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건성 기행(3/7) 무이정사

2014. 2. 19. 20:44해외여행

 

 

 

복건성 기행(3/7) 무이정사(武夷精舍)

 

무이구곡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복합자연유산으로 등록된 무이정사는

성리학의 집대성자로 1179년 백록동서원을 일으켜 서원교육의 바람을 일으켰던

남송의 대 유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가 1183년 53세에 무이산에 들어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주희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이며 존칭되어 주자(朱子)라고 한다.

 

무이정사는 원래는 자양서원으로 불리었다.

자양서원(紫陽書院)은 중국 복건성 남평시 현 무이산시 무이산5곡

은병봉 아래 위치하며 송(宋) 순희(淳熙) 10년(1183)에 건립되어 무이정사(武夷精舍)로 불리었다가

남송 말기에 확장되어 자양서원으로 개명되었던 것이다.

명나라 때 정통(正統) 13년(1448)에는 주문공사(朱文公祠)로 불리기도 했었다.

자양(紫陽)은 주희의 호(號)다.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희는 이곳에서 10년을 강의하였으며

초기에는 인지당(仁智堂), 은구제(隱求齊), 한서관(寒栖館),

만대정(晩對亭), 철적정(鐵笛亭)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지숙(止宿)과 은구실(隱求室)의 일부 건축물만 남아 있다.

서원 각처의 석벽에는 수많은 그의 족적이 남아 있는데

그가 친이 쓴 <서자여사(逝者如斯>와 진성(진성)이 쓴 <벽립만인(壁立万仞)>이 유명하다.

 

 

 

 

 

<서자여사(逝者如斯>란 말은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자재천상왈(子在川上曰)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 불사주야(不舍晝夜)」라는 글에서 유래한 말로

직역하면「공자가 냇가에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저 흐르는 물과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으니.」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문학적으로도, 또한 물을 예찬한 도가(道家)사상으로도,

찰라의 영원성을 말하는 불교적인 것으로도, 홍루몽에 나오는 임대옥의 시

「이제 꽃을 묻어주니 남들은 바보라 비웃네, 훗날 나를 묻어 주는 이 그 누구일까?

(儂今葬花人笑癡농금장화인소치 他年葬儂知是誰타년장농지시유)」처럼

소극적인 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군자는 진취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천행건(天行健)의 의미로,

대학에서 이르듯「진실로 날로 새로워지고

나날이 새로워지고 날마다 새로워진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의미로 쓴 것이 아닐까 사료된다.

<벽립만인>은 천길만장 솟은 절애의 바위가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부동한 것을 말하는데

아마도 도학의 불변함을, 반석처럼 굳은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말인 듯하다.

 

 

주희가 죽은 후 무이정사는 역대 통치자들이 이를 중요시하여 대대로 확대 수선하였으며

남송말에는 관청에서 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논밭을 제공하여 자양서원으로 칭해졌다.

이후 명 정통(正統)13년(1448)에 주문공사(朱文公祠)로 개칭하고 주희의 신주(神主)와 함께

황간(黃干), 채원정(蔡元定), 유화륜, 진덕수(眞德秀)를 배향(配享)하고 제사지내기 시작했다.

명 정덕(正德)13년(1518) 순안어사 주원청등이 자금을 모아 주변에 담을 쌓고

 패방(牌坊)을 건립하여 무이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군의 조상)

중국의 종교는 도교라 불릴만큼 이름난 명산에는

노군(노자)상이 거의 빠짐없이 세워져 있다.여기 무이정사 처럼.

  

 

@무이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정문을 지나면 전청(前廳)이 나오고

학달성천(學達性天)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학달성천이란 배움을 통해서 천성에 이른다는 의미다.

천성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의미한다.

 

 

전청을 지나면 중청(中廳)이다.

정중기상(靜中氣象)이란 현판과 뒤에는 신도비가 있다.

여기에는 율곡 이이의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주자학의 최고 수양법은 거경(居敬) 궁리(窮理)로 요약되는 데 거경(居敬)은 송나라 때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127~1279)에 의해서 철학적으로 다듬어 지고

궁리(窮理)는 주희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주자학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조선조의 유학자 퇴계이황과 율곡 이이가 이를 계승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철학을 심화시켰다.

 

거경(居敬)란 내적 수양법으로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덕성을 닦는 것을 의미하고

궁리(窮理)는 외적 수양법으로 사물의 이치를 하나 하나 터득함으로써 본래의 원천적인 이치에 도달하고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더불어 유학과 성리학에서 학문을 수양하는데

요구되는 실천적인 방법 내지 태도이기도 하다.

무이정사의 <學達性天>과 <靜中氣象>의 편액은

단순한 편액이 아니라 이러한 궁리와 거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중청을 지나면 강학당으로 쓰인 인지당(仁智堂)있다.

이학정종(理學正宗)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명청대 이후 쓰인 말로 성리학의 정통이라는 의미다.

 

인지당 안에 설치된 조형물 당시 수업관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들의 치기는 고금이 다를바 없는 모양이다.

