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도선사의 나한상(2/3)

2012. 7. 4. 00:52국내 명산과 사찰

 

삼각산(三角山) 도선사(道詵寺)의 나한(羅漢)(2/3)

 

 

 

 

 

 

 

참 오래만에 들려보는 도선사다.

예전에 없던 탑이 세워져 있고 마애불 옆 공터에 나한상(羅漢像)이 두서없이 진열되어 있다.

세어보니 모두 열 아홉분(19)의 나한들이다.

미루어 생각건대 16나한이 아니라 500나한을 조성할 모양이다.

각각의 석조물의 크기를 보아 나한전에 모실 것 같지는 않고 노천(露天)에 진열할 것 같이 보인다.

도선사의 두번째 이야기로 이 아라한 상을 빌어 아라한에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한(阿羅漢)(arhãn)

나한은 산스크리트 arhãn을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부처의 덕 높은 제자를 뜻한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자>,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치게 하는 자>, 즉 성자(聖者)를 가리키는 말인데, 한역(韓譯)으로는 응공(應供), 응진(應眞) 살적(殺賊) 불생(不生) 무생(無生) 무학(無學) 진인(眞人) 등으로 의역된다.

 

 

불교사전에 따르면

소승의 극오(極悟)한 자리의 이름으로 성문(聲門)사과(四果)의 중 가장 윗자리로

뜻으로는 살적(殺賊), 번뇌적(煩惱賊)을 살(殺)한다는 뜻이며,

당연히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는다는 뜻으로 응공(應供)이라 하며,

또한 길이 열반에 들어가 다시는 생사(生死)의 과보(果報)를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생(不生)이라 한다 고 했다.

 

 

응공(應供)은 또한 여래(如來)의 십호(十號) 중 하나이며. <지도론 三(智度論三)>에 「아라阿羅는적(賊), 한(漢)은 파(破)를 뜻하며 일체의 번뇌를 파(破)하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한다. 또 아라한은 일체가 누진(漏盡)함으로 응당 일체세간과 모든 천인(天人) 공양(供養)을 얻는다 하고, 또한 아(阿)는 부(不), 나한(羅漢)은 생(生)이니, 후세 중에는 다시 생하지 않음으로 아라한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번역하여 응진(應眞), 진인(眞人) 이라 한다 고 했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성취하는 과보를 네 가지로 정리된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인데, 수다원(예류預流)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 다시는 중생으로 돌아가지 않는 분들이고, 사다함(일래一來)은 한 번 더 사바세계에 와서 윤회의 삶을 모두 끝내는 분들이며, 아나함(불환不還)은 금생을 마친 뒤 괴로움이 없는 천상세계(극락세계)에 태어나서 윤회의 삶을 끝내는 분들이고, 아라한(응공)은 금생에서 이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분이다. 이 네 부류의 수행자를 모두 성자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아라한은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분, 더 이상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이 없는 분(무학), 모든 번뇌의 적을 무찌른 분(살적)으로서 불교 수행자들의 목표이기도 하다. 부처님도 아라한(응공)이라고 하는 데 초기불교에서의 말하는 아라한과 구별하기 위해서 대아라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한은 조성물이나 탱화로 전각에 모셔지는데 나한전에 모셔진 아라한은 일반적으로 16나한이며,

많게는 500나한을 모시기도 한다. 나한을 모신 전각은 나한전 외에도 응진전, 팔상전, 독성각이 있다.

나한전, 응진전은 같은 성격의 전각이며,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가지로 크게 분류하여

그림이나 조각으로 모신 전각으로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들을 모시는 경우가 많이 있다.

독성각은 빈두루존자라고 하는 16나한 가운데 한 분을 모신 전각이다.

 

 

아라한이란 원래 범어 아란 arhãn의 음사이고 이 아라한 이란 말은 보통 나한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는데, 6신통과 8해탈법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 번뇌를 아주 떠났으므로 신자들에게서 공양을 받게 되면 그 자체가 공덕이 된다고 하여 복전(福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6인의 나한들도 이러한 의미와 아라한과를 증득한 제자들이다. 대승에서는 10지에 오른 보살을 아라한이라고도 하는데 이설(異說)이 있다.

