560m 고지에 위치한 화엄사 산내(山內) 암자로서 문수보살의 기도도량이다.
화엄사의 원찰로 연기암은 1500년 전 백제 성왕 때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기 이 전에
이곳에 토굴을 짓고 가람을 세워 화엄경을 설하신 유서 깊은 천년사찰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되어 400여년을 칙넝쿨과 가시덤불에 파묻혀
축대만 남아 있는 곳을 원응당 종원선사께서 다시 복원시킨 것이라고 한다.
1989년 대적광전, 문수암, 관음전, 적멸당, 원응당, 인맥당, 심우당을 건립하였고
최근에 입상으로는 13m에 달하는 국내 최대 문수보살상을 건립하였다.
@기록에는 연기조사가 인도의 승려라고 되어있다. 연기조사는 문수보살께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는 원을 세우신 분이다. 그리하여 멀리 타국으로 건너와 당시 크게 번성했던 경주의 황룡사에서 경을 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비몽사몽간에 한 모자를 만났는데, 후덕해 보이는 여인의 손을 잡고 따라온 귀여운 동자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본디 스님께서 제 앞에서 세운 원(願)은 널리 화엄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새 인연처를 찾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는 말을 남기고 난 후 두 모자는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에 말을 전해들은 연기조사는 새 인연처를 찾다가 지리산에 들게 되었다. 아름다운 지리산의 산천경계에 취해 있던 연기조사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지리산 봉우리들이 한 부인의 모습과 같음을 알고 자세히 보니, 지리산이 바로 예전 황룡사에서 비몽사몽간에 만났던 바로 그 모자 가운데 부인의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연기조사는 지리산이 새 인연처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모셔와 그 부인의 형상을 본 산등성이에 조그만 암자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연기암이다.
연기암은 화엄사에서 2.3km정도 노고단을 향하여 오르는 길목에 있다. 그 후 연기조사는 직접 친견했던
지리산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널리 화엄일승지도를 펴가며 화엄사를 창건하고,
다시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널리 폈다.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표지석 중 하나는 연기암을 나타내고
하나는 입차내문(入此內門) 막존지해(莫存知解) 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해석하면 이 문을 들어서면 아름알이는 놓아라는 의미다.
지식, 지해를 놓으면 어떻게 사물을 분별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해(知解)를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객관적 과학적 고찰로 통하여 오감(五感)으로 얻어지는 지식(knowledge)이요
다른 하나는 경험으로 얻어지는 지혜(知慧: wisdom)이다.
그런데 불교는 여기에 오감에 의한 것도,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닌 선정(禪定)과 같은 방법으로 얻어지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반야(般若 prajna)의 지혜를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막존지해라는 반야가 아닌 지식과 그런 지혜를 놓아라는 의미다.
화엄사의 벚꽃은 지고 있었지만 연기암은 위치가 높아서 그런지 만개해 있었다.
@문수는 산스크리트 만수스리(Majusri)를 음사한 문수사리(文殊師利)의 약칭이다.
만수시리(滿殊尸利), 만수실리(曼殊室利)라고도 한다. 번역하며 묘덕(妙德: 無量經,涅槃經), 묘수(妙手: 無行經),
보수(普首: 觀察三昧經, 大淨法門經), 유수(濡首: 阿目佉經普超經), 경수(敬首:無量門微密經, 金剛瓔珞經),
묘길상(妙吉祥: 大日經)이란 의미다. 문수(文殊) 혹은 만수(曼殊)는 묘(妙)의 뜻이고,
사리(師利) 또는 실리(室利), 덕(德), 길상(吉祥)의 뜻이다.
문수보살이 나오는 경전은 250년 무렵부터 만들어졌지만 예술작품에는 400년 무렵부터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에 무명(無明)의 구름을 잘라버리는 지혜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왼손에는 패엽(貝葉)으로 된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을 들고서 왕자처럼 치장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중국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문수보살 숭배가 널리 유행했으며, 산시 성[山西省]에 있는 우타이 산[五臺山]은 문수보살의 성지로서 그를 모신 사찰로 가득 차 있다. 천계에 있는 보살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인도에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즉 꿈속에 나타나거나, 그가 사는 성스러운 산의 순례자, 코탄에 불교를 전한 승려 바이로차나, 티베트 불교를 개혁한 아티샤, 중국의 황제로도 화현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문수보살 신앙이 삼국시대부터 유행했는데 신라의 고승 자장은 그 유포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오대산은 중국의 우타이 산과 마찬가지로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로서 중시되어 왔는데, 643년(선덕여왕 12)에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자장은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함으로써 오대산의 중요성을 널리 부각시켰다. 황룡사의 9층탑도 문수보살 신앙을 굳건히 하고자 한 자장의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 그 뒤 문수보살 신앙은 계속 유행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찰의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이다. 지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곧 마음에 아무런 분별심·차별의식· 우열관념 등이 없는 한없는 고요 속의 밝음이다. @불경에는 문수보살을 신앙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면 의식주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며 큰 죄를 짓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고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신앙의 내용 때문인지 문수보살은 일찍부터 중국의 많은 서민 대중에게 신앙되었다.『화엄경(華嚴經)』에는 “동북방에 보살의 주처(主處)가 있다. 문수보살이 1만의 보살의 무리를 거느리고 상주(常住)하며 천인(天人)ㆍ용왕(龍王)ㆍ신(神)들을 교화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 구절을 확대 해석하여 산서성(山西省)의 오대산(五台山)이 바로 청량산이며 문수보살의 정토라고 믿었다. 문수보살과 관련해 많은 영험한 역사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퍼지면서 오대산의 신성함이 더해갔다. 당나라 시대에는 문수신앙이 크게 성행하여 오대산은 중국 전역뿐만 아니라 인도, 신라 등의 외국에서까지 참배객이 찾아오는 성지가 되었다. 현재 오대산에는 1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지어진 100여 개의 사찰과 150여 개의 탑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중국 불교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처럼 많은 불교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오대산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타산, 보현보살을 모신 아미산, 지장보살을 모신 구화산과 함께 중국 불교의 4대 성지이다. 적멸당(寂滅堂)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 대웅상적광전 앞 풍경 문수전(文殊殿)
관음전(觀音殿) 面 上 無 瞋 供 養 具(면상무진공양구)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口 裡 無 瞋 吐 妙 香(구리무진토묘향)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요한 향이로다 心 裡 無 瞋 是 眞 寶(심리무진시진보)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無 染 無 垢 是 眞 常(무염무구시진상)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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