관광을 따라 나온 내국인 어린이들의 개구쟁이 모습,

 때맞추어 귀여운 풍경을 재현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 뒤편에 만세종사(萬世宗師) 라는 편액이 걸리 곳이 있다.

영원한 큰 스승이라는 의미다.

인지당 앞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격인 지숙료(止宿寮)와 은구실(隱求室)이 있다. 

 

 

 

 

 

(주희의 조상(彫像) 1130~1200) 

 

주희(주자)는 중국 송나라 때의 사상가 교육가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만인의 생활실천철학을 심어주어

오늘날에도 인류 정신문화의 지주가 되는 성현으로 추앙받는 사람 중 한 분으로 꼽힌다.

주자는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우계현(尤溪縣)에서 태어나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주자는 후학들이나 후손 아닌 다른 사람들이 존칭으로 주부자(朱夫子)또는 주자(朱子)로 부른다.

공자의 본명은 공구 이듯이 훌륭한 학자나 인물에게는 존경의 의미로 이름에 아래에 자를 붙인다.

주희는 나라로부터 <문공(文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아 주문공(朱文公)으로도 불린다.

무이정사 앞 뜰에 주희와 그를 따른 성리학자들의 조상(彫像)들 세워져있다.

 

진순(陳淳1153~1217)

 

@주자학(朱子學)

12세기에 남송의 대 유학자 주희가 주장한 주자학은 신(新) 유교라 할 수 있다.

주희는 도교문화와 불교문화가 찬란했던 당(唐)나라 시절

도교사상과 화엄교의(華嚴敎義)의 주이론체계인 이사법계관(理事法界觀) 즉

이(理:본체)와 사(事:현상세계)의 상즉(相卽)관계에 영향을 받고

북송의 주염계, 장횡거, 정이등이 주창한 태극설과 음양설을 함께 탐구하여

이기설(理氣說)적 세계관을 집대성하였는데

 기(氣)는 형이하학(形而下學)으로 사물의 실체로 보고

이(理)는 만물생성을 관장하는 즉 기(氣)의 근본인(根本因)으로서 내 세운 이기설(理氣說)이다.  

 

진덕수(眞德秀 1178~1235)

 

시대적으로 보면 만주족인 金 나라의 침공으로 송의 일족(一族)이 강남으로 도피하여

지금의 항주 임안(臨安)을 수도로 정하고 세운 나라가 남송(南宋 1127~1279)인데

주자학은 고증(考證)과 해석 주석을 주로 하는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훈고학(訓詁學)을 대신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를 송학이라고 하는데

송학은 원래 북송의 주돈이(周敦頤1017~1073)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인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127~1279)를 걸쳐 내려온 것인데

주희가 집대성하여 완성한 것이다. 

 

채원정(蔡元定 1135~1198)

 

이(理)는 인간에 있어서 본연(本然)의 성(性)으로서 인간은 기(氣)를 통하여 구체적인 실재가 된다.

그러나 기(氣)는 혼탁하여 그 혼탁 정도에 따라 개인별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내면적 수양(修養) 즉 거경(居敬)을 통하여 그 혼탁성을 정화하면 보편적인 본연의 理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이런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통하여 이(理)를 추구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것인데 이(理)와 기(氣)는 대립된 것도,

병렬적인 것도 아닌 보편적 것이며 상호적 보완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당시 문제가 많았던 봉건사회적 신분체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수학(修學)에 의한 신분이행을 독려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과거(科擧)체제로 굳어진 신흥봉건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적합하여 청(淸)나라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주희 자신은 <도학道學> <이학理學> <성학性學) <실학實學> <의리학義理學>이라 불렀는데

이는 모두 북송시대에 불리던 용어였다. 주희가 스스로 이를 자칭한 것은 이들 학파의 정통 자임한 듯하다.

후일 주희 말년에 일컬어진 <도학>이라는 말은 정부로부터 위학(僞學)으로 멸시되어 탄압까지 받게 되었다.

 

황명제(黃勉齊 1152~1221)

 

후세에는 이들 호칭 외에 북송 남송의 도학을 총칭해서 <정주학> <낙민학> <성리학> 등으로 불리어졌으며

서구에서는 <신유교주의 neo-confucianism>라고 한다.

주희의 교의에만 한정할 경우 <주자의 학><주자의 길>이라고 한다.

주자학을 성리학(性理學)이라 하는 성리(性理)란 말은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는 것으로써 우주의 원리를 연구하여

그 근본 원리를 깨닫고 인성(人性), 즉 우리의 자성(自性) 원리를 연구하여

인성의 본래를 깨달아 알자는 것이니 이 원리를 깨달아 진리에 의한 진리 생활을 하고 자성에 바탕을 둔

참된 생활을 하기 위한 학문이란 뜻이다.

당. 송대에 이르러 불교가 크게 일어나고 도교도 민간 신앙으로 굳어져

송대에는 상대적으로 퇴색하던 유학이

자극을 받아 새로운 이론체계를 갖추어 이를 집대성한 것이 남송의 주희(1130-1200) 였으므로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라 한 것이다. 원래 성리학의 연원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