 

 

<입대승론>에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16나한에게 불멸후의 불교를 보호하고 지킬 것을 일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16 나한은 삼계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삼장(三藏:경율론)에 통달 하였다고 한다. 특히 외전에 능하여 여러 외도의 항복을 받았으며, 신통력으로써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하였다고 한다. 16나한은 정법의 시대에는 불교를 지키고, 말법의 시대에는 불교인들의 복전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열반의 과보를 얻게 한다고 한다.

 

 

 500나한은 부처님 당시에 청정한 수행으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500명의 뛰어난 제자를 말한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면 더이상 나고 죽고 하는 생사윤회의 흐름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음으로 아라한은 불생과의 최고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500명의 제자들은 특별히 성자로 추앙되어 500나한으로 신앙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의성에서 500나한들을 위하여 설법하신 적이 있고 또 이들500나한을 위하여 특별히 수기를 베푸는 인연을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마가다국 왕사성의 칠엽굴에서 경전 편찬회의인 제 1결집이 열렸을 때는 마하가섭 존자를 상수로 하여 500명의 나한이 이 결집회의에 참석하여 불교경전을 편집하였는데

500명의 아라한이 참석하였다고 하여 이결집을 500결집이라고도 말한다.

이 결집에서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해서 대중들에게 들려주고 점검하고 500나한이 모두 이 경전을 암송하였다고 한다.

 

   

또 카니시카왕 때 열린 제4결집에서도 500명의 비구가 참석하였는데 후대에서는 이들도 500나한이라 불렀다고 한다. 500나한은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 등의 북방불교에서는 특별히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래서 많은 사찰에서 500나한을 조성하고 전각을 지어 따로 모시기도 한다.이 500나한을 모신 곳 을 500나한전 또는 500응진전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곳에 500나한전이 있지만 은해사 거조암 의 500나한 등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나한신앙의 유래

'나한'이라는 말은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김수로왕이 도읍을 정하고 '16나한이 머무르기에 적합하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의 나한신앙은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 건국 직후 923년에 태조가 중국 양나라에 파견한 사신 윤질이 오백 나한상을 가지고 귀국하여 해주 숭산사에 처음으로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왕실에서는 문종(1053)때 신광사에서 나한재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시행하였다. 학자들은 나한신앙이 크게 성행된 시기로는 고려시대로 1051(문종 5)~1284년(충렬왕 10) 사이로 보며 이때에는 국가적인 공식 나한재(羅漢齋)가 빈번히 열렸고, 보제사(普濟寺) 금당이 나한을 주존으로 모시는 나한보전(羅漢寶殿)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뒤받힘 하고 있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도 나한을 섬기고 따랐던 일화가 전해지며, 태종 때와 세종 때에도 나한재가 지속적으로 베풀어졌다고 한다.

 

 

나한 신앙은 고려시대에는 주로 외적을 물리치거나 국왕의 장수와 백성의 안녕을 비는 기우제 성격으로,

조선시대에는 주로 구복(求福) 중심의 신앙으로 전래 되었다.

 

 

 

 

455번째 나한 이야기

 

중국에는 500나한(아라한)이 있다. 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난·가섭, 달마, 그리고 중국의 역대 조사 등 깨달음을 이룬 이들이다. 모두가 인도인과 중국인이다. 그런데 딱 한 명의 예외가 있다. 500나한 중 455번째 나한이다.

그는 인도 사람도 아니고, 중국 사람도 아니다. 다름 아닌 신라 사람이다. 그가 바로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인 정중무상(淨衆無相·684~762) 선사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무상 선사는 대단한 분>이라고 찬탄한 적이 있다.

