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춘당지의 까치들

2012. 12. 19. 10:56명승지

 

 

 

창경원 춘당지의 까치들

창경원 춘당지는 포토메니어들에게는 원앙으로 즐겨찾는 곳이다. 대개 12월 하순에서 우수경칩 무렵이 절정인데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가 보았다. 날이 조금 풀렸기에 연못의 얼름이 녹았나 싶었는데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하다가 들려오는 까치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카메라를 들어밀었지만 영 별로다. 마음이 이미 식은 상태라서 셧터에 힘이 빠져서 그런가. 좋은 사진은 대상에 몰입해야 하는데..마음에 콩밭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까치는 한자어로 작(鵲)이라 하며 희작(喜鵲), 신녀(神女),라고도 불리는 잡식성의 조류에 속한다. 

까치는 예로부터 우리의 민요·민속 등에 등장하는 친숙한 새이다. 또 신화에서는 비록 주인공은 못 되어도 구성상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예를 들어 중국의 칠월칠석 신화에서는 견우성과 직녀성의 가연을 연결시키는 오작교를 놓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에 우는 까치를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로 여겨, 마을에서 새끼치는 까치를 괴롭히거나 함부로 잡는 일이 없었다. 까치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북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지역 등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열대와 아한대를 제외한 북반구 전역에 살며, 우리나라 부근에서는 중국, 러시아 연방 연해주, 일본 규슈 등의 지역에 분포한다. 일본에서는 규슈 서북부에만 국한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2년 한국을 침략했을 때 일본 규슈로 이식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무장(武將)의 이름이 나베지마·나치하나·가토 등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며, 이식장소나 입증할 만한 자료도 불확실하다.

 

우리나라에서 까치는 1964년 10~12월 한국일보 과학부가 국제조류보호회의(ICBP) 한국본부와 관계학계의 후원을 얻어 시행한 '나라새' 뽑기 공개응모에서 2만 2,780여 통 중 9,373통의 압도적인 표를 얻어 나라 새로 뽑혔다. 점차 감소되어가던 까치는, 1966년 2월 24일 산림청 조수보호위원회가 수렵조류에서 까치를 제외시킴으로써 보호받게 되었다. 그러나 해가 지나면서 예기치 못했던 까치로 인한 농작물 피해, 정전(停電)사고 등 까치로 인한 피해도 속출해서 환경부는 1994는 유해(有害)조수(鳥獸)로 지정했다.

 

 

 

나라새는 애조사상(愛鳥思想)을 고취하며 민족을 상징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까치는 우리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친근한 새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나 깊은 산에서는 까치를 찾아볼 수가 없다. 까치는 사람이 심어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람이 지은 낱알과 과일을 먹으며, 심지어 사람 흉내까지 낸다. 사람을 가까이하며 학습이나 모방까지 잘 하는 지능이 높은 새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까치를 까마귀와 함께 잡새로 여긴다. <백과사전>

 

 

 

 

 

 

 

 

 

 

 

<삼국유사>에 따르면 계림의 동쪽 아진포에서 까치소리를 듣고 배에 실려온 나무상자를 열어보니 사나 아이를 얻었는데 그 아이가 훗날 탈해왕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행운의 길조로 여겨지고 세시풍속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국세시기>의 기록 의하면 설날 아침 가장 먼저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 해에는 운수대통한다하여 길조로 여겨졌다.

 

 

 

 

 

 

 

 

 

 

 

 

까치와 관련된 유명사찰로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에 있는 운문사인데 이 운문사의 본래 창건 당시 이름은 작갑사였다고 한다. 원래 작갑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서 이는 신라시대 진흥황18년(557)에 대작갑사(大鵲岬寺)로 창건된 절로서 고려 태조 왕건이 <운무선사>라는 편액을 내린 후 운문사로 불려왔다고 한다.

 

 

운문사의 창건실화를 보면, 신라백제 고구려의 삼국의 전란시 신라의 보양국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불법을 수학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에서 용왕을 만났는데 용궁에서 설법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용왕은 설법해준 답례로 금라가사 한 벌을 보시하면서 「지금 삼국이 혼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에 돌아가 작갑에 절을 지어 살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또한 몇 년이 안 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보양국사는 신라에 귀국하여 작갑이라는 어귀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원광이다」 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보양국사는 운문산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오층탑이 보이길래 내려가서 보니 오층탑은 보이지 않고 까치 한마리가 땅을 쪼고 있었다. 국사는 ‘작갑’이라고 한 용왕의 말이 생각나서 그곳을 찾아가 파보니 많은 전돌이 수없이 나왔다. 국사는 이 흩어진 돌을 다 모아 쌓으니 탑이 됨으로 이곳이 옛 절 절터임을 알고 그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한편 이목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에 채소가 마르자 보양국사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지방이 흡족하였다. 천제가 하늘의 법칙을 어겼다 하여 이목을 죽이려 함에 보양국사가 침상 밑에 이목을 숨겼다. 천사가 보양국사에게 이목이 있는 곳을 물으니 보양국사가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자 그곳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후로 이목이 살던 작은 못을 이목소라 부른다. 지금 운문사에 있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이목소라고 한다.

 

 

 

운문사는 고려말 일엽선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조까지 여러번 증개축을 시도하였으며 1950년 비구니사찰이 되었고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시작된 운문승가대학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운문산은 지금은 가지산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