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2012. 6. 24. 19:51국내 명산과 사찰

창덕궁 후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창덕궁 후원(後苑)의 역사 

창덕궁의 후원(後苑)은 본래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禁苑)이라고 불렀으며, 우리가 습관적으로 알고 있는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사용한 용어이다. <태종실록〉에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원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459년(세조 5)에는 후원 좌우에 연못을 만들고, 열무정(閱武亭)을 세웠다. 1463년에는 후원을 확장하여 경계가 거의 성균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후원도 불타버렸으나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이때의 모습이 왕조실록의 주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이한 화초와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의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다" 라고 했다.

 

1636년(인조 14)에 지금의 소요정(逍遙亭)인 탄서정(歎逝亭), 태극정(太極亭)인 운영정(雲影亭),

청의정(淸 漪亭) 등을 세웠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바위에 새겨놓았다.

 

1642년에는 취규정(聚奎亭)을, 1644년에는 뒷날 관덕정(觀德亭)인 취미정을, 1645년에는 희우정(喜雨亭)인 취향정(醉香亭)을, 1646년에는 청연각(淸 燕;閣)인 벽하정(碧荷亭)을, 1647년에는 취승정(聚勝亭)과 관풍정(觀豊亭)을 세웠다. 1688년(숙종 14)에는 청심정(淸心亭)과 빙옥지를,

1690년에는 술성각 옛 자리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을 세웠다.

 

1704년에는 대보단을 축조했고, 1707년에는 택수재(澤水齋)를 세웠다.

 1776년에는 왕실의 도서를 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주합루(宙合樓)라 부르는 중층 누각이며,

그 아래 연못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택수재를 지금의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쳤다.

 

1828년(순조 28)에는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후원 안의 개금재 자리에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주합루·영화당(暎花堂)·사정기비각·서향각(書香閣)·희우정·제월광풍관(薺月光風觀) 등의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다.

둘째 영역은 기오헌(寄傲軒)·기두각(奇斗閣)·애련지(愛蓮池)·애련정·연경당이 들어선 지역이다.

셋째 영역은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승재정·폄우사(砭愚榭)가 있는 지역이다.

넷째 영역은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翠寒亭)·소요정·어정(御井)·청의정·태극정이 들어서 있다.

 

그밖에도 청심정·빙옥지·능허정(陵虛亭) 등이 곳곳에 있다. 후원의 구성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 그리고 앞에 펼쳐진 편평한 땅 등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인공을 가해 꾸며놓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조원(造苑)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예이다.

  <출처: 워키 백과에서 편집함>

  

 

 

(공사중인 관계로 개방이 되지 않은 부용정 모습)

 

1.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

후원의 첫 번째 정원으로 휴식뿐만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곳으로 약 300평(1000평방미터) 넓이의 사각형 연못에 부용정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건물이 지어졌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루기도 했다.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의 형상으로 2012년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창건한 2층 누각이다.

아래층에는 왕실의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규장각>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다.

 

 

<주합루>는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라는 뜻이고,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주합루를 오르는 정문이 <어수문(魚水門)>인데

이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큰 문 하나와 좌우로 작은 문 두 개로 나누어진 모습이 독특하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영화당이다.

(어수문에서 바라본 주함루, 규장각은 그 아래층임)

 

부용지의 어정 

 

 

 

부용지의 영화당풍경

 

 

조선의 역대왕들은 신궁이라고 불리울 정도의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신궁의 환생으로 여겨지는 세조 등 활쏘기에 능한 왕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조 또한 문예뿐만 아니라 활쏘기도 능했는데

그는 한 때 50발 중 49을 명중시키고는

<무엇이든 가득차면 못쓰는 것이다> 라고 하며

한 발을 일부러 빗나가게 쏘았다는 일화가 <정조실록>에 남아있다. 

 

 

 

(부용지에서 애련지로 가는 길)

 

 

(애련지의 애련정)

 

2.애련지(愛蓮池)와 의두합(倚斗閤)

1692년(숙종18년)에 연못 가운데에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이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은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고 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27년)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함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들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함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애련지 가는 길 측면에서 본 의두합)

 

(이 문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고 하는 의두합의 정문격인 불로문)

 

(의두합)

 

(좌측 건물이 의두합이고 우측 건물이 운경거)

 

(담장 넘어로 본 의두합과 운경거)

 

 

 

 

 

 

 

 

붕어빵에 붕어 없드시 아무리 둘러 보아도 애련지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연꽃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리 되었을까? 세상이 너무 탁해서 연꽃이 모두 고사한 것인가?      

 

 

3.연경당(延慶堂)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28년) 경에 창건되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 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 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제한되어 있는 데 반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 풍 벽돌을 사용했고 동판을 씨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을 이용되었다.

 

 

 

 

 

 

 

 

(사랑채) 

 

(연경당의 담장)

 

 

 

 

(사랑채 앞 잠옷(?)입은 외국인) 

 

 

 

 

 

 

 

(존덕정)

 

4.존덕정(尊德亭) 일원

후원 중 가장 늦게 조성된 정원이다. 원래 모습은 네모 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관람정 맞은 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 건물이 딸리<ㄱ>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속에 자리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22년)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경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승재정)

 

 

 

(관람정)

 

 

 

 

 

(폄우사)

 

 

 

(취규정, 옥류천 가는 언덕에 있다.) 

 

(취한정)

 

 

 

(태극정)

 

 

5.옥류천(玉流川) 일원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14년)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깍아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던 곳이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한정(籠寒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 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청의정)

 

(옥류천의 어정)

 

(소요암과 주목)

 

@주목

상록침엽교목으로 4월에 꽃이 피며 10월에 결실을 맺는다. 옥류천의 이 주목의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나무껍질과 속살이 유난히 붉어 주목이라 부른다.

 

(소요정)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353년 중국 동진 소흥(紹興: 현 샤요싱) 지방의 난정(蘭亭)에 당대 명필 왕희지(王羲之307~395)를 비롯한 명사 41명이 모였다. 난정 밑에 굽이치는 물길을 만들어 술잔을 띄어 보내면 자기 앞에 온 술잔을 받아들고 시를 지어 발표했다. 다음 잔이 올 때까지 발표하지 못하면 벌주로 술 석잔을 마셔야 했다.

여기서 나온 시를 모은 것이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하며 그때부터 상류층의 유희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창덕궁 후원 관람시 유의사항이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관람시간은 자유시간대이지만 후원은 관람시간이 정해져 있다. 가이드가 붙어 함께  이동함으로 약간의 제약이 따르지만 관람시간대를 놓지면 입장이 불가능하다.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후원까지 관람할려면 매표는 3군데 모두 해야 한다.동선은 4호선을 이용할 경우 안국역에서 내려 돈화문을 들어가 창덕궁을 먼저 관람하고 시간대에 맞추어 후원을 관람하면 된다. 후원관람이 옥류천에서 끝나게 됨으로 다시 후원입구(매표소)로 나와 티켓팅한 후 창경궁 일대를 돌아보고 춘당지를 거쳐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으로 마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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