 

신라의 왕자가 왜 출가했을까. 그것도 중국 땅 서쪽 깊숙이 와서 말이다. 드라마틱한 이유가 있었다. 왕자에겐 막내 누이동생이 있었다. 누이는 불교에 심취했다. 혼담이 오가고 결혼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누이는 칼로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출가를 통한 수행자의 삶을 원했던 것이다. 그걸 본 왕자는

 「가냘픈 여인도 절조(節操)를 안다. 하물며 사내인 내가 가만히 있을 손가」라며

출가를 결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자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갔다. 그런 뒤에 다시 청두로 갔다. 거기서 처적 선사를 만났다. 처적은 지선 선사의 수제자였다. 지선은 육조 혜능과 함께 오조 홍인 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인물이었다. 처적은 신라의 왕자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왕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태웠다. 그걸 본 뒤에야 처적 선사는 왕자에게 <무상(無相)>이란 법명을 내리고 제자로 맞았다. 그의 구도심을 본 것이다.

 

 

중국 쓰촨성(四川省) 자중현(資中縣)의 영국사(寧國寺) 법당의 좌우 벽에는

무상 선사가 손가락을 태우고, 동굴에서 수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사찰 입구에 <범목가사전사신라삼태자(梵木袈裟傳嗣新羅三太子)>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도에서 온 목면가사를 신라의 삼태자에게 전했다>라는 뜻이다.

<목면가사>란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가져와

이조 혜가-삼조 승찬-사조 도신-오조 홍인을 거쳐 육조 혜능에게 전해졌던 깨달음의 징표다.

 

 

 당시 측천무후는 즉위 후에 혜능 대사를 황궁으로 초청했다. 혜능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측천무후는 <그럼 대신 달마 조사가 물려준 가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혜능 대사는 가사를 보냈다.

혜능은 빠졌지만 측천무후는 신수·지선·현약·노안·가은 선사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10대 고승>을 황궁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물었다.

<화상들은 무슨 욕망이 있습니까?>

지선 선사를 제외한 나머지의 대답은 똑같았다.

<욕망이 없습니다.>

 

측천무후가 지선 선사에게도 물었다.

<화상도 욕망이 없습니까?>

지선 선사가 답했다.

<욕망이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측천무후가 다시 물었다.

<어찌해서 욕망이 있습니까?>

지선 선사가 말했다.

<일으키면 욕망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욕망이 없습니다.(生則有欲 不生則無欲)>

이 말을 듣고 측천무후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목면가사와 칙명으로 새로 번역한

『화엄경』 한 부를 지선 선사에게 내렸다.

 

 

 지선 선사의 답은 명쾌했다. 욕망이 뭔가. 마음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욕망이 없다.>고 말한 이들은 「마음이 없다」고 답한 셈이다.

그건 숨 쉬지 않는 돌멩이와 같다.

지선 선사의 답은 달랐다.

그는 「일으키면 욕망이 있고, 일으키지 않으면 욕망이 없다.>고 답했다.

그 답은 숨을 쉰다. 들숨과 날숨이 자유롭다. 우리의 마음도 숨을 쉰다.

일으키는 마음이 날숨이고, 내려놓는 마음이 들숨이다.

 

 지선 선사의 마음은 그렇게 들락날락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게 왜 가능한가. 답은 간단하다.

욕망의 실체, 다시 말해 마음의 실체를 봤기 때문이다.

그게 온전히 비어있음을 말이다.

그걸 알면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고, 쓰고, 내려놓고, 다시 일으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주먹을 세게 움켜쥐어도 허공을 붙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음이 <허공(비어있음)의 작용>임을 깨친다면 말이다.

그래서 마음을 일으킨 뒤와 일으키기 전이 하나로 통하는 거다.

 

 

 측천무후는 혜능 대사에게 「전승 가사를 지선 선사에게 줘 잘 보관 공양토록 했다.」는 칙서와 함께

 따로 가사 한 벌과 비단 500필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혜능 대사의 목면가사가 지선 선사에게 가게 됐다는 것이다.

그 가사가 수제자인 처적 선사에게, 다시 수제자인 무상 선사에게 전해졌다는 기록이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등장한다.

