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5. 07:26ㆍ국내 명산과 사찰
양양 하조대(河趙臺)
동해안 여행을 할 때 으레 감초처럼 들리는 곳이 양양 하조대다. 남원 광화루처럼 이도령과 춘향이의 로맨스와 같은 진한 이야기는 없지만 조선 태종의 개국공신인 조준과 하륜이 만나 은거했다는 곳으로 하얀 등대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해변의 기암들이 볼만하고, 하조대 아래 바위 위에 솟은 한 그루 솔이 일품이다.
하조대 안내서는 조준과 하륜이 함께 은거했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드러난 뚜렷한 사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한국역사 대백과사전에 나온 하륜(河崙)에 대한 기록을 보면
「1347(충목왕3)~1416년(태종16). 조선초기의 대신. 자는 대임(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부사 윤린(允麟)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14) 때 방년 19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니 시험관 이인복이 한번 보고 사람됨이 큰 것을 알아채고 아우 인미(仁美)의 딸과 결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으로 재직 시, 당시의 실권자인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고,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지금의 여주)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륜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장군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할 때 하륜이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성계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귀양에서 풀려나고 이성계가 즉위한 뒤 하륜은 경기도관찰사에 기용 되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는 태조가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홀로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이리하여 하륜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하륜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정적이 되었지만 하륜은 공민왕 시절 첨서중추원사로 있을 때 당시 명나라 태조가 표사(表辭)의 불근(不謹) 문제로 그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고자 할 때 하륜은 정도전을 대신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명태조의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1398년(태조7)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군을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웠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하륜은 우이정까지 올랐으며, 1400(정종2)년에 좌정승이 되어 명나라 영락제의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0년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거이 등과 함께 난을 수습한 공로로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하륜이란 인물이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kbs드라마 <용의 눈물>에 드러나듯 그의 뛰어난 지모(智謀)로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로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한 태종의 공신이기 때문이다. 무인정사(戊寅靖社)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 불리우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이태조의 개국공신이며 실권자인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 일당을 숙청하고, 세자 방번과 방석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고자 했으나 방원이 사양함으로서 대신 이성계의 둘째 아들을 정종을 세웠다. 그러나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 불리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키고 이방원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 모든 것이 하륜의 지모에 의하여 추진되고 하륜이 주처했기 때문인 것이었다.
태종의 1등공신이 된 하륜은 1414년(태종14)에 영의정부사에 오르고 70세에 진산부원군에 피봉 되었다. 그 후 왕명을 받들어 선왕의 능침(陵寢)을 순례하기 위해 함길도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죽었다. 음양(陰陽), 의술(醫術), 성경(星經), 지리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찍이 태조실록 15권을 찬수하였다.」
하륜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로 분리되나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선왕조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조선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를 진출하지 못하고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던 사람이다.
하륜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해박했는데 이는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지만 하륜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시세에 영합하는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정적인 조준과 함께 은거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의아심이 든다.
조준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것이 없다.
한국역사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조준(趙浚)(?~1405)(태종5년)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정치가이며.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旴齋), 송당(松堂), 시호는 문충(文忠:한국역사 대백과 사전편찬시 오류인지 모르겠지만 시호가 하륜과 같다), 본관은 평양으로 되어있다,고려 시중(侍中)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태어나. 1374년(공민왕23) 급제, 1386년(우왕2)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거쳐 전법판서(典法判署)가 되었다. 이성계의 신임을 받아 위화도 회군 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에 올라고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되었다. 1392년(공민왕4)에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여 왕을 폐위하고 이태조를 추대하여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특히 그는 경제분야에 밝아 고려말에는 전제개혁안(田制改革案)을 발표하여 문란한 토지행정의 개편을 부르짖었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조준의 안에 의해서 정비되었다.
조선초에는 도통사(都統使)로 5도의 병마를 통솔하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피임되었다.
정종 초부터 8년간 수상직에 있었으며 태종비 민씨 일파의 참소로 한 때 옥살이를 했으며
태종이 즉위하자 복권되어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1379년(태조6) 하륜(河崙)등과 함께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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