(일부에선 지선이 아닌 처적 선사가 측천무후에게서 가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사 법당에는 지선 선사가 황궁에서 가사를 받는 장면,

처적 선사 앞에서 신라의 왕자가 손가락을 태우는 장면,

무상 선사가 중국인 대중에게 법을 설하는 장면 등이 좌우 벽면에 가득 그려져 있었다.

 

 

 무상선사는 천곡산 어하구(御河溝)란 골짜기에 있는 동굴에서 15년간 수행했다.

풀로 옷을 엮어 입고, 음식이 떨어지면 흙을 먹었다고 한다.

너덜너덜한 옷에 머리카락과 수염도 길었다.

지나던 사냥꾼이 짐승으로 착각해 활을 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15년을 수행했다.

 

 

스승인 처적 선사가 무상에게 물었다.

「너는 천곡산에서 무엇을 했느냐?」

무상이 답했다.

「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쁘지도 않았습니다.(總不作 只沒忙)」

그 말을 듣고 처적 선사가 말했다.

「너와 그가 바쁘면, 나 또한 바빠진다.(汝與彼忙 吾亦忙矣)」

 

 이 문답은 무상 선사의 견처(見處·깨달은 경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굳이 풀면 이렇다.

<천곡산에서 무엇을 했는가?>라는 스승의 물음에 무상은

<늘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만든 착각 때문에 바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답을 한 셈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바쁘지 않다. 허공을 가르는 바람도 바쁘지 않다.

가을에 물드는 단풍도 바쁘지 않다. 자연과 이치에는 바쁨이 없다.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바쁠 뿐이다.

 

 왜일까. 착각 때문이다. 비와 바람, 자연과 우주의 이치에 대한 착각 때문이다.

처적 선사는 「너와 그가 바쁘면, 나 또한 바빠진다.」고 답했다.

무슨 뜻일까.

내가 바쁘면 세상이 바쁘고, 내가 고요하면 세상이 고요해진다.

깨달음도 그렇다.

내가 눈을 뜨는 순간, 온 우주가 눈을 뜬다. 내가 눈을 감으면, 온 우주가 눈을 감는다.

그래서 처적 선사는

「네가 눈을 감으면 나 또한 눈을 감게 된다.」고 한 것이다.

제자의 명쾌한 답에 스승은 그렇게 맞장구를 쳤던 것이다.

 

 

무상선사는 대중에게 <인성염불(引聲念佛)>이란 수행법도 제시했다.

신라 사람으로 중국 땅에 정중종(淨衆宗)이란 종파도 세웠다.

안록산의 난(755년)이 일어나자 당 현종은 쓰촨성으로 피신했다.

그때 무상 선사와 만났다. 무상은 현종에게 제왕으로서 선정을 베푸는 것에 대해 선법(禪法)을 설했다.

난이 끝나자 현종은 무상 선사에게 대자사(大慈寺)란 절을 내렸다.

무상 선사는 티베트에서 온 사신에게 처음으로 선(禪)불교를 전하기도 했다.

티베트 고대역사서인 <바세전>에도 무상 선사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사실 <신라 왕자 무상 선사>는 역사 속에서 잊힐 뻔했다.

1907년 영국인 탐험가 스테인이 돈황석굴에서 발굴한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를 통해 되살아났다.

거기에 담긴 무상의 어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치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탐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바람이 비었음을 안다. 그래서 바람이 생기고, 바람이 불고, 바람이 사라짐을 볼 뿐이다.

누구도 바람을 움켜쥐려고 하진 않는다. <바람이 무엇인가.>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이치를 알면 움켜쥘 수가 없는 법이다.

1200년 전, 무상 선사는 그걸 설했다.

 

(455번째 나한의 이야기는  홈피/ 프라이즈/ 백성호 기자의 올린 글 중 일부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국내 명산과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길산 수종사  (0) 2012.09.25
삼각산 도선사(3/3)  (0) 2012.07.07
삼각산 도선사의 12지상  (0) 2012.07.01
창덕궁 후원  (0) 2012.06.24
5월의 장미(2)  (0) 